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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행 1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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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사도행전 12장 20-25절
< 하나님이 없는 삶의 종말 >

이 세상에 독재자가 행복하게 사는 일이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행복했을까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행복했을까요? 여러분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 불행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챠우세스쿠는 24년간 철권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김일성 주석궁을 방문하고 감탄하여 유럽 최대의 궁을 짓습니다. 경제는 피폐하고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이 들고일어납니다. 그 사람들에 대항하여 관제데모대를 만들었는데 그 관제데모대가 돌변하여 그에게 저항하면서 군부가 등을 돌렸고, 그는 황급히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1989년 성탄절에 부인과 함께 즉결처형이 됩니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의 말로는 그처럼 비참합니다. 왜 독재자가 불행하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합니까? 그들에게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자기가 제일인 줄 알면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의 성취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량기업으로 여겨지던 SK가 쓰러져 가는 것을 보십시오.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여겨지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로 유명한 동아건설이 쓰러지는 것을 보십시오.

잠언 1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노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력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멀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 영광을 자기가 취한 헤롯의 종말 >

본문은 헤롯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본문의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로 예수님 나실 때의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왜 헤롯 대왕에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쓸까요? 그가 위대한 왕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헤롯 대왕 자손 중에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명의 왕이 있습니다. 그 자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대왕'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그리고 헤롯이 로마에게 아부하여 왕이 되어 철저한 독재를 펼쳤지만 개발독재를 통해 경제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성취를 이루었기에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역사가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의 손자로 헤롯 대왕 이후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유대 지역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생깁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있던 유대 북쪽의 항구 무역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헤롯이 그들에게 분노를 가지면서 그들에게 식량 공급을 중단해버렸습니다. 그러자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매수해서 악화된 양국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기회가 생겼습니다. 헤롯이 로마황제 글라우디오를 위한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가까운 가이사랴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군대가 주둔해있던 유대지역의 행정 수도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해서 의전에 따라 효유(일장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헤롯의 환심을 사기 위해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헤롯의 연설을 듣고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저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그 환호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진정 대단한 존재인 줄 알다가 결국 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충이 먹어 죽게 되었습니다(22-23절).

하나님이 영광을 자기가 취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가장 주의하며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칭송할 때입니다. 그때는 "내가 잘해서!" 혹은 "내가 똑똑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됩니다. 일이 형통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더욱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 작품인생과 졸작인생의 차이 >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병든 제물, 흠이 있는 제물, 신체의 일부가 손상된 싸구려 제물 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큰 죄였기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온전하고 건강하고 흠이 없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우리 자신이 '산 제물'입니다(롬 12:1).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흠이 없는 모습, 건강한 모습으로 드려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없고, 건강할 때에는 왜 이리 하나님을 외면하다가 꼭 문제가 생기고, 병이 들어야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망하거나 병들어서만 나오면 안됩니다. 일이 잘되고 건강할 때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건강할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다가 병들어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죄송한 일이고,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우리는 일이 잘되고 건강할 때일수록 더욱 겸손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재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더욱 큰 축복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 때 우리는 가장 효율적인 인생, 가장 창조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글을 쓸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글을 쓰면 더 잘 써지고, 작곡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작곡을 하면 더 잘 작곡할 수 있고, 사업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사업을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는 인생은 반드시 작품인생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취하는 인생은 반드시 졸작인생이 될 것입니다.

<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

그러면 어떤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일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삶을 생각해보았습니다.

1. 하나님 중심적인 삶

어떤 분은 입만 뻥긋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고 속으로는 "내가 했지!"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척 하면서 결국 자기가 영광을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모습은 마치 "국민의 뜻"을 내세우며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정치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크게 성공하거나 큰 일을 성취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출세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일상생활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삶이 없는 사람이 크게 성공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얼마나 평범한 일입니까? 그런 일을 가지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게 성공해서 영광 돌리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큰 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빵 한 조각을 놓고도 진지하게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누구보다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터를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는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누구인지 알기 힘듭니다. 그러나 식사 한끼 같이 해보고, 일을 같이 한번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살지는 못해도 모든 생각과 태도의 중심에 정말 하나님이 있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입에 침을 튀기면서 "하나님을 내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해도 작고 평범한 삶에서 허점이 많은 사람은 영광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항상 거창한 것만 찾지 말고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에서도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겸손한 삶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남을 속이는 태도이고, 결국은 자기 자신도 속이는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봅니다. 그런 교만한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그런 교만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래 겸손하기 힘듭니다. 조금만 틈이 생겨도 자꾸만 높아지려고 합니다. 공부를 조금만 잘해도 높아지려고 하고, 돈이 조금만 많아도 높아지려고 하고, 얼굴이 조금만 잘 생겨도 높아지려고 하고, 심지어는 조금만 은혜를 더 받는 것 같아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면 마음을 힘써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먼저 자기를 죽일 수 있을 때 치유의 길, 문제 해결의 길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어떤 분이 수술할 때 의사 선생님이 마취를 했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직 안 죽었네!" 그 말을 한 후에 죽을 때까지 더 기다리거나 죽이기 위해서 마취제를 더 씁니다. 그래서 기필코 죽입니다. 왜냐하면 수술한 부위를 죽이지 않고 수술하면 더 끔찍한 고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잘 죽어야 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원리를 알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가장 위대한 말입니다. 이 말은 "나는 날마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친다!"는 말입니다. 가끔 너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잠잠히 지내면 그것은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가끔 분노가 치밀지만 그 분노를 참으면 그것도 역시 날마다 죽는 삶에 속합니다.

