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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의 아름다움 / 아 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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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아름다움
(아7:10-13)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17, 18세기에 성행했던 종교음악 형태가운데 ‘오라트리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라트리오는 오페라와 함께 성악곡의 최대형식으로 기독교가 왕성하던 그때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오라트리오 가운데 헨델의 ‘메시야’, 하이든의 ‘천지창조’, 그리고 멘델스존의 ‘엘리야’가 있습니다. 이 세 작품을 “세계 3대 오라트리오”라고 부릅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익숙한 작품이 헨델의 메시야입니다만, 하이든의 천지창조도 음악성이나 규모에 있어서 메시야 못지 않게 주목을 받는 작품입니다. 하이든은 세 사람중에 가장 믿음이 독실한 사람입니다. 그가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도 신앙에서 비롯되었고, 3년동안 기도하면서 곡을 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음악으로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입니다. 천지창조의 하이라이트는 ‘인간창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의 아름다운 광경을 하이든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멋지게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지창조의 곡을 대할 때마다 아담과 하와가 부른 이중창을 떠올립니다. 정말 화려하고, 감미롭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남편과 아내를, 부부를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우리는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출발이요, 중심이라고 할수 있는 ‘부부주일’은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셋째주일을 부부주일로 지키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부’에 관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노래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가장 적절합니다. 부부는 부모나 형제와 같이 피를 나눈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촌수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와 가장 가깝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압니다. 부부는 나의 깊은 속을 보여 주어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아름답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통해 부부를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를 신비로운 것으로 말합니다. 현대 사회가 신비와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부부는 자연보다, 우주보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것을 본문을 통해 2가지로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아름다움은 ‘사랑’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구약성경가운데 아가서의 일부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성경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여인과의 사랑이 주제입니다. 솔로몬은 많은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들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그들에게서는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솔로몬이 어느날 자기의 별장이 있는 ‘수넴’의 포도원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웠고, 급기야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여인을 궁궐로 데리고 왔습니다. 두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두사람은 행복하게 삽니다. 바로 그 결혼과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가서의 주요내용입니다.

  아가서는 이런 과정을 시적으로 보여줍니다. 본문도 바로 그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단어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엑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랑(사모)하는 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이 두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 ‘사랑’이었습니다. 지위적으로, 신분적으로, 상황적으로 생각하면 두사람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이 부부의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사랑때문입니다. 사랑이 신분을 넘었고, 담도 넘었고, 환경도 초월했고, 난관과 문제를 극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의 아름다움은 사랑에 있습니다. 부부에게 있어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부를 하나로 묶고, 알게 하고, 평생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사랑이 없으면 정말 추악해 지고, 더럽게 됩니다. 사랑이 빠지면 남보다 더 남이 됩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단순한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원수가 됩니다. 부부를 가장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 ‘미움’인 것처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언제나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이 깊어지고, 사랑을 키우고, 만들어 가야 합니다. 부부사랑의 멋진 모습과 행동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부부관계가 지속되고,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랑을 일반적으로, 세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랑은 성경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사랑을 먼저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정의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일명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바울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방언이나, 언어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마음이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 부부의 입에서는 단 한순간도 사랑의 언어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늘 그들의 입에, ‘하니, 아이 러브 유’를 달고 삽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문제가 많습니다.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사랑의 언어가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사랑을 말로 덮으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눈빛으로,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언어나, 듣기 좋은 말도 울리는 괭과리요 소리나는 구리와 같습니다.

  2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기에서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랑은 지식이나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경험이고, 실제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론으로 할수 없습니다. 사랑은 논리나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자기편, 자기쪽,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사랑이요, 진정한 사랑입니다.

  3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랑은 구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의 구제는 모든 사람이 알게 떠벌리며 하는 바리새인의 외식과 형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랑은 껍데기, 겉치레, 형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내용이요, 알멩이입니다. 물론 형식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형식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체면으로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부부의 아름다움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빠지면 부부는 가장 더럽고 추악하게 변합니다. 부부의 사랑이 식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보다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형식보다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사랑으로 부부의 아름다움을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름다움은 ‘함께’하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보면 이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이 고백은 술람미여인이 궁중에서의 사랑을 일터로 옮기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부에 있어서 행동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사랑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나’ 라는 일인칭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나를, 내가’ 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동에 있어서는 더 이상 나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나’와 함께 ‘우리’라는 복수가 강조됩니다.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라고 말합니다. 부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짝지워 주시고, 결혼을 주례하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권면했던 것이 바로 ‘함께’ 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함께 있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쉬고, 함께 잤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지 않았을 때, 문제는 바로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타락을 보여주는 창세기 3장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아담과 하와는 떨어져 있었던 것을 지적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언제나 함께해야 하는데 어떤 이유든지 둘이 떨어졌을 때 사탄은 그 틈새를 따라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부의 원리는 너무도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부부는 언제나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정상 잠시 떨어지더라도 다시 합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가장 모델적인 부부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정말 아름답고 모범적인 부부입니다. 부부로서 아름답게 보여지는 이유는 언제나 함께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곳에 남편도 함께 갔습니다. 남편이 일하는 현장에 아내도 있었습니다.

  부부는 처음부터 함께하기로 약속하면서 시작됩니다.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부부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가를 뼈저리게 명심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있어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걸어야 보기도 좋은 것입니다. 예배 드릴때도 함께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강조해도 잘 실천이 되지 않습니다. 훈련이 안되고, 서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가능하면 같이 앉으면 보기도 좋고, 마음도 더 가까워지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부부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보니 오늘 이 자리에는 남편이 없으신 분, 아내가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부부의 원리는 신앙의 원리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주님과 동행할때 우리는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의식하지 않고, 주님의 손을 놓고, 주님과 나 사이의 틈새가 벌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잘못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부의 원리를 ‘동행’으로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신앙의 뼈져린 실패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예수님과 가까이 밀착되어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멀어졌습니다.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사이가 벌어질 때, 그는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부인하고 저주한 것입니다.
부부의 길은 언제나 함께 가는 것이요, 신앙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삶의 중요한 원리임을 믿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가정의 달, 특히 오늘은 부부를 생각하는 뜻깊은 주일에 부부의 아름다움을 기억하십시오. 부부의 아름다움은 사랑때문이고,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이 이런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사람들이 기뻐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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