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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원하시면 / 민 6:24-26,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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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원하시면
(민 6:24-26, 마 8:1-4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오염된 세상입니다. 환경이 오염되었고, 사회가 오염되었고, 사람의 마음이 오염되었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더럽지 않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더러워지기는 쉬워도 깨끗케 회복되기는 힘듭니다. 어떤 것은 오염되면 다시 회복되는데 50년이 걸리고, 어떤 것은 100년이 걸린답니다. 그리고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염된 더러움의 극치는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마음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하였고, 성경은 상실한 마음대로 하나님이 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난치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더러운 병은 대체로 난치병이거나 불치병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말자 요즘은 한센병자라고 부르는 한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한센병은 당시에는 더러운 병이라 칭하였습니다. 한센병이라는 “레프로스”란 말은 비늘이라는 “레피스”에서 온 말입니다. 사람의 몸의 모든 것이 비늘처럼 벗겨지고 떨어진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한센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킨 불쌍한 병입니다. 예수님도 병은 고치다라고 하셨고, 귀신은 쫓아낸다고 하셨는데 유독 한센병은 깨끗케 하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더러운 병이란 증거입니다.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한센병이 더러운 병이라고 한 것은 더러운 귀신이 일으킨 더러운 병이라는 뜻일지 모릅니다. 구약에서 한센병은 죄와 관련된 저주의 병입니다. 레위기 13장에는 한센병의 증세를 기록하고 있고, 14장에는 치료와 제사장을 통한 확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센병은 당시에 참 고통스런 병이었습니다. 우선 이 병에 걸리게 되면 사회적으로 격리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가중됩니다. 이 환자들은 종교적, 위생적 이유로 사회에서 철저하게 격리시켰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쳐야 했습니다. 하루에 여러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 옷을 다 찢고 옷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트렌취라는 학자는 한센병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조금 씩 조금 씩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가족과도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병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이라는 사상이 짙었습니다. 우리말에도 한센병자에 대한 좋지 못한 격언이나 말들이 많이 있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병은 ‘하나님의 손가락’(the finger of God)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봤다는 뜻이겠지요? 혹은 ‘매맞음’(the stroke)이라 했습니다. 요즘에 ‘스트로크’라고 하면 거의 심장 마비를 의미하는데 그 당시에는 한센병을 지칭했습니다. 또는 ‘감염되는 피부병’(the infected skin disease)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표현들이 저주스럽고 더러운 표현들이었습니다. 이런 더러운 사람이 깨끗함을 받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회복과 치유를 함께 보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깨끗함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내가 구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환자는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고 “주여,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환자는 이미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자는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나 정도는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환자는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나는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병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은 너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런 더러운 병에 걸린 사람보다 깨끗지 못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중요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심할 여지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구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낫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관심을 보세요. 항상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예수님은 악 속에서 선을 찾으셨을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서 뜻을 찾으셨다. 예수께서 체포현장에서 말씀하신 98개의 단어 중 30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찾는 노력, 이것이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마태복음 9:13에서 예수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2:7에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으시는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몰랐기에 엉뚱한 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기에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멋진 제안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께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멋진 베드로의 제안에 대하여 아무 대꾸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대꾸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다. 물으면 대답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않으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자기 나름으로는 멋진 제안을 한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들으실 때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꾸도 아니하신 것입니다. “만일 원하시면”이라고 했지만 원하시기는커녕 대답도 않으신 것은 속으로 한심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나 나름으로는 멋지다고 생각하고 교회 일을 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대꾸할 가치도 없는 원치도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막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기도하고 여정을 정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무작정 떠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도 갈 곳에 연락도 하고 예약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아에서 비두니야로 가려고 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예수님이 동쪽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드로아 쪽으로 가서 마게도냐 지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해도 예수님이 원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민감하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4:15에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은 이렇게 해놓고, 자기 뜻, 자기 원대로 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섭섭해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결정을 하나님께 보고하거나,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고집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경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고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털어놓았다가는 버림받았다는 느낌만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빗장을 닫아걸고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능력보다 주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주의 뜻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가 입니다. 그래서 이 환자는 “주님이 원하시면”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는 확답이 있을 때까지 주님의 뜻을 밝혀 보아야 합니다.


둘째, 주님은 원하시면 말보다 행동을 앞서 보이십니다.

주님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손을 대신 것이 먼저입니까, 내가 원한다는 대답이 먼저입니까? 예수님은 손을 먼저 대시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보다 행동이 앞섭니다. 한센병자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당시의 유대 의식법 상 한센병자를 만진 자는 부정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시므로 부정에 대한 법을 초월하시고 만지셨습니다.

모노 뉴쿨레오시스라는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이 건강한 사람과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병이란 건강한 자가 약한 자의 병을 전염 받습니다. 손이 깨끗한 사람이 손이 더러운 사람과 악수하면 깨끗한 손이 더러워지게 되지 더러운 손이 깨끗해지지는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사스 환자와 오래 있으면 병에 걸리기 쉽니다. 건강한 사람과 있어서 사스 환자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손을 대심으로 더러운 병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예수님은 신이시기에 부정법을 초월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더러운 것을 만져도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대신 더러운 자가 예수님의 손으로 깨끗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이며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우리는 행동보다 말이 앞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보다 행동이 앞섭니다.

