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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욕망(慾望)과 소망(所望) / 시 43:5, 롬 8: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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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慾望)과 소망(所望)
시편 43:5, 로마서 8:24~25                               

나의 목회관 중에서 신(信)망(望)애(愛)의 망지 역사화(望之 歷史化)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해방 후 서구화 도시화 산업화 등의 구조적 변화는 한국 국민의 욕구 수준을 상승시켰다. 그로 인해 개인이기주의와 구조적 부조리가 문화 풍토에서 번창하여 개인의 범죄와 제도화된 부정 부패가 오늘의 현실을 어둡게 하고 있다. 목표를 정당하게 그리고 확실히 달성하려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편법주의가 이 사회의 질서와 안전을 근본적으로 혼란케 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 한국 교회는 구체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상황에서 요청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와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참여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망지 역사화(望之 歷史化)로 희망의 구현을 내세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재산을 획득하고 이익을 추구하는데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생존의 존재 양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양식을 가장 당연한 생존 양식으로 심지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생활 양식으로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 양식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소유 양식은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이 삶의 지배적 주제가 된 서구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소유와 존재"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 현실을 우리는 실존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 대신에 알지 못한 욕망의 우상을 섬기는 작태를 보게 된다.

이처럼 참된 소망을 잃은 불신앙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에는 보다 나은 내일  보다 살기 좋은 내일, 보다 행복한 내일에 대한 열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마치 자라나는 꽃잎이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시대와 관심은 자기의 장래에 대하여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자기들이 정권을 잡는 날에는 과거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욕망은 인간이 목적 없는 존재로 느껴지고 진리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그의 영적인 힘과 지력이 반신불수가 되고 결국 절망이 그를 사로잡게 된다. 그러므로 욕망과 소망의 사이에서 우리는 방황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을 잘 조정해 나가야 한다. 이 말은 욕망과 소망을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은 "얻은 만큼 잃을 줄 아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하는 삶에서 무슨 일을 시작하는 순간 "이 일은 꼭 끝내야 한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아주 잘" 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습관처럼 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마음가짐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일을 끝내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일을 하는 동안 행복하기 어렵다. 매순간 천천히 생각하며 일해야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효율이 아니다. 얼마나 즐기면서 일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버스를 기다릴 때도, 은행에서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릴 때도, 전자 레인지에 음식을 넣고 데워지기를 기다릴 때에도,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에도 여유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소망과 욕망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소망은 자비심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욕망을 숭고한 소망이나 이상으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자비심과 사랑에 근원을 둔 소망은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지만 욕망은 삶을 지치게 한다. 흔히 우리는 일을 돈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해지려면 많은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요소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돈을 벌고자 하는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가? 잘 살펴보면 돈은 행복이 아닌 다른 것들 즉 고통과 슬픔 절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이럴 때 사회적 명분을 찾고자 권력, 명예, 성욕, 부에 대한 욕망이 사회 봉사와 같은 공익적인 소망으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많은 기업가들이 흔히 자신의 사업이 잘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갖게 될 것이고 환경도 보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거를 찾아서도 안 된다 결국 욕망의 1차 피해자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동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우리는 고통에 이르기도 하고 행복에 이르기도 한다. 긍정적인 동기는 당신을 건강과 행복으로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부정적인 동기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 사회에 많은 고통을 준다.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이 된다. 탐욕은 정신적인 것이며 그 근원은 무지와 몰이해다.

현인들은 말한다. "삶이란 오직 이 순간 즉 현재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과거는 이미 지나 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현재다. 당신이 진정으로 살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당신이 이 순간을 놓친다면 결국 삶과의 약속을 어기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마음은 쉽게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늘 현재를 떠나 과거나 미래 어디인가를 방황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힘겨운 까닭은 이렇듯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직장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람 난 남편과 같다. 항상 애인만 생각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무시하는 남편과 무엇이 다를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당신과 자신의 행복마저도 무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시간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간도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삶에서 당신과 가족이 최우선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애인 때문에 현실은 정반대인 것을 말이다.

