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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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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본문 : 로마서 8:31~39 (창세기 28:10~19 참조) 

 
  지금부터 50년 전,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하늘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인간과의 대면을 허락했습니다. 살을 에는 한기와 포효하는 돌풍을 참고 견디며 엉덩이까지 빠지는 눈길을 쉬지 않고 헤쳐 오르기를 5시간,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는 에베레스트 산정에 우뚝 섰습니다. 산소호흡기를 걸치고 강풍에 부서지는 깃발을 든 채 인간의 극한 의지를 웅변하는 그의 장한 모습은 히말라야 최초 정복자로 알려진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숨가쁘게 필름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힐러리 경은 뒤로 처진 자신을 정상에서 30분이나 기다려 준 텐징의 사진을 찍고 자기 자신의 사진은 찍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초등자라는 영광을 기꺼이 텐징에게 양보한 힐러리 경도 참 멋진 산사나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를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는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로 하여금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의 부활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부활 승리에 앞서서 무엇이 있었던가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이 있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영광에 앞서서 고난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 죽음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승리와 영광만 구할 것 같으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실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고난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때문에 그 고난을 맞을 준비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이 힘들면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더욱 힘들지 않겠습니까?

  자, 이제 그 고난의 현장으로 가보도록 합시다. 먼저 실상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상을 알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비로소 견딜 수 있고 또 이길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 현장에 뭐가 있습니까? 우리를 고발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심한 고발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참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정죄하여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그가 우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그가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어서 결국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자포자기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포기할 것 같으면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자기 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요구되는 것도 자기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항상 자긍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옛날 야곱의 경우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가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돌을 베고 자던 그가 일어나 감격스럽게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그는 그 때 거기서 자신이 결코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기 전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야!"라는 사탄의 말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우리 주님의 피로 값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명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아주 비싼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적은 항상 비싼 것을 노립니다. 귀한 것일수록 더욱 탐을 내게 마련입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생명을 삼키기 위해서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사자 같이 다닌다고 했지만 때로는 웃고 있는 양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올 때도 있습니다. 때문에 사탄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잘 대비하지 않으면 귀한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원래 고발이란 잘못된 것을 드러내는 것이 고발입니다. 그러나 하와에게 접근한 사탄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정신을 차리고 잘 봐라! 너희를 속이려고 그렇게 말씀하셨지..." 먼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매우 영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달콤한 말에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비리에 대한 얘기는 거의 무조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슬그머니 우리로 하여금 고발자가 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누군가를 고발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고발했습니다. 심지어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을 은근히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뱀을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누구의 잘못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던 고발자 아담과 하와의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더러운 사탄의 음모를 다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피로 씻어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형제, 자매들도 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고발은 거짓입니다. 사탄의 정죄는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발을 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고발하는 일에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고난의 현장으로 가봅시다. 또 뭐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려는 것들이 있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들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늘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믿음 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승리를 약속할 뿐입니다. 승리란 정복되거나 지배되지 않고 마침내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문화는 성공지향적입니다. 성공에 관한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쓰레기통으로 버려집니다. 물론 성공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이제 각자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직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산다!"라면 이제라도 십자가를 만나야 합니다.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님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살 때에는 고난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면서 인내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다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이제는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 하면 십자가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난의 정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력도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말 싫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주님은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모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성경도 고난에 대해서 별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을 살짝 덮어놓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없애신 것이 아니고 모든 고난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사랑이 우리를 변하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그대로 두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승리는 결국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 것입니다. 아울러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힐러리 경이나 셰르파 텐징이 쉽게 등정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서 사투를 벌인 끝에 최초 등정에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활 승리에 참여하고 싶습니까? 그 영광에 동참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고난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과 죽음까지도 참고 견딜 수 있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바랍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그 때 비로소 여러분 모두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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