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치관의 변화 / 마 5:1 - 12

  • 잡초 잡초
  • 657
  • 0

첨부 1





본문: 마5장 1절- 12절
제목: 가치관의 전환

70평생을 절에 다니던 한 할머니가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
습니다. 나오고 보니 그런대로 교회라는 곳이 재미도 있고, 또 같은 연배의
친구분들도 많고 해서 교회생활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인으로 정식등록을 했더니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겠다는겁니다. 목사님이
자기 집으로 오신다니까 아침부터 쓸고 닦고 간식을 준비하고 분주히 움직
였습니다. 드디어 시간이 다 되어 목사님 오실 시간에 집 앞에 나가서 기다
리는데 저기 목사님이 오십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달려가서 이 할머님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주지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많은 학자들이 말하는 한국기독교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 심성이나 사
고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의 극복입니다.

한국사람의 심성이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나
유교 혹은 전통적인 무속신앙입니다. 그래서 비록 몸은 교회에 나오고 있어
도 그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에 있어서는 자기에게 익숙한 무속이나 불교적인
가치관을 따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까 말했던 그 할머니의 행동은 어쩌면 애교로 봐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진정한 성경적 가치관으로 변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당종교나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이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가정에 심방을 가서 찬송을 부르는데 "찬송가 444장을 부릅시다"
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가사가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인
데, 이상하게도 그 집 주인의 얼굴은 하나도 즐겁고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예배 내내 시무룩해 있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 통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분 말이 '신년초에 목사가 심방왔는데 하필이면 444장, 죽을 사자가 세개나
들어가는 찬송을 불러서 재수가 없고 불길해서 기분이 아주 나빴다는 이야
깁니다. 이건 이 사람이 몸은 교회에 있고, 예수의 이름은 부르고 있지만 아
직도 무당종교의 관습에서 못 벗어났다는 이야깁니다.

어떤 교회에 갔더니 그 교회는 연말 송구영신예배때 전통이 하나 있답니다.
그게 뭐냐 했더니 소위 말하는 '성구뽑기'라는 행사였는데, 성경말씀 가운데
한 구절씩 쪽지에 적어 놓고, 예배마치고 돌아갈 때 하나씩 뽑아가는 그런
행사랍니다. 쪽지를 뽑았을 때 그 때 적혀있는 성경구절이 바로 올해에 나에
게 주시는 하나님말씀이라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성구를 뽑았습니다. 거기
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잘되고 범사에 강건하기를 간
구하노라'는 말씀을 뽑고는 그렇게 좋아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성구뽑기때문
에 시험에 든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뽑은 성구가 무엇이었느냐하면 "복
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였답니다. 그 성구를 뽑고는 '일년내내 나보고 고
생만 하라는 말이냐?'하면서 불쾌하고 기분이 나빠서 교회를 옮겼답니다.

이게 성경적인 사고방식입니까? 도대체 그날 뽑은 구절이 왜 그해에 주시는
하나님말씀이라는 것인지, 그 때 좋은 구절을 뽑으면 왜 한해가 잘될 거라
생각하고, 그 때 마음에 안드는 구절을 뽑으면 한해가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
는 것입니까? 이건 점치는겁니다. 성경가지고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는 지
극히 비 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이 좋은 전통이라고 송구영
신예배 프로그램에 들어있다는것 자체가 아직 우리가 어떤 사고를 하고 있
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가치있게
생각하는가? 곧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진짜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
하는가 하는 것도 세상의 기준과 하늘의 기준이 다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가난하게 사는 것과 부유하게 사는 것, 어느 것이 더
복받은 삶입니까? 항상 즐거워하며 웃고 사는 사람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며 사는 것, 이건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혹은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한 평생 사는 것과 고난을 받으며 사는 것, 어느 것이 더 복받은 것입니까?
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부유하고 웃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보람있고 가치있게 혹은 복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
다. 어떤 사람이 진짜 복받은 사람인가?
첫째는 뭡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물질에 있어서 부유한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 아니라, 물질이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고
단지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요? 웃고 즐기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이 불쌍하고 동정받아야 될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축하받고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되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
본문은 흔히 팔복이라고 불리우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팔복 팔복 하니까
사람들은 무슨 우리나라의 오복처럼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리게되는
여러가지 복에 대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걸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여기
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복이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복되다고 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 말로 '복이 있나니'...하니까 '이런 이런 사람이 복을 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원어성경을 보면 이것은 감탄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복되
도다' 혹은 '축하하노라' 이런 뜻입니다. 굳이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잘되었
도다, 더 낫도다'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겠구나, 천국을 얻을 수
있으니'

'애통해하는 자들을 불쌍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나
을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이 해 주시는 놀라운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이니라'

