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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로 나를 사랑하실까 (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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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나를 사랑하실까 (로마서5:8) 

오늘은 가장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느냐는 문제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분명히 알게되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저같은 자를 사랑하시는구나. 참으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구나 이 놀라운 사실을 저는 좀 일찍 알았습니다. 1963년 3월 2일이었습니다. 그날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안에 살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저는 두가지 사랑 때문에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니 참 행복하고, 또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람 이 부족한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불평하지 않고 얼굴 찡그리지 않고 지금까지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주고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들 마음속에 의문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내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 당연히 사랑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어여쁜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이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내가 나를 봐도 심난한데 정말 이런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실까? 하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어져요. 그래서 의문이 생기고 정말 날 사랑하실까?

두 번째는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데, 그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또 그 어려운 일들, 고난이 빨리 해결되면 넘어가는데 그 어려움이 해결되지 아니하고 계속될 때 누가되었든지 마음이 흔들립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실까? 이 두가지 의혹, 이 두가지 질문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의혹이 깨끗이 풀어져야 합니다. 이제 오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 두가지 아주 괴로운 의혹이 풀어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나를 사랑하실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런 내가 아닙니다. 거울앞에 서서 나를 아무리 봐도 어디하나 하나님께서 사랑할만한 그런 구석이 보이질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도 심난하게 보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 자신이 미울때가 많습니다. 내가 내 자신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탄식하지 않습니까? 이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니. 말이 아닙니다. 또 세상에서는, 또 이 땅에 있는 여러 가지 종교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나름대로 어떤 이름을 붙여서 말하지만 의인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가리킵니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8절 말씀, 우리 같이 다시한번 다같이 읽으십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한마디로 뭡니까?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겁니까? 불교에서도 말합니다. 깨끗하게 살아라. 그래야 해탈한다. 그걸 우리식으로 말하면 깨끗하게 살아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나 다 그렇게 말합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선생님들이 말합니다. 학교에서 말 안듣는 애들 매를 때리지. 가정마다 부모들이 말을 안듣는 아이들을 놓고 책망하고 때리는것이지. 죄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그게 어디 믿어집니까? 그런데 이 말을 기록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난 다음에 왜 그가 이토록 가슴이 터지도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걸음마다 눈물을 흘렸는고 하니, 바울이 그런겁니다. 내가 누구냐? 죄인중의 괴수인데. 나는 포행자요, 핍박자요, 훼방자였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래서 감사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저도 바울처럼 참으로 뜨거웁게 감사하고 찬양하게 됐습니다.

어느날 제 영혼속에서 목마른 마음으로 성경말씀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견딜 수 없는 목마름이 내 영혼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또 읽어가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 걸음걸음의 발자취가 내가 말했던 것, 행동했던 것, 구석구석에서 행했던 것들. 그 몸짓하나, 손가락 하나.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인가? 그런 지금까지 나의 살아온 그 과정에 모든 것이 선명히, 자세하게 드러나는데.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 내가 그렇게 살았나? 지금도 이미 지나간 이야기지만 지금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지금도 그 옛날, 저 멀리 그때 내가 살았던 그 모습을 생각만해도 심장이 딱 멈출라고 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그러면서 애통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통곡이 터졌습니다. 울고 또 울고 아무것도 정신이 안나고 왜 내가 그렇게 살았나? 하고 울고 울고 애통해하는 저에게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것이 어떻게 깨달아지는고 하니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2000년전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를 흘리신 그것이 그것이 말입니다. 내 모든 이 추악하고 추악한 이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왜 짊어지셨는고하니 내가 행했던 지었던 그 모든 추악한 죄를 내게서 벗겨주실려고 씻어내 주실려고 그 죄를 없이하실려고. 내가 누더기 거지 옷을 입었는데 말입니다. 이 거지 옷을 벗겨가는 겁니다.

내 모든 죄를 내게서 다 씻으실려고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 그리고 그 죄의 값을, 그 죄에 따르는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연히 내가 받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지시고 그 죄에 따르는 수치와 모멸과 고통과 불행과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다 받으시고 죽으신 것. 그리함으로 인해서 내 죄가 다 사함받고 없어졌다는 사실이 깨달아 졌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누가 하나? 그런 사랑을 누가 하나?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면서 두가지 사건이 저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나의 추악한 모든 죄가 이제는 예수님께로 다 갔으니 예수님이 그걸 다 짊어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내 모든 죄가 없어졌구나. 사함받았구나. 이것. 그것이 사실로, 실제로 그런가보다 아니고 분명한 실제로, 분명한 현실로 아 내 죄가 없어졌구나. 내 죄가 사해졌구나. 내 죄가 떠났구나. 이렇게. 이 실제가 이 현실이 딱 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속에 있는 그 죄로 인한 지독한 슬픔과 두려움이 죄책감이 깨끗이 없어지는 겁니다. 평강. 죄짐을 벗어버린, 죄악벗은 영혼 기뻐 뛰며 주를 섬기리라하는 찬양 그대로, 이 죄짐을 벗어버린 이 영혼의 자유, 평안 이게 왔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분명한대도 없어요. 두려워 할 필요없어요. 걱정할 필요없어요. 염려할 필요없어요.

