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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원하는 마음의 행복 / 출 35: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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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원하는 마음의 행복
본문 : 출 35:20-29

유명한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정립했습니다. 하나는 존재 지향의 삶, 또 하나는 소유 지향의 삶, 이 두 가지를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존재 지향은 인격을 지향하는 것이고 소유 지향은 시장을 지향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경쟁과 노력으로 땅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소유지향형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 존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존재 지향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지향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유의 복입니다. 이것은 명예, 물질, 땅에서 갖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복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유의 복을 추구합니다. 또 하나는 인격적인 복입니다. 내 자신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 땅에서 사는 동안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며 사는 복인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입니다.

예수 믿고 특별히 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받아야할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효자가 있고, 불효자가 있습니다. 효자나 불효자나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효자도 부모의 모습을 닮고 불효자도 부모의 모습을 닮습니다. 또 효자나 불효자나 다 그 이름이 족보에 오릅니다. 둘 다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불효자는 한 가지는 받지 못합니다. 마음의 감동입니다. 효자는 자기 부모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그 마음속에 부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면서 늘 흠모합니다. 그러나 불효자는 그 중심에 부모를 향한 마음의 감동이 없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효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받나' 이렇게 묻는다면 마음으로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면 은혜를 받은 자요, 사랑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 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세상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보면 욕심이 생기고, 땅의 것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모두가 갖는 본능적인 욕구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면서 그 마음이 감동을 받아 신비한 경지를 늘 체험하면서 살 때 이 사람을 가리켜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심지어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감동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이나 기력(氣力)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일종의 미적 ‘혼합감정’이 감동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쾌, 불쾌가 감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동이 있으면 쾌감을 느끼고 감동이 없으면 불쾌를 느끼게 합니다.

로버트 모건은‘홍해의 법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늘 오르락내리락 마치 놀이동산의 청룡열차와 같다. 우리 감정은 고삐가 풀려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늘 일정치 못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동도 일정치 못하게 마련입니다. 아마 우리 국민들에게 최근의 가장 큰 감동은 1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2002 월드컵의 감동일 것입니다. 아직도 귓전에 “대~한민국”의 구호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런 신나는 일이 언제 또 있을까 할 정도로 월드컵은 그 자체가 감동입니다. 그 외에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감동의 순간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동은 얼마 후가 되면 다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감동이 있는 순간은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뻔히 그 결과를 알지만 또 봐도 감동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들은 보면 볼수록 불쾌감만 더해 갑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7에는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아무 감동이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감동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입니다. 감동은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마음이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성경은 감동을 원하는 시대에 참 감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숨이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감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감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감동의 내용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베드로전서 1:21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저자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신 글들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흙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흙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아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죽었던 영도 다시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날마다 기뻐 뛰면서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숨을 내쉬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은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고 주님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고 감동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의 한 과정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에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돌판에 율법을 받고, 또 하나는 성막 짓는 계시를 받습니다. 율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 이것은 인간이 가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사함을 받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데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지 아니하고 사람의 손으로 짓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요?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21절)"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22절),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25절), "마음에 감동을 받아"(26절),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29절) 계속해서 '마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감동된 자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음의 감동으로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성막'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성막도 되지만 우리의 몸이 성막입니다. 구약의 성막이 성전으로, 이제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성전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형적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심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는 몸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세 번째는 물질을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헌심, 헌신, 헌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을 감동하는 자, 자원하는 자, 즐겁게 바치는 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심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훗날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마음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시몬의 문둥병이 나으니까 감사해서 잔치를 배설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제자들도 참석했고 동네 사람들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하는 중에 마리아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는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인데 그것을 예수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분을 내면서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 14:4-5) 하며 그 여자를 책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기념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감동시켜야 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감동시켜야 됩니다. '하늘이 어쩌다가 저런 며느리를 나에게 주셨나' 이럴 정도로 시어머니를 감동시켜야 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보면서 '내가 어쩌다가 이런 아내를 만났나. 보기도 소중한 사람' 하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성도는 교회에 오면 목사를 감동시켜야 하고 회사에 가면 사장을 감동시켜야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일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것에 대하여 미리 예고해 준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감동시키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될 뿐만 아니라 감동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감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감동된 대로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 16:10)


