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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성숙 / 딤전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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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성숙
본문 디모데전서 4:11∼16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가르칩니다. 그것이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실제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될 것을 부탁합니다.
또 교인들을 말씀으로 권면하고 가르칠 것을 당부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숙"(프로코페)이라는 말은 "진보"(「개역성경」), "발전"(「표준새번역개정판」,「공동번역성서 개정판」)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장진(長進)"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장과 진보가 합해진 말인 것 같은데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퍽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성숙은 영적인 성숙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지도력의 성숙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연소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강한 지도력을 가진 일꾼이 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12절).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 맡은 이들, 교사, 속장, 선교회장 등의 직무를 맡은 분들은 지도력의 성숙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직분의 중요함에 대해서도 성숙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장로의 모임에서 안수를 받았는데 바울은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14절).
'디모데야, 부단히 노력해서 이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26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인 분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며 오늘은 믿음의 성숙에 대해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누구나 힘써야 합니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어린이, 청소년, 청년, 청장년, 장년, 노년 가리지 않고 힘써야합니다.

어린 세대와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자기들의 때가 믿음의 성숙을 위해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몸과 지식과 인격이 자라야 할 때, 그러니까 어릴 때, 청소년 때, 청년 때에 그것들이 자라지 못하면 평생 왜소한 모습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 때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나중에 신앙생활에서 어딘가 빈 구석이 있고 허약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 모습을 하게 됩니다.
성인들은 어린 세대와 청소년, 청년들의 믿음이 성숙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교사로서, 선배 세대로서 큰 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인들은 동시에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는 일에 힘써야합니다.

이 자리에는 성인들이 많은데 '성숙'이라는 말을 들으면 성인들은 '성숙은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는 현상유지하기도 어려운 세대야! 후퇴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세대를 막론하고 믿음의 성숙을 위해 힘써야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힘써야합니다.
믿음의 성숙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내 믿음은 이만하면 되었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믿음의 성숙을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아주 무서운 교만입니다.
그렇게 자만하는 것은 추악한 일이며 그렇게 자만하는 순간에 그의 믿음은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영적 부족을 깨닫고 더 성숙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믿음은 독수리같이 올라갈 수 있고 늘 강건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일수록 영어사전을 자주 봅니다.
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자주 찾고 많이 읽습니다.
믿음은 더욱 그렇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믿음의 성숙을 위해 더욱 힘을 씁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요.

성경은 욥기 17장 9절에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처지, 나이, 환경, 학식, 직분, 믿음의 연륜을 상관하지 않고 믿음의 길, 믿음 성장의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그 의로움이 유지되며 풍성해집니다.

성경은 시편 84편 7절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믿음의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19절까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까지 믿음이 성숙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믿음의 성숙에는 쉬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좀 쉬어야하겠다' 하다가 아주 주저앉아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믿음의 성숙을 위해 힘써야합니다.

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말의 원문은 현재시제, 능동태, 명령형입니다.
'너는 지금, 스스로, 꼭, 믿음의 성숙함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 목회하고 있는 이병희라는 목사님이 「회개하라」는 책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저희 교회에도 한두 번 다녀갔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회개하라! 이병희 지음" 이렇게 쓰여 있는데 친구 목사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었더니 친구 목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표지의 글자 하나를 고쳤습니다. "회개하라! 이병희 지음"에서 '음'자를 '금'자로 고쳤습니다. "회개하라! 이병희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한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리 말씀드린 대로 그저 재미있는 일인데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개야 성장하라, 지금!'이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볍게 들을 말이 아닙니다. 아주 엄숙한 명령입니다.

바둑 잘 두기로 유명한 이창호 9단은 제자들 가운데 늘 어린아이를 한 두 명씩 둔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실력이 쑥쑥 늘어나지요. 그것을 보고 자신이 도전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믿음이 잘 성숙하는 사람들을 보며 도전을 받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의 재산이 늘어나는 것, 출세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집니다. 그런 것들보다 믿음이 성숙하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이 경우는 질투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질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다른 분야들보다 우리의 믿음이 잘 성숙하도록 힘써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숙"과 비슷한 말이 디모데후서 2장 16절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6절에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점점 나아간다"가 비슷한 말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경건하지 못한 일들을 부지런히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바울 당시에는 스토익 학파가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8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아덴에서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스토아 철학에서도 성숙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거짓 교사들, 세상의 철학자들도 성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숙하기 위해 힘쓰는데 성도들은 제자리걸음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도의 방법과 사회 봉사 활동에 관한 이야기인데 전도의 다양한 방법이라든가 사회를 위한 봉사는 기독교가 오랫동안 제일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군목제도, 경찰전도, 연예인과 체육인 등 특수 계층을 위한 전도, 방송전도, 모두 기독교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종교들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분야에 따라서는 다른 종교가 더 활발한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회봉사 활동 같은 것은 천주교가 더 활발하다고들 많이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에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들이 성숙을 위해서 힘쓰지 않을 때 우리가 이 말씀 그대로 되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말씀에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골고루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여 함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교하고 있는데 아기들은 젖 하나면 그만입니다.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잘 자랍니다. 다른 것을 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말씀 하나면 그만입니다.

에스겔서 3장에는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두루마리가 달기가 꿀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꿀과 우유는 소화와 흡수가 아주 잘 되기 때문에 완전 식품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은 믿음의 성숙을 위한 완전식품입니다.

