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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마음 /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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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1-11
설교 김용수 목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오늘도 이처럼 온 교우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크신 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이와 같은 형식의 예배와는 달리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곡식이나 비둘기, 양이나  소 등 제물을 가지고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으며, 고의 혹은 우발적인 실수로 말미암아 야기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또한 속죄제, 속건제 등을 통해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 1;10에 보면 이런 하나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성전 문을 닫으라고까지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는 좀 지나쳐 보이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말 2:2에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무엇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명령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 귓등으로 듣고 흘려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명령, 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입니까?  1;13에 보니까, 그들은 정상적인 제물을 바친 게 아니라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은 곧 우리 마음을 가리킵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형식을 갖추고, 화려한 예배당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온갖 좋은 것을 총동원해서 예배를 드린다해도 그 예배를 드리는 사람 각자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면 그 예배는 산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내면적으로도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고 고지식하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내면 세계를 희생해서라도 드러나는 활동에만 관심을 기울이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내면 세계야말로 선택과 가치가 결정되는 중심부이고, 삶을 다듬어갈 고독과 성찰을 추구하는 곳이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세파도 능히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곳 또한 우리의 내면 세계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말할 만큼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의 성격을 규정짓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야흐로 출애굽한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진입을 앞 둔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마치 다짐을 받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 6;6 )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빌립보서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등 말할 수 없는 고난 끝에 세워졌으며, 그가 다시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한 번 더 방문할 만큼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랑에 빌립보 교인들 역시 사랑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돈을 보내 어려움을 해소해 주었고, 이번에는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울의 신변을 염려한 나머지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로마로 보내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그의 편지 서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빌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처럼 빌립보 교회를 남달리 아끼고 사랑하는 바울이 그들에게 애정 어린 권면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말한다면 ' 마음을 같이 하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바울이 그들에게 왜 이와 같은 권면을 했던 것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들 가운데 다툼이 있었으며 (2;3), 서로 간에 원망을 하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2;14) 이러한 사실은 4:2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아마도 빌립보 교회 여전도회 회장쯤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 반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음직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 합니다.  '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그럼, 바울이 그들 모두가 품기를 바라는 마음, 그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입니까?  그것은 2;3에 나와 있듯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바울은 2;6-8절 사이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이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졌는지를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말씀은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며, 성부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창조에 관여하셨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과 영광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의 뜻을 보면 '헛것이 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made himself nothing'  nothing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주에 떠도는 먼지에나 비견될만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영원의 존재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유한한 피조물이 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으신 분이 죄가 없으신 분이 스스로 인간의 욕심, 온갖 모함과 거짓 술수의 희생양이 되셔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차라리 목이 잘려 죽는 것이라면 죽겠습니다. 불에 태워 죽인다면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그러나 발가벗기운 채 십자가에 매달려 온 몸의 수액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온갖 수치와 조롱 가운데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스스로 지켜 봐야하는 십자가형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당신의 뜻이 내가 죽어 저 죄인들을 살려내는 것일 찐대 기꺼이 십자가에 오르겠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영생으로 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면 제가 그 십자가에 달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작년 초, 제직 수련회 강사로 오셨던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7가지 길을 걸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생칠도라는 제목으로 말씀하신 가운데 조금은 비관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비칠 수 있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버림'과 '떠남'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깊이 있게 하려면 나눔이 있어야 하는데 나눔이 진정한 나눔이 되려면 '버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할 때 그 인생은 추해지기 시작합니다. 진정으로 버린 자만이 진정으로 자유와 여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려 당신 자신 뿐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자유를 선물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생은 떠나는 연습을 계속하다 결국은 세상을 떠나는 존재입니다.

떠남은 부정과 동시에 긍정입니다. 좁은 세계를 떠나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떠나라 하십니다. 요셉을 떠나게 하십니다.

요 16:7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살려내기 위해 당신 스스로를 버리셨고, 우리 모두가 장차 있을 곳을 예비하시기 위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만을 기뻐하셨기에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자기의 의사와 능력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안타깝게도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만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교만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지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교만한 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기도합니다.

눅 18:14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기도한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교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단절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마저 뒤틀리게 만듭니다.  교만은 자신의 장점은 크게 부각시키고, 자신의 약점과 실수는 간과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장점보다는 그의 문제점, 결점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교만이 빌립보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 대립과 반목을 심어 놓았고, 급기야 바울이 편지를 써서 한 마음을 품으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면 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변화와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 변화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자세,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자매에 대한 새로운 태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을 가질 때 자기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민감하게 느끼게 되고, 기꺼이 남을 도와주게 됩니다.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이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인줄 알기에 기꺼이 좁은 문으로 나아갑니다. 좁고 협착한 길로 나아갑니다.

누가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남을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 누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남을 섬길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가.

