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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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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6.1 주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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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7:7-12)
기도는 성도들의 삶 자체이기에 기도의 달인 6월이 중요합니다.
국가기념주일과 순교자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많은 6월이기에
교회는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취지에서
또 여름행사를 준비하는 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제정된 것 같습니다.
절기로도 초대교회가 전혀 기도함으로 성령강림의 역사를 체험한 시기입니다. 

1.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성령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롬8:26,27).

2. 기도는 찾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기도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창4:26).
  그 분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3. 기도는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말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마6:7, 7:21).
  두드리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말씀(요15:7, 요일3:22)과 믿음의 결단이 없는 기도는 주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구경하는 예배에서, 넋두리하는 기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하는 삶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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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첫 주일입니다.
대개의 교회들이 6월을 기도의 달로 지킵니다.
6월을 기도의 달이라고 한 것은 국가기념주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충일, 순교자 기념주일, 6.25 등과 같은 각종 행사가 모두 유월에 있어서
교회가 특별히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취지에서
대부분의 교회가 <유월을 기도의 달>로 정한 것 같습니다.
또 7월이 되면 교회마다 여름행사가 줄줄이 이어지는 데
이를 준비하는 교사들을 위해서도 성도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고,
특별히 올해는 성령강림주일이 유월 둘째 주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됨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한 체험을 하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들은 기도와 떨어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기도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신자들의 생명은 기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은 기도를 <신자들의 호흡>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특히 “향연(香燃, 향의 연기가)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는 계시록 8:4 말씀과
“이 향은 대대로 여호와 앞에서 끊지 못할찌며”라는 출애굽기 30:8 말씀을 통하여
향의 연기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곧 기도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또한 교회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로,
또는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구조를 위한 <무선 통신>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소원을 아뢰되,
마음에 있는 소원을 진지하게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 ‘무선 통신’이라는 말은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을 사방으로 포위된 군대로 묘사하면서,
아군에게 무전기를 통하여 구원해 줄 것을 호소함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기도는 성도들의 삶 자체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타종교에서 말하는 염불이나 주문과는 다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원이 아닌 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외식적인 기도를 싫어하십니다(6:5).
예수님도 증언부언하는 기도를 경계하셨습니다(6:7).
오히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외면적인 것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소원을 아뢰되,
반드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항상 기뻐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과 함께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후에
계속하여 구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으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은
기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을 읽어드립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렇습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엄밀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기도 가운데는 구하고도 벌 받을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구하다보면 /  비록 나는 바로 구한다고 구했지만
꼭 벌 받기에 알맞은 내용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을 읽어드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여러분의 연약함을 도우시되, 여러분의 잘 못된 기도를 고쳐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비록 잘못된 기도가 있다할지라도 성령님께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를 쉬지 마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구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기억하실 것은 기도는 드리는 순간 열납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므로 아실 것은 무응답도 응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살짜리 어린이가 기특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께 드리기 위하여 사과를 깎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엄마에게 과도를 내어 놓으라고 떼를 씁니다.
마음이야 압니다.
아버지께 사과를 깎아드리겠다는 착한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세살짜리 아이에게 칼을 줄 엄마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무응답도 응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응답을 보류하시는 것도 사실은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은 기도는 찾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만난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찾고 만난 하나님과의 대화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 말씀을 읽어드립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기도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가끔 교회로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구제금을 받으러 왔다면서
  큰 소리 땅땅 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번 두 번 말이지 멀쩡한 사람이 찾아와서 큰소리치니까 상대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하고 구하더라고요.
  못들은 척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목사님! 좀 도와주세요!”
  목사님! 목사님 하고 불러제끼니까 이웃 사람드링 다 듣는 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심지어 대문을 발로 차면서 두드리면서 고함을 지릅니다.
  목사님! 좀 도와주ㅡ세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니까 어떻게 시치미를 뗄 방법이 없더라고요.
     
  창세기 4잘 26절에 보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최초의 성경 기록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기도는 그분의 이름을 찾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찾는 자가 찾을 것이라는 말씀은
  입술로 기도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하였으면 반드시 주실 것으로 믿고 찾아야 합니다.
  이 시간은 어린 자녀들을 위한 이야기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발명의 왕 에디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에디슨은 본래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전기를 쓰는 사람들이 미화시켜서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만
여러분!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달걀을 어미 닭이 21일간 품으면 병아리가 된다고 가르쳐 주시고
네가 달걀을 품어 보겠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저는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님 제가 닭이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지 않느냐고 찰흙 덩어리를 보여주었더니
유치부 아이들은 목사님 그게 더 커진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에디슨의 고백을 그대로 믿습니다.
에디슨은 자신의 어린 시절은 바보였다고 고백합니다.
보세요. 여러분! 바보라고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에디슨은 학교 입학 후 석 달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에디슨은 고백합니다.
퇴학당한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에디슨의 어머니가 기도한 이후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들어 쓰시면 지혜로운 자가 부끄럽게 되고,
  약한 자를 들어 쓰시면 강한 자가 부끄럽게 된다고 하셨으니
  내 아들 에디슨을 하나님께 부탁한다.”고 기도한 이후
에디슨은 30만 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30만 번 기도했더니 자신이 발명의 왕이 되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30만 번이나 기도했다는 말은 하루에 열 번 이상 기도했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이것은 기도의 횟수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고 늘 기도하였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창조 하실 때에 숨겨놓은 우주 만물 중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을 때 그는 1천 2백여 가지의 발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쉼 없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에디슨처럼 찾으시기 바랍니다.
에디슨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고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것을 찾아내었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응답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기도는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말로만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마6:7, 7:21).
  두드리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아이를 낫게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조용히 찾아와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은 왜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까?
마태복음에는 믿음이 없는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가 왜 다릅니까?
틀린 것입니까?
똑 같은 질문인 데....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말씀(요15:7, 요일3:22)과 믿음의 결단이 없는 기도는 주문에 불과합니다.
믿고 두드리십시오.

말로 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이삭처럼 직접 믿고 땅을 파야 우물이 됩니다.
기도가 두드리는 것이라는 말은
말로 ㅎ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샘이 필요하다는 기도를 드렸으면 직접 땅을 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성도들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분별해야 하는 것처럼,.
보는 예배가 아니라
구경하는 예배가 아니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기도도 넋두리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서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하는 삶이 참된 기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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