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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해야 하는 이유 / 마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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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용서해야 하는 이유
성경말씀 : 마태복음 6:14-15

우리가 살다보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고 내가 남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본의 아니게 그런 일이 생기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쁜 의도가 개입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면 더 이상 상처가 커지는 것을 막고 치유할 수 있지만, 인간의 완악함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심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 결과,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지고 드디어는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여서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일인데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그 사람의 일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아내의 마음에 화살처럼 박혀서 남편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게 된 경우가 있는가하면, 아버지가 말썽을 부리는 아들에게 던진 비난의 말 한 마디가 그 아들을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순전히 우리 자신의 오해로 인해서 남을 미워하고 마음에 상처를 만들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인간관계로 인해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방치하지 말고 빨리 치료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야만 인생을 활기차고 희망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우리 속에는 악한 본성이 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생각을 하고 악을 행합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남의 재물을 빼앗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범죄 행위인 줄을 압니다. 어려서부터 배운 도덕률이 이 같은 행동이 나쁜 것이라고 말해 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형법에도 이 같은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악한 행위는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한 것도 죄지만 남의 재물을 훔친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들이 만든 도덕이나 법보다 더 엄격합니다.  국법은 남을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남을 죽게 만든 것은 물론 살인이지만 우리가 마음속으로 남을 미워해도 역시 살인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이성을 보고 마음속에 음심을 품으면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결과로 나타난 우리의 행위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 앞에서 의롭다고 자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는 형벌이 따르는데, 성경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사람’ 속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인간들의 실상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절로 3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로 이것이 인간들이 처해 있는 실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믿은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함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서 구원 얻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구원을 일컬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엡 2:8). 선물은 주는 사람의 호의에 의해서 거저 받는 것이지, 값을 지불하고 받으면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신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무한한 용서에 대하여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8)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종류의 생명체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위대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 그저 형식적으로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용서하신 죄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개가 나에게 한 잘못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쁜 행위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용서가 아닙니다. 어쩌면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되 마치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여겨 주십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독생자를 희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죽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더할 수 없이 커다란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야말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거든 계속해서 서운한 감정, 나쁜 감정을 마음에 간직하지 말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무조건적인 용서를 생각하십시오. 그리할 때 기꺼이 상대방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억울하게 하고 괴롭힌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언뜻 보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손해가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 중에서 누구에게 더 좋은 일이냐고 묻는다면, 용서를 베푸는 편입니다. 우리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줄 때 먼저 우리 자신이 치료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이 부인은 어느날 고등학교에 다니는 하나뿐인 아들이 상급생에게 맞아서 식물인간이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 학생이 석 달이 되도록 용서를 빌러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나도 가해자에게 똑같이 복수해 주고 말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그렇게 보복을 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마음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소위 말하는 홧병은 그렇게 해서 생깁니다. 그런데 석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그 사람이 남편과 교대를 하고 병실을 비운 사이에 그 가해자 학생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찾아와서 식물인간이 된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써 용서를 빌고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남편과 함께 그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의식이 없이 누워 있는 아들에게도 그 학생을 용서해 주라고 말해 주었고, 그 아들은 며칠 후에 평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든 학생을 용서해 주었기에 이제 평온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증오하면서 산다면 머지않아 홧병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생을 용서해 주고 나니까 그 같은 파멸을 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열일곱 살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들판에서 양떼를 치는 형들을 찾아갔다가 그만 형들에 의해서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렸습니다. 처음에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마음을 돌려서 은 이십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형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았으면 형들을 생각만 해도 분노로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쾌활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인정을 받고 중책을 맡았습니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근동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막강했겠습니까?

그 즈음, 애굽을 비롯해서 주변 여러 나라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칠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모든 나라 백성이 굶주리는데 애굽은 총리대신 요셉이 있어서 칠년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충분히 비축해 두었으므로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살던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지난날 형들의 악행에 대해서 보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복하지 않았으며, 형제의 우애로써 후하게 대우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을 때 형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두려움으로 머리털이 곤두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려워 떠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흉년이 아직 다섯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그의 열 한 형제와 그 온 가족을 애굽으로 초청해서 비옥한 고센 땅에 거주하게 했습니다. 오랜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형제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었으니 요셉이 혹시 그들을 미워하여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모든 악을 갚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요셉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요셉은 울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당한 일을 추억해서 운 것이 아니고 형들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함을 슬퍼한 것입니다. 또 얼마 후에는 형들이 직접 요셉을 찾아와서 그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오히려 요셉이 간곡한 말로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형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혔더라면 그가 총리가 되기 전에 이미 병들어 죽었을는지도 모릅니다. 혹 죽지 않았더라도 이미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꿈속에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요셉은 어떤 비극적인 환경에 처할지라도 낙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아시고 언제나 용서하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베푸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 번 용서하면 많이 한 것으로 여기는데,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할 의양이 있음을 내비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장)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은 곧 우리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는 5천 데나리온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오천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노동자의 일당을 오만원으로 계산하면 2조 5천억원이 됩니다. 아마 이만한 빚을 지고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반면에 그의 동료 동관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게 일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그러니까 약 오백만원을 빚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 가련한 동료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종들끼리 빚을 진 것은 우리가 이웃에게 잘못한 것을 말합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적은 금액이고 따라서 사람들이 나에게 범한 작은 허물이 여기 해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큰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오늘 본문에서도 “1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용서해 주어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도 용서해 주라고 명하십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원수를 용서해 주는 것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2장 19절로 21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9)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머리 위에 숯불을 이고 있으면 그 뜨거움으로 인해 얼굴이 빨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에게 선을 행할 때 그의 마음이 감동을 받고 자신의 비열한 행위를 뉘우치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줌으로써 그들을 감동시켜서 뉘우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비유컨대 불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불을 품으면 결국 상대방을 태워버리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불에 데고 말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아니하고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사람을 쓰러뜨리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복수의 불을 마음에 품지 마시고 원수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사랑의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진정한 승자가 되고, 용서할 때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우리의 원수가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의 친구가 된다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것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먼저,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이 치료 받습니다. 마음에 평강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성도님들을 비방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 죄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그러이 용서해 줄 때 상대방의 완악한 마음이 감동을 받고 자기의 행동을 부끄러이 여기고 과연 그리스도인이 다르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줄 때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 마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차 있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고 하셨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가족간에 서로를 용서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가족은 매일 같이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서로에 대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잘못하기 쉽습니다. 또는 그러고도 ‘같은 식군데 뭘’ 하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가족에게도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켜서 말과 행동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으면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가정은 화목하고 즐거운 사랑의 보금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원수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용서 받기보다는 용서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우리는 줌으로 용서받고
용서함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시는 표현만 그럴듯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진실되기에 아름답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용서하는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나타내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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