예수님께서 한 밤에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배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물위에 걸어가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자신 있게 물에 뛰어 들었지만 물을 보고는 무서워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놀라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고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건지신 다음에 야단을 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 예수님은 먼저 건져주시고 야단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야단부터 칠 때가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먼저 야단치면 베드로가 물 속에 쏙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저의 동생은 개구장스럽게 자랐습니다. 어릴 때 교회 뜰에서 살다보니 교회 마당이 놀이터였습니다. 교회 지붕은 제법 높았습니다. 종탑 옆에 지붕에 올라가는 사다리 계단이 있었는데 동생이 그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것입니다. 지붕 한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니는 것을 마침 저의 어머니께서 사택에서 나오다 보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혹시 소리부터 치면 떨어질까봐 “야야, 내려오너라”, “그래, 잘한다 천천히 내려오너라” 하시면서 안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다 내려오자 잡고 “아니, 거기가 어딘데 올라가노?” 하시면서 야단을 치시고 엉덩이를 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 식이죠? 주님은 행동으로 말을 보이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큰사랑이 없다”고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친구도 아닌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상에서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시고 다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말만 잘 하는지 아십니까? 복음적이 아니라 율법적 사고를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초월하고,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가져야 비로소 말보다 행동이 앞섭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보세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이 사람들은 얼마나 아는 게 많았습니까? 항상 행동보다 말이 앞섰습니다.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행동은 죽고, 말이 삽니다. 실천은 없고 말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어느 성경에는 “혀로 만이란 말을 “립 서비스”(lip servic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입술 서비스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입술보다 손이 빨랐습니다.


셋째, 주님이 원하시면 더러움을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즉각적인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원하시면”이란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원하노니”라고 응답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란 말은 예수님의 의지와 능력을 의미합니다. 한센병자의 성숙한 믿음에 대한 합당한 응답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즉각적이고 긍정적인 대답을 암시합니다. “암, 원하고 말고”라는 뜻입니다. 영어번역인 NEB 성경에는 “참으로”(indee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은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일 판정까지 포함한 완벽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카타리스테티”라는 말인데 부정과거 수동 명령형입니다. 이 말의 뜻은 완전히 깨끗해지라는 강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만지심은 소외와 사랑에 목마른 심령을 치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하심은 오랫동안 괴롭혀온 병의 근원인 악의 세력을 근절하신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깨끗하게 하심은 부정과 불결에서 벗어나서 다시 성전에 나아가고 제사하게 하신 영혼의 치유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이렇게 온 몸과 마음, 영혼이 다 깨끗케 됩니다. 요한일서 5:14에는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우리의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한 담대함을 가지게 합니다. 로리 베스 존스라는 분이 쓴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원대로 하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성공입니다.

링컨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민감한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깨끗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육체, 영혼, 마음, 생각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맑은 생각을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청순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케 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뜻이 중요합니다.

17세기의 신학자 페네용은 말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화내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당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십시오. 조용한 평화와 하나님과의 따뜻한 교제가 당신에게 행하여진 모든 악한 것들을 보상해 줄 것입니다. 당신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십시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위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변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것은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이클 몰리노스가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달콤한 멍에라고 결론짓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달콤한 일입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행복한 일입니다. 단테는 “그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In la sua voluntade e nostra pace)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평안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하면 우리에게 평화가 보장됩니다.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하려다가 우리의 평화도 빼앗깁니다. 존 번연은 영국이 낳은 훌륭한 청교도 목사였습니다. 그는 개신교인이 되었다는 구실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그의 생활은 너무나 경건하여 간수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간수가 그에게 와서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생활을 보니 목사님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시간을 드릴테니 잠시 감옥에서 나가서 사모님과 아이들을 가서 보시고 다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번연목사님도 이 말이 좋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와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내키지 않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감옥 문을 열고 스스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때 간수는 놀라 “목사님, 왜 돌아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번연목사님은 “당신은 허락했지만 하나님이 원치 않아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번연목사님이 감옥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왕이 보낸 사신이 감옥을 살피러 왔습니다. 특히 번연이 감옥에 잘 있는지를 보러온 것입니다. 이 때 가장 놀란 사람은 간수였습니다. 만일에 번연목사님이 댁에 가 있는 동안에 이 사신들이 왔다면 자신의 목은 달아났을 것입니다. 왕이 보낸 사신들이 돌아간 다음에 간수가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번연목사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제가 목사님께 다녀오시라 마라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허락하시면 언제든지 다녀오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면 실패나 후회가 없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확실하고 완전합니다. 주님의 뜻에 민감하십시오. 항상 “주님이 원하시면”이라고 물어보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면 지금 우리가 깨끗하여 집니다. 우리의 영도 육도 우리의 전 삶도 깨끗하게 됩니다.

민수기 6장의 아론의 축도를 보세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평강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건강입니다. 이번 한 주간의 삶 속에서도 순간순간 이 일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인가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절대로 실패나 후회가 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에게 대한 보호, 은혜, 평강, 건강의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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