영적 운동을 해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절 24절에서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하면서 이 달음질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달음질은 영적인 달음질을 말합니다.
운동부족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믿음에서도 운동이 부족하면 여러 가지 병에 걸립니다.
어떤 것들이 영적 운동일까요?
전도, 대표적인 영적 운동입니다.
봉사, 아주 좋은 영적인 운동입니다.
헬스클럽 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교회는 영적 운동의 헬스클럽입니다.

믿음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은 믿음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로 모든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있으면 믿음이 성숙하지 않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토양이 좋아야 채소와 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믿음이 잘 성숙하게 하는 토양입니다.
요즘 흙이 산성화되어서 단풍도 제대로 들지 않는다, 낙엽도 썩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야단이다라고 하는데 마음의 밭에 감사가 없는 것은 흙이 산성화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다음 주일이 맥추감사주일인데 여러분, 이 한 주간, 마음의 밭에 감사의 비료를 주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쑥쑥 자라고 성숙할 것을 제가 보증합니다.

오늘은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밤에 영국 올더스게잇 거리의 작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올해가 웨슬리 목사님 회심 265주년이 되는데 올해는 특별히 웨슬리 목사님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다채로운 기념행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따라 다니는데 이 이름들은 웨슬리 목사님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우선 '규칙주의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주 엄격하게 규칙적으로 경건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주의자를 영어로 메도디스트(Methodist)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감리교회의 영어이름입니다.

'한 책의 사람'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을 많이 보고 성경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이라는 이름도 들었습니다.
'노력과 활동의 사람'이라는 이름도 들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생애를 자세하게 살피면 '믿음의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라는 이름도 붙여도 좋은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과 관련된 웨슬리 목사님의 이력서는 매우 찬란합니다.
주보 7쪽에 웨슬리 목사님의 연표를 실었는데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 자신도 목사였습니다. 옥스퍼드 출신이고 그 대학의 조교수였습니다, 홀리 클럽운동의 지도자였는데 홀리 클럽은경건하게 살고 구제에 힘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홀리 클럽을 '신성구락부'(神聖俱樂部)라고 불렀습니다. 클럽을 '구락부'라고 했지요. 요즘은 이런 말을 쓰면 잘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사 경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체험이 없었습니다. 뜨거운 체험이 없으니까 이것들이 익지 않고 날 것 그대로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성숙한 믿음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성숙"이라는 말에서 '숙'(熟)은 '익을 숙'자입니다. 숙자 밑에 점이 네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불 화(火)입니다.
음식은 뜨거운 불에 익어가면서 재료들이 뒤섞여야 맛이 나는 법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이것을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성숙한 신앙을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웨슬리 목사님은 일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아메리카에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를 이 불신앙의 죄악된 마음에서 전질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이다. 위험이 없을 때는 설교도 잘 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죽음이 그 무서운 입을 벌리고 나를 엄습할 때는 나는 불안과 공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 된다는 담대한 고백을 감히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조지아의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위해 떠난 지가 2년 4개월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동안에 무엇을 하였나?

영국에 돌아와서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지난 날의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나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 양심은 부패하였으며 가증스럽게 되었다. 나의 행동과 수고와 의로써는 도저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할 수 없다. 내 마음 속에는 죽음의 선고가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믿음, 즉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산다'는 믿음과 성령이 나의 신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믿음을 가지고자 한다
회심하기 80일 전쯤인 1738년 3월 5일의 일기에는 '구원의 유일한 길인 그 신앙이 내게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만일 웨슬리 목사님이 자기의 약점을 감추고 '내가 이만큼 배우고 이만큼 경건을 위해 애쓰고 이만큼 전도했으면 되었지!'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이것이 내 체질이야!' 또는 '이것이 내 신앙의 형태야!' 이렇게 합리화시키고 거기에 안주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감리교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감리교는 이지적인 것이 특징이야!' '감리교인들은 냉철한 것을 자랑으로 여겨!' 이러면서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감리교를 망치고 있습니다.
체질도 있고 형태도 있고 특징,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뜨거움 위에 있어야합니다.

만일 웨슬리 목사님이 그랬다면 감리교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 이전에 계몽주의 운동, 이신론(理神論), 이렇게 모든 것을 이성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흐름이 강해서 교회를 크게 위협했는데 웨슬리 목사님은 이런 운동의 마지막 주자쯤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례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한 후에도 신앙의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성화'를 강조했습니다. 성도로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힘쓰는 것이 성화인데 이 성화는 바로 성숙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한 이후 50년 넘게 감리교 운동을 했는데 끝의 10년이 앞의 40년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앙의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편 92편 12절에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번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시편에서는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라고 하였는데 보기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뜰 안에 있는 나무들이 지금, 5월에 쑥쑥 자라는 것처럼 자라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합니다.
은혜의 체험 속에서 믿음이 팍팍 자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직무를 맡은 이들은 믿음의 성숙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합니다.
교사의 믿음이 성숙해야 학생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교사의 믿음이 성숙한 분량만큼 학생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속장의 믿음이 성숙해야 속도원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속장의 믿음이 성숙한 분량만큼 속도원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선교회 지회장님의 믿음이 성숙해야 선교회원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지회장님의 믿음이 성숙한 분량만큼 선교회원들의 믿음이 성숙합니다.

목사로서 참으로 무거운 책임을 갖고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의 믿음이 성숙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의 믿음이 성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소서'

성숙하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것은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살아있는데도 성숙하지 못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은 살았다고 하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성숙을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들을 성숙시키는 일보다 믿음의 성숙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섭취하는 일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운동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성숙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으로 생명의 증거를 보이고 웨슬리 목사님의 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들이 되고 감리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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