자원하는 예물

출애굽기의 1장부터 24장까지는 이집트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 받는 이야기이며 25장부터 끝장까지는 성막(聖幕)을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25장에서 31장까지는 "성막을 만들어라, 만들되 이렇게 만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중간에 잠깐 금송아지 사건을 비롯하여 절기와 안식일 이야기가 들어갔다가 35장에서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예물 가지고 오는 이야기로 성막 만드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성막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백성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옵니다. 너무 많이 가져와서 모세가 "그만 가져오시오" 봉헌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고 광란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하고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여기까지 오게 했는데, 이제 선민으로 택해서 계약을 맺으려 하는데 이것이 무슨 배은망덕인가? 싹수가 노란 백성이로구나. 가망성이 없구나!" 하고서 포기해 버릴 만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백성들이 예물을 넘치도록 많이 가져온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집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잊고 지내다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장소를 만들게 되었으니 감격해서 그랬을 것이요, 또 하나는 용서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계속해서 힘써 예물을 가져 왔습니다.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아침마다 가져 왔다

쓰고 남은 것을 저녁에 가져 온 것이 아니고 먼저 아침에 예물을 봉헌하고 하루를 살았습니다. 이것이 봉헌의 원리입니다. 오늘, 주일은 한 주일의 아침입니다. 주일에 헌금을 봉헌하는 것은 바로 아침의 봉헌입니다. 아침에는 누구나 신선한 의욕을 갖습니다. 좋은 것을 생각합니다. 누구나 이상주의자입니다. 이것이 변하기 전에 실천에 옮겨야합니다. 미루다보면 변합니다.

하나님은 아침의 예물, 쓰고 남은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봉헌하는 예물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미루지 않고 즉시 실천에 옮겨 봉헌하는 그 예물을 통해 큰 역사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에 바쳤습니다. 아침마다 바쳤습니다. 먼저 바쳤습니다.

그 다음, 자원하여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성막 만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출애굽기 25장 1절을 보면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 고린도후서 9장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칠 때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한 어머니가 어린이에게 "헌금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주일에 교회 갈 때 천 원 짜리 한 장을 주면서 '이것은 용돈이다" 했습니다. 같이 오천 원짜리를 주면서 "이것은 헌금으로 바쳐야 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가 오천 원을 용돈으로 쓰고 천 원을 바쳤습니다. 어머니가 야단을 치니까 어린이는 "어머니가 늘 헌금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저는 천 원은 기쁜 마음으로 헌금할 수 있었는데 오천 원은 기쁜 마음으로 헌금하기가 어려웠어요." 그 다음부터 이 어머니는 많은 것, 귀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자원하여 낼 때 즐거운 마음으로 낼 수 있습니다. 자원하여 일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어느 선교단체의 책임자가 아침 조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어제 오후에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부서에 가니까 네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졸고, 한 사람은 신문을 보고, 한 사람은 잡담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원봉사 하러 나온 집사님 한 분만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만든 제품이 품질이 뛰어납니다. 자원하여 일할 때 비용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 행복한 것입니다. 특별히 구원 받은 성도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감당하는 모든 일들은 습관이나 책임이나 체면으로 할 때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때는 기쁨도 감동도 감사도 찬양도 열매도 넘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을 축복하고 그 일의 열매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원하여 봉헌했습니다. 다음, 연하여 바쳤습니다. 연하여 바쳤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한번만 바치지 않고 계속해서 바쳤다는 뜻입니다. 양봉을 하는 분들은 벌통에 꿀이 찼을 때 그 꿀을 얼른 따야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벌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물물도 계속해서 퍼 올려야지 맑고 깨끗한 물이 계속해서 고입니다. 헌혈을 자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헌혈을 하면 새 피가 형성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하여 바쳤다는 것은 또 한 사람만 바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모두가 줄을 이어서 바쳤다는 뜻도 됩니다. 모든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교회도 어느 한 두 분이 중심이 되어 성전을 짓고 한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가면 어느 정도까지는 빠르게 성장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작은 정성이 합해져서 지어지고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이끌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자발적으로 여러 사람이 합심하는 교회가 힘이 있고 발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왔습니다. 여기서 예물은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 관심, 재능, 시간,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작은 것도 귀한 예물입니다. 자원하는 그 마음이 좋은 예물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성전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건물과 모든 구조물들을 새롭게 단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신앙 자세, 마음 자세가 새롭게 달라져야 합니다. 달라지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처음 시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아니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더 단단한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과 모든 부서에서 섬기는 일과 헌금하는 일에 자원하는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시고 진정 자원하는 마음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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