가끔 '편안한 삶'에 대한 추구가 나를 유혹합니다. 그런 삶은 내 육신을 편안하게 하지만 내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편안한 삶보다 헌신적인 삶이 내일이 있고, 가치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편안한 삶의 유혹을 멀리하면 그것도 날마다 죽는 삶입니다. 그처럼 한번 자랑을 참고, 한번 분노를 참으면, 한번 유혹을 참으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풍성한 축복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특히 말을 겸손하게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라는 겸허하고 빛깔 있는 말을 많이 해야 하고, 말하기보다 2배 이상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입을 주시고 두 개의 귀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귀가 하나이고 입이 두 개인 괴상망측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살려면 무엇보다 남의 장점을 찾아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장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그리고 삐딱한 사람도 자세히 보면 좋은 장점이 많습니다. 그 장점을 보고, 그 장점을 발굴해주어야 합니다. 이상한 일은 사람이 겸손하면 남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디에 가서든지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됨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복은 바로 그 복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합니까? 그는 큰 일을 했어도,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되어도 항상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누군가 가수 조영남이 싫다고 했습니다. 왜 싫으냐 했더니 자기 최고인 줄 알고, 너무 잘난 척을 하고,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에게도 장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청자들에게 겸손함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그 많은 장점이 일거에 묻혀지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은혜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아는 교만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지만 겸손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삶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가장 실제적인 표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고, 우리의 성패를 결정하고,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예배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 돌리는 행위입니다. 그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 지루한 예배,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없는 3대 불감증의 예배가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배 중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양식을 얻고 살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어제 저의 둘째 딸 한나가 배가 고팠는데 그때 엄마가 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배가 고팠지만 남을 배려하는 성격을 가진 한나는 엄마가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는 못하고 저에게 이렇게 자기의 배고픈 것을 표현했습니다. "아빠! 아빠는 요리할 줄 아는 것이 오징어 굽는 것과 라면 끓이는 것과 예배 인도하는 것밖에 없죠? 예배도 먹는 거죠?"

어린 한나도 예배하는 시간이 '말씀을 먹는 시간'이고 그 말씀을 먹어야 영혼이 산다는 것을 아는가 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잘 먹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배고픔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말씀 먹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 은혜가 친구와 함께 도서관에 갔습니다. 동생 한나가 심심했었던가 봅니다. 저에게 전화를 해서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심심해요. 빨리 집에 와주세요." 집에 갈 수 없다고 해도 너무 애처로운 목소리로 집에 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아빠가 지금 말씀 먹는 것 준비하고 있어서 갈 수 없어!" 그러니까 "네! 알았어요!"하고 더 이상 조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한나도 말씀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말씀 먹는 것, 예배 드리는 것을 중시할 때 주님께서 더욱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어떤 중국 선교사님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한 시골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금요일 저녁에 집에서 출발하여 걸어서 교회까지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다시 걸어서 집으로 월요일 저녁쯤에나 돌아오는 성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예배 시간만이 감격스러운 시간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향해 가는 길도 은혜가 넘쳤을 것이고, 예배를 드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은혜가 넘쳤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예배 시간 전에도 예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 시간 후에도 예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예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런 모습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무엇이 급한지 축도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도망칩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분의 몸에서 은혜가 툭툭 떨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예배 시간 전에 조금 일찍 와서 기도로 준비하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받은 말씀 가지고 한 톨이라도 흘릴까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를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 구조조정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이제는 장사가 잘 되는 기업, 잘 할 수 있는 기업에 집중하고, 문어발 식으로 늘어놓지 말고 좀 자르고 중요한 사업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 생활도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본질적인 일, 중요한 일,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실패하게 할 때 어떤 방법을 씁니까? 삶을 산만하게 만듭니다. 중심이 없게 만듭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가끔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이 은혜가 떨어졌어!"라고 할 때가 언제입니까? 대개 교단정치에 지나치게 개입될 때라고 합니다. 어떤 성도는 이 모임, 저 모임 다 다니며 향우회, 동창회 임원이란 임원을 다 맡으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산만한 모습을 가지면 그 삶을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열심히 살아도 본질적인 삶에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본질적인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하는 삶입니다.

예배의 수준의 우리의 삶의 수준입니다. 예배하는 태도가 인생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또한 예배의 축복의 우리의 축복을 결정하고, 예배의 질이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길이 다 막혀도 하늘로 향하는 길은 열려 있기 때문이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펼쳐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산다는 사람은 절망의 날에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는 인생임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절망의 날에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소망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일이 잘 되나 못 되나 상관없이,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사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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