'온유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을 멍청하다고 비웃지 말아라. 실제로는 그런 사
람들이 결국은 더 낫고 더 얻는게 많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
에게 결국 땅을 차지할 권세와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죄를 짓고 세상살이에 약삭빠르게 적응 잘하는 사
람이 더 나은 것처럼 생각되지?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를 목말라하고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면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낫다. 왜냐하면 하
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결국은 배부르게 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큰 만족
으로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야 말
로 정말 잘된 사람이다. 얼마나 복된 일인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을 긍휼의 눈으로 쳐다봐 주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깨끗해서 이중마음을 가지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속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종종 손해를 잘 보는 그런 사람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답답하게 느껴지느냐? 아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이야말
로 정말 잘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고 투쟁하는 사람이나 이것을 못 본 체하는 사람보다는 평화하고 화평
을 만드는데 애쓰는 사람이 더 복이 있다....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진짜 하
나님의 아들이라는 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저 편안히 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수고나 어떤 희생도 제대로 해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세상을 잘 사는 것 같으냐? 결코 부러워하지 말아라.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
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아픔을 겪는 사람이 복
이 있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때 얼마나 당당하겠으며 또 하늘에서
하나님 예비하신 상급이 얼마나 큰지 그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외치신 천국의 가치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복된 삶의 기
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참으로 사모하고 부러워할 만큼 크고도 중요하
게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이런 것보다는 부유하게 살고 편안하게 살고 남
간섭안하고 남 간섭 안 받고 사는 그런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계
십니까?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니. 하늘백성이니
하면서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고 다니지만, 정작 우리 머리속의 가치기준은
여전히 이땅의 것, 썩어질 것, 우리 주님이 전혀 가치없다고 말씀하신 죄악
된 세상의 기준과 동일한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
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앞에 찾아나와서 말합니다. "당신은 정말 위대하신 하나
님의 아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부탁이 하나있는데요." 주님께서 그게 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
서 돌아가실 때 땅을 좀 남기셨는데, 제 형이 그걸 혼자 먹어버렸습니다. 그
러니 선생님께서 좀 가 주셔서 저희 형님께 이야기를 해서 제 땅을 도로 좀
찾게 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위대하신 하나님 아들의 말씀
은 순종할 겁니다" ---예수님을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 놓고는
기껏 그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을 땅 찾는 일에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고 주님이 하신 비유가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눅 12장)

한번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선생님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제 아들들이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그
래 놓고는 '그런데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 당신은
장차 하늘나라의 임금자리에 앉으실 분 아니십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
때 제 아들 하나는 당신 오른쪽에, 또 하나는 당신 왼쪽 자리에 앉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최초의 치맛바람이 여기에 나옵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자이심도 알았습니다. 하늘 영광의 보
좌에 앉으실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사고방식속에는 명예와 출
세라고 하는 이 세상의 썩어진 가치기준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이 땅의 썩어질 것들에 최고, 최
대의 관심과 가치를 여전히 두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늘의 새로운 가치기준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아니 지금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내 속에는 이 세상의 것들이 더 좋아보이고 이 세상의 명예나 권세나 편안
함이나 세상의 가치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영원하신 주님앞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지 마십시오.
거룩하신 주님앞에서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을 붙잡고 계시지 마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의 것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위해 기도해서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걸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구하되 목적으로서의 돈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돈을 구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편하게 떵떵거리며 잘 사는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도 전하고 선교사도 보내고 교회의 일꾼도
키우고 주님나라를 위해서 마음껏 사용하고자 하는 그런 갈망에서 돈을 구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항상 말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자기 만족
자기 배 불리는 것이 중요하고 그걸 구하다 보니까 명분상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도 속고 하나님앞에서도 속이는 결과를
나타내게 되는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믿지만 아직도 그 속의 가
치관과 세계관은 여전히 이 땅의 것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이 참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여기는 것을 맹목적으로 그냥
따라가십니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하늘백성의 새 가치관으로 변화하고 있
습니까?
'주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 나도 귀히 여기고/ 주님이 버리신 것 나도 버리
리'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배
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자기를 부인하
고'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기존의 가치관을 점점 벗어나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고 꾸준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누가 복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하인사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
까?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부족함을 느낀다, 무언가
필요를 느낀다는 말인데, 이것이 어떤 물질이나 환경적으로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 아니고, 영에 있어서(the poor in spirit) 필요를 느낀다는 말이니까 결
국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누구야, 내 경험 내 지식 내 능력이라면 못할 것이 없다...
돈이 많고 권력이나 어떤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 종종 가지는 마음의 태도
가 이런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기자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을 멋있게 보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렇게 심령이 자신감으로 가득찬 사
람보다는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자기의 모자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절대적
으로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 그런 사람이 훨씬 더 낫다...왜냐
하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여러분은 어
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을 복되게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우리가 이 여
덟가지 기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여러분은 정말 어떤 것을 복된 것
으로 여기고 계십니까?
하늘의 기준입니까. 이 땅의 기준입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늘백성이라면 당연히 이제 하늘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가치
관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계관의 변화가 내 안에서 부터 나타나야합
니다.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지나치게 이기적인 이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벗
어나서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지음받은 새 사람의 성품과 가치관을 따라 살
아감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매일매일 거듭나는 복된 여
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