믿어지십니까?
그러면서 또 하나 사건이 이루어지는데, 내 영혼의 변화. 이제는 나의 변화. 어떤 변화냐? 죄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그런 영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죄는 어떤 죄든지 이제는 그 죄와 싸우는 사람으로 서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죄에서 구원함을 받은 그날로부터 나의 삶속에서 아직은 나의 모습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욕심을 낼때도 있고 때때로 거짓말 할때도 있고, 때때로 누구를 미워할때도 있고, 때때로 교만한 마음을 가질때가 있는데 또 그런 말을 할때가 있는데 바로바로 그때마다 징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또 회개시키시고. 바로 이런 사람. 하나님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해서 속죄의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을 품에 안으시고, 그리고 그 죄를 벗기시고, 이 죄를 벗기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내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속죄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이 뭐냐 이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겠느냐? 내가 하는 일마다 뭐 잘되고, 형통하는 사랑이냐? 아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100가지 널려져 있습니다. 좋은 것들로. 100가지의 하나님의 사랑 중에 가장 너에게 참으로 좋은 것. 한가지만 택하라 그러면 뭘 택하겠느냐. 저는 그럽니다. 속죄의 사랑입니다.

결국 문제는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은 이 죄인을 그렇게 죄에서 구속하시고 그리고 이 몹쓸 죄인을 진정으로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속죄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 아멘하십시오.
아까 찬송가에 그런 겁니다. 죄인 오라 하실때에 날 부르소서. 이 죄인에게 나에게 필요한건 다른 건 필요없어. 속죄의 사랑을 주시옵소서. 저를 죄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저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시옵소서. 그 외 다른건 없어요. 그래서 새사람 되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원하십니까? 진정 원하십니까?

그 다음에 두 번째 의문을 풀어보겠습니다. 왜 내게 고난이 있나? 그리고 하나님이 왜 이 고난을 빨리빨리 없애주지 아니하시나. 왜 이 고난 속에 계속 살게 하시나. 솔직히 이건 고통입니다. 좀 치워주시고 없애주시면 내가 얼마나 좋을까?

형제 자매 여러분 한번 우리 솔직히 말해봅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게 있는 고통이,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몸도 아프고, 돈문제,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데 이런 문제가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하시는 분 아멘하십시오.

예. 그래요. 저도 솔직히 원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 것을 분명히 알아요. 예수님이 날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걸 아는데 어째서 이런저런 이 어렵고 복잡한 것을 하나님 왜 가만두시나?
바로 이 두 번째 의문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데, 이 두 번째 의문도 어디서 풀어지는고 하니 속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사랑이다.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고 죄인을 새사람만들어 두시는 이 사랑 안에, 이 고난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여러 가지 형태의 고난도 이 속죄의 사랑안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뭐냐.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의 시작입니다.

저희 가정에 5개월된 손자가 둘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에 있고, 하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아이는 가끔 인터넷으로 사진을 볼 뿐입니다. 여기에 있는 손자 아이가 가끔, 가끔이 아니고 자주 제 집에 옵니다. 하루만 안봐도 오라고 부릅니다. 볼때마다 귀엽고 참 사랑스럽습니다. 제가 그녀석한테 얼굴을 마주대고 그 녀석도 참 좋아라 합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막 만집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왜 사랑스럽습니까. 엎드려 기기만 하던 녀석이 딱 뒤집습니다. 이제는 기어볼려고 뒷다리를 털벅털벅하는 것. 그리고 하나하나 기어가는 그 모습이. 이제 몇 달 후가 되면 제가 혼자 않을겁니다. 또 몇 달후가 되면 제가 일어설 것입니다. 그 모습이 날로날로 조금씩이나마 성장하는 모습이 기쁨입니다.

