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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 호 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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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 설교자  :  황요한목사 
> 본  문  :  호세아 9: 10-17

여러분들이 길을 나서게 되면 사거리나 넓은 도로를 건널수 있도록 만든 횡단보도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횡단보도를 서로간의 약속을 실천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자동차의 약속,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과 자동차를 운행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유심히 보면 그 앞에 정지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아주 두껍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정지선은 모든 차량이 보행자를 위하여 반드시 그 곳에서 서겠다는 약속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있는 사거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정지선에서 정지하는 차가 있는 반면에 아예 무시하는 차들도 있어 보행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통안전진흥원의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지선에서 정확하게 정지하는 준수율이 22.6%라고 나와 있는 반면에 정지선을 무시하고 횡단보도까지 와서 멈추는 차량들이 53.1%, 아예 횡단보도를 몇 미터씩 침범하는 차들이 24.3%였습니다. 결국 정지선을 무시하는 차들이 무려 77.4%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 교통사고의 상당수가 횡단보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정지선이란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지만, 그 약속을 어기면 불행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행위 곧 사회적 약속이 깨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불안을 느기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을 아침마다 학교로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말할 때 기준은 1차적으로는 GDP 즉 국가총생산이나 국민총소득 같은 것들을 비교하여 평가하지만, 사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외적 통계나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77%가 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을 가 보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김없이 정지선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춥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행신호가 끝나고 자동차가 가도 되는 상황에서 어떤 보행자가 뒤늦게 횡단보도에 뛰어들면 그가 건너편 인도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로 차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줍니다. 미소까지 보이면서 말입니다.

자기의 권리이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고 양보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교회 차량을 운행하는 분들에게도 늘 부탁하는 말씀이 다름아닌 교회차량이 교통질서를 가장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교통법규를 안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먼저 새로워져야 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호세아서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문제가 보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하지않아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조화가 깨어진 인생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점점 어두움의 권세에 종노릇하게 되고 결국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창세기 3장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부족함이 없이 허락하신 창조주는 그것을 다스리며 관리하도록 은혜와 권세를 아울러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에덴에서의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와 은총의 장소였습니다만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욕심에 불을 지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은혜의 그릇을 엎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확고한 주의 말씀에 의심의 마음을 갖게한 사탄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가정법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예전과 달라보였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의 눈으로 바라볼 때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약속을 깨뜨린 후, 축복의 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주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면서 부터였습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생겼던 우리의 욕심이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죄악으로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세계로 이끌고 간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에브라임으로 표현된 이 백성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것인 줄을 믿습니다. 그것보다 귀한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것이 가장 큰 복인 줄 믿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를 봄과 같이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허니문이었어요. 광야에서 포도열매를 만난 것처럼, 정말 무화과나무에서 첫 열매를 얻는 기쁨같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일 때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0절 후반에 보면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라는 함으로서 현재의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상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이 우상에게로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바알브올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봉독하면서 얼마나 섬듯하고, 얼마나 두려운 말씀들입니까? 너희가 아이를 낳지도 못할 것이고, 기를 써서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살지 못 할 것이다. 이거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어요? 너희가 아무리 곡식을 심는들 곡식이 계속해서 수확이 감소할 것이고, 결국에는 추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성도 여러분, 이런 문제들이 생길 때 빨리 분별력을 가지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에브라임에게 두 가지를 특별히 부탁하는데, 9장 1절에 보면 육신의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방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지금 우상의 제단 앞에 가서 죄인의 부흥의 길을 흥분되어서 기뻐 뛰놀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너희 타작마당이 떨어질 것이고, 너희 소득이 다 줄어들 것이고, 다시는 추수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우상의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는 이스라엘, 죄 짓는 것이 재미있고, 죄 짓는 것이 즐거워서, 그 우상의 자리에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강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7절과 8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악이 많음으로 하나님께서 다 기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악인이 잘 될 때가 있습니다.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대화하면서 세상의 법을 지킬 때에는 손해가 되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업이 잘 되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면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 사회의 구조가 참으로 잘 못 된, 법은 제대로 되어 있지만 그 법은 지켜지지 않고, 편법들이 난무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마음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악인이 형통하며, 의인이 고통 받는 것에 대해서 제일 고민하고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 욥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장시간 장문의 욥기를 보면 결론은 그것입니다. 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는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에 혼란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의 꾀를 쫓지 말고, 조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도 다양한데, 보편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가장 못되게 구는 그 집의 논은 비가 좀 안 오면 좋은데, 그 집은 아무리 벼를 심어도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추수가 되지 않고, 곡식이 되질 않고, ‘거봐. 너 못되게 굴면 하나님께서 너 복주지 않아’ 이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그 못되게 구는 악인의 논에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셔서 벼가 잘 자라고, 곡식이 열매를 맺는단 말이예요. 우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보편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악인이 무슨 일을 해도 허가도 잘 봤고, 사업도 잘 하고, 더 소득도 늘어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은혜, 일반 섭리를 중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때 곧 심판의 때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각각 행한 대로 보응을 받으리라. 하나님 머리 나쁘신 분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집니다. 저도 이제는 수첩을 반드시 들고 다니는데, 하루의 일정을, 한 주간의 일정을, 한 달의 일정을 수첩을 보아야 정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할 수가 있어요. 이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람보고도 아주 내 생명줄이라고 그래요. 그러면서 제 교회수첩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제는 기억력이 자꾸 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다 세신바 되었고, 기억하신바 된 줄 믿습니다. 정확하고 철저하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고 사는게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주님의 그 날, 심판의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미래지양적인 삶이지요. 오늘이 아니라 내일입니다.