그 마음에 예수를 모신 사람,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을 대신해서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두 사람을 보내는데 그 가운데 빌 2;25에 보시면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 증거를 위해 교회의 파송을 받아 해외로 진출한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인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고작 감옥에 있는 죄수 바울의 시중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그야말로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이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기꺼이 그 일을 수락하고 로마의 감옥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곳에 갇혀있는 바울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복음 전파를 위한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완수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27에서 바울이 밝혔듯이 죽을 병에 걸릴 만큼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맡은 일에 헌신했습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라.

그처럼 자신의 생명까지 드려 바울을 섬김으로써 바울을 통해 복음이 온 세계에 힘있게 전해지기를 소원했던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다'

에바브로디도, 그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복음을 들고 외치는 선교사의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음에도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바울의 시중을 드는 문자 그대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죽기까기 복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자랑스런 제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21세기를 이끌어 갈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Robert K. Greenleaf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책 Servant Leadership (우리나라 말로는 리더는 머슴이다) 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그 책을 쓰도록 영감을 준 한 책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책은 헤르만 헤세의 '동방 순례'라는 책입니다.

동방순례라는 책의 주인공 레오는 여행단의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servant즉 도우미로서 여행단의 일원이 되지만, 그는 단지 자질구레한 일을 돕는 역할 뿐 아니라 여행단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는 노래를 불러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 등 여행을 순조롭게 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합니다.

그러다가 레오가 사라지면서 여행단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결국 여행 자체를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도우미 레오가 없이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행단의 일원이자 이 소설의 화자는 몇 년을 방황한 끝에 마침내 레오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도우미로만 알고 있던 레오가 실제로는 자신들의 여행을 후원한 교단의 우두머리이자 정신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Greenleaf는 자신의 책에서 '누가 적인가' 질문한 뒤에 이렇게 답합니다.

진정한 적은 오히려 착하고 영리하며 활기찬 사람일 수 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을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 역할과 지도자로서의 섬기는 역할을 포기할 때, 사회를 병들게 하는 적이 되는 것이다.

곧 비평가와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 역사의 바퀴를 돌린다는 지식인들, 연구에만 몰두하겠다는 학자들, 이런 사람들은 넘치지만, 이 불완전한 세상을 좀 더 낫게 하겠다는 위험을 기꺼이 떠맡을 사람은 그리 쉽게 나서지 않는다.

문제를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요즘처럼 리더십에 관한 책이 많이 나온 때도 드문 것 같습니다.

책방에 가보면 온갖 리더십에 대한 책이 즐비합니다. 저마다 이러한 리더십이라야 조직이 제대로 돌아간다. 기업과 나라가 산다고 외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신 그분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섬기는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Greenleaf가 이점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노라.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다.

요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우리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매우 인상 깊은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일생을 작은 행동 하나로 압축시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드시던 때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시던 주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을 가지고 닦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어쩔줄 몰라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담아 냅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이런 일은 저희들이 해야 하는 일인데, 저희가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주님께서 오히려 저희들의 발을 씻으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늘 마음에 새기며 살았고 교회 구성원들에게도 잊지 않고 권면했습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러분, 신앙이란 게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전혀 무가치한 것임을 고백하고, 자기를 완전히 굴복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자기에게 이익이 얼마나 돌아올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으며, 남의 얘기는 듣는둥 마는둥 자기의 생각만을 주장하고, 무슨 일이든 자기가 주목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믿고,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 다시 말해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신앙에서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주님이 되셔서 죄인인 인간들을 섬기신 그 예수를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 낮다고 앉지 못할 자리가 없을 것이며, 너무 하찮고 시시해서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고, 너무 별 볼일 없어 사귀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시기와 질투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칭찬과 존경을 받는 모습을 보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시를 당하고 천대를 당할 때에는 참고 인내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찬송가 507장의 가사처럼 주님의 마음을 본 받는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오는 것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기 때문이요,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우리 마음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나를 딛고 하늘로 뛰어 올라라. 나를 밟고 생명의 땅으로 나아가라.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이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어 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잘 난 사람, 힘 있는 사람, 큰 소리 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이 사회의 문제와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기꺼이 그 문제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팔을 걷어부치고, 무릎을 굻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 섬김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이 가장 낮은 곳을 찾아 골짜기로 골짜기로 흘러내리듯,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를 낮은데 처하기를 기뻐하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당신의 자녀를 찾아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비워 인간으로 임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피조물로 그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께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를 찾으실 때, 당신의 영광과 그 능력을 마음껏 부어주시고 그를 지극히 높여 주실 것입니다.

6월은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까지 충성하신 분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조국애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달입니다.

충성이란 말의 '충'자처럼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우리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 이 사회와 조국을 돌아보는 그래서 진정으로 조국이 필요로 하는 일군, 진정으로 민족을 섬기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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