만일에 이 사랑스러운 손자가 계속 엎어져가지고 이렇게만 있다면 이제는 기쁨이 아니라 쓰라림으로 올것입니다. 이 아이가 병들었나? 이 아이가 몹쓸 병에 걸렸나? 어떻게 해서 이런 아이가 태어났나? 이제는 그런 아이를 볼때마다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하나님 날 사랑하셔서 이 몹쓸 죄인을 사랑해 주셔서 그래서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깨끗하게. 예수님의 피로. 그리고 새사람, 참 새사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속죄의 사랑안에 사는 우리에게는 두가지 고난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고난이냐 하면 나를 만들어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일체의 고난은 나를 다듬으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런 고난이 아니고 내가 사람이 될 수 없나요.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절대 안됩니다.

하다못해 군대가서 군인다운 병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달동안의 가차없는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엊그제 서울에 사는 제 막내 여동생이 어떤 일이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동생인데, 눈물이 많고 환난을 많이 겪은 막내동생입니다. 세 자녀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데,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지극히 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여쁘게 보시고 되게 해주셨습니다. 얼마전에는 서울에서 빌라 집 한 채도 샀습니다. 세자녀도 잘 됐습니다. 그러던 이 동생에게 막내딸이 시집안간 막내딸이 있는데, 이 아이가 직장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엄마일이 많으니까 엄마일을 꼭 도와줍니다. 피곤한데도. 그날도 엄마일을 거들려 줄려고 기계 가지고 작업하다가 손가락이 기계에 으깨져버린 겁니다. 손가락이 납작하게. 그래서 병원으로 실려가서 봉합수술을 하는 난리가 났는데, 그 소식을 듣고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받는 제 여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 죄송해요. 오빠에게 편안한 소식을 한번도 못 전해 드리고 항상 이런 소식만 전해드려서 죄송해요. 괜찮다. 그러면서 동생이 계속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해주셔서 너무너무 사랑해주셔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렇게 일이 잘 되고 보니까 나도 모르게 겉으로는 얌전한척, 착한척, 하나님 잘 섬기는 척 보였지만 나도 모르게 속에 교만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다보면 속상한 일이 있는데 속상한 일이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거칠어지면서 사나운 말이 입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나를 다듬으실려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딸 이름이 지혜인데, 지혜의 그 다친 손가락이 나 때문에, 이 엄마 때문에 지혜가 다쳤습니다. 또 하나의 작은 십자가입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예수님이 다치셨는데, 죽기까지 다치셨는데, 이제는 이 엄마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다쳤습니다. 오빠 염려하지 마세요. 편안합니다.

그래서 그 조카한테 병원에 조카한테 전화를 했더니, 그 조카 녀석이 그래요. 외삼촌. 염려마세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난을, 나를 다듬으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난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쉽게 대답하세요. 여러분들이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있으시면 아멘하십시오. 겁먹지 마시고.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 아멘 하시라고. 아 있잖아요. 그게 아들이고, 딸이고. 부부라도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 함께 살고 사랑하면서 사는 이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편안하고 기쁘고 행복할때도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 왜 고통이 오죠? 변화되지 않은 모습 때문에. 아직도 죄에서 구원받지 못한 죄가 죄인줄 모르고 사는 그 모습 때문에, 그게 아들이고, 딸이고. 그 모습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나요? 너무 그 고통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나 몰라라? 그렇게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런 관계로 인해서 참 힘들때가 너무 많은데 그래서 정말로, 정말로 떼어내버리고 싶고, 다 벗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고. 그러고 싶을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줄 압니까?

짊어져라 그랬습니다. 나를 보고 짊어져라. 내가 너를 짊어졌지 않느냐? 너도 짊어져라. 그 사람을 품어줘라. 너무 괴로워요. 그래도 품어줘라. 나 못살것어요. 하나님. 그래도 도망가지 말고 그 사람 곁에 서 있어라.
왜 그러나요? 왜 그런줄 압니까? 그게 십자가의 도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속죄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또 나도, 내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무슨 십자가냐?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짊어져야 됩니다. 그러하면 어찌됩니까?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내가 이 십자가 끝까지 지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구원받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의 하나님이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나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제 십자가 지고 따라오너라.

이런 삶이 우리의 가족이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우리끼리 부딪힙니다. 드디어 이렇게 하면 마침내 참 좋은 날이 옵니다. 그렇게 내게 고통이 되었던 그 사람이 변화되는 모습. 얼마나 오지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게 해주십니다. 이 고난밖에 없습니다. 이거 피할렵니까? 벗어버릴렵니까? 벗을 수도 없습니다. 방법은 딱 하나. 짊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저를 대속하신 주님. 제가 그 사람을 끝까지 품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따라하십시오. 그 사람을 끝까지 품을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품으셔야 합니다.

나를 대속하신 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그 기도는 꼭 들어주십니다. 날마다 들어주십니다. 순간마다 들어주십니다. 그러게 짊어지도록 위로해주시고 붙잡아주십니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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