또 한 예로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명감 때문에 혼자서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너무 많은 일을 한다. 교계에 이름 있는 성직자가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선 약간의 시간도 내주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곁에 있어줄 시간도 없다. 늘 어떤 알 수 없는 능력이 그를 몰아붙이는 것 같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더 멀리나 가야 돼",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해"라고 속삭이는 소리 때문에 그는 늘 바빴고 불안하다.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도 적절히 대응할 수도 없다. 그의 자녀들이 다가왔을 때도 자신 앞에 펼쳐진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함께 있어도 늘 부재중인 남편과 아버지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생이 아내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내와 자녀들은 너무 외롭다. 그는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행복의 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여기에서 정말 가족과 자녀들 동료들에게 대한 책임감만으로 그토록 열심히 일한 것일까? 그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엔 자만심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그는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몹시나 자랑스러워 자신을 더 채찍질한 것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권력욕, 명예욕, 출세욕을 비롯해 최고가 되겠다는 의지가 전부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애석하게도 자신의 능력이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더불어 사람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삶은 유한 하지만 욕망은 무한하다는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하는 사람들은 늘 바쁘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 바쁘다. 영어에서 일이나 사업을 말하는 비즈니스(business)와 바쁘고 분주함을 말하는 비지니스(busyness)가 철자 한 자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신 없이 바쁜 사람들을 보면 꼭 무언가로부터 달아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혹 자신의 내면에서 자꾸만 생겨나는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또는 그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바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진정한 자아를 못 찾아 아직 힘의 근원에 닿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무기를 쉽게 차용한다. 세상의 무기란 다름 아닌 명예, 돈, 권력이다. 하지만 이런 무기는 사람들은 내면을 보호하기는커녕 상처만 낸다. 사람들은 파괴되는 내면 때문에 전보다 더 큰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더욱 분주하게 채찍질을 한다. 하지만 이런 분주함은 삶에서 생명력을 앗아가고 힘없고 김 빠진 삶을 살게 할 뿐이다. 현대인들은 마치 제트 비행기의 조종사처럼 불안과 긴장을 가지고 자기 운명을 빠른 속도로 운전하고 있다. 인간의 소망은 인간의 장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데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심과 은혜와 지혜로 인간이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완전한 뜻을 이루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의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히 지킨 것처럼 미래의 약속도 성실히 이루어 주실 것을 믿기에 현재의 오늘의 삶이 얼마나 성실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18세기 영국의 여류 작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이"라는 작품이 있다. 저자인 샬롯은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작가가 되겠다는 집념으로 살다가 짧고 불행한 일생을 마친 여자였다. 브론테 일가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문이 기울고 말았다. 살롯 역시 병약한 몸으로 태어났으나 작가가 되겠다는 무서운 집념과 천성적인 문학적 소질로 인하여 불후의 명작을 낼 수 있었다. "제인 에어"는 자서전체로 쓰여진 소설로 여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잘생기지 못한 "제인"이란 소녀가 외삼촌댁에서 고달픈 더부살이 생활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인"은 갖은 학대와 편견가운데서 6년 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모교에서 교사직까지 얻게 되었으나 그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신문의 구직 광고를 내어 돈필드 지방의 유지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저택에 가정 교사로 들어가게 된다. 주인 로체스터는 도시에 혼자 살면서 일년에 한두 차례 예고도 없이 불쑥 저택에 나타나곤 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제인"과 로체스터는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불행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제인"이 결혼식장에서 로체스터가(家)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즉 로체스터의 아내는 수년 전에 미쳐서 큰 저택 한 구석에 감금된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친 로체스터 부인의 난폭한 모습을 본 "제인"은 큰 충격을 받고 홀연이 그곳을 떠나 버리고 만다. 돈필드를 떠나서 갖가지 일생을 다 경험한 "제인"이 수년 후에 다시 돈필드를 찾았을 때 그녀의 앞에는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던 저택은 간 곳 없고 불 타 버린 폐허만이 남아 있었다. 로체스터 부인이 지른 불에 그녀 자신은 타죽고  로체스터는 소경이 되어 하인들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다.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인물들은 다 강렬한 집념을 가진 사람들이며 또 그들은 그들의 강인한 집념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승리한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사람들에게 시련과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제인"은 처참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로체스터를 위로하다가 결국은 다시 그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파란 많은 소녀시절을 지낸 "제인"은 이제 한적한 시골에 묻혀 장님이 된 남편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출발하게 된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다. 이것은 낮에는 해가 돋고 밤에는 달이 뜨는 사실만큼 엄연한 진리다. 불타(佛陀)는 모든 고통의 근원을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이 자신의 심신을 수양에서 모든 욕망을 다 배격한 상태 즉 자신까지 버리는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선이며 극락이라고 하였다. 성서는 모든 욕망을 다 선이라고 보지는 않으나 그것을 버리기보다는 극복하고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권고한 면을 유의한다. 욕망으로 지쳐 있는 현대인들을 고발하면서 소유양식인 돈, 명예, 권력의 탐욕에서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며 "얻은 만큼 잃을 줄 아는 지혜", 소망으로 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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