'조지 스웬돌'은 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죄는 그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환영한다. 죄는 유다처럼 미소지으며 입맞춤하지만 결국에는 배반하고, 죄는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요압처럼 결국 아브넬을 죽이고 만다"

가룟유다가 주님한테 찾아와서 미소를 지으면서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사양사람들도 입맞춤은 아무나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과는 그냥 악수 정도를 나눕니다. 조금 친하면 볼에다가 입맞춤 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입에다가 입맞춤합니다. 지금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입맞춤을 하고 있어요.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보통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라고 사람들 앞에 거짓된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기로 일을 끝낸 뒤였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성도들을 표현할 때 쓰는 말중에 ‘거북이 크리스찬’이란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느릿느릿한 사람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 짐승들이 먹이를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있는데, 새는 평균 9일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하고, 개는 20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무려 500일을 먹지 않고도 견딘다고 해서 붙여진 말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빈둥대면서도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 바로 "거북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지요.장기간동안 기도도, 전도도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일껏는 말입니다. 이런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아모스 8장은 말씀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말씀의 기갈로 이 백성들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하루의 생활, 여러분의 일주일의 생활, 여러분의 한달과 일 년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말씀의 양식을 먼저 충족시키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에서 중심은 말씀이지요? 물론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예배를 늦게 옵니다. ‘왜 늦게 오셨어요?’ ‘아직 설교 시작 안 했잖아요?’ 설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라는 말은 아니지요. 아직 설교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안심하고 오는 분은 참 안타깝지요?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 끝나면 훌쩍 갑니다. 왜 가냐니까, 설교 들었으니까 간다는 거예요. 축도가 끝나야지요. 축도가 예배를 마무리 하는 것인데, 화장실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는 사람하고 똑같은 거지요. 뭔가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이 백성이 말씀의 기갈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에브라임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들도 육신의 양식만을 구하지, 영적인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점점 기갈이 되어서 호세가가 볼 때에 더 이상 살 기력이 없고, 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10절 말씀처럼 너희가 과거에 광야에서 포도인 것처럼, 무화과의 첫 열매인 것처럼 주님의 기뻐하심이 되고, 주님의 즐거움이 되는 그러한 삶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오늘의 말씀의 제목이 그것입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이 말은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고 원만할 때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들의 삶이 광야에서 포도인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감격해 하시는 광야의 포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나그네에게 광야에서 포도는 그를 살리는 겁니다. 오아시스와 같은 거지요.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이 사회의 정말 산소같이, 이 사회에 정말 필요한 포도와 같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성도의 삶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분별해 가면서 주의 듯 이루어 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메마른 삶 속에서 갈수록 영적인 양식을 등한히 여기면서 여전히 생명이 붙어있음을 만족케 하는 어리석음을 가졌던 저희에게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 주시고, 분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언제나 주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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