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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누구신가? (행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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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1~2 
제목 /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특히 축제에 이어서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선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참으로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교회 밖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교회에 인도하려고 그처럼 수고하지 아니해도 몰려들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예배당 건물을 교회로 여기는 것처럼 말 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 가세요?”라고 물으면 “교회에 가요”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여 있는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함께 모인 무리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거기가 교회입니다.

교육관에 모여서 예배하면 거기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회관에 모이면 거기가 교회인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그곳이 우리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우리 주님이 계시면 거기가 바로 교회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하나님이 교회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밝은 예배와 흥겹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중심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순서는 조금 분위기를 밝게 할 수 있지마는 우리가 전달해주고 싶은 생명은 거기 있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활동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한 부분이 종교 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나의 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배하는 하는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닙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초대 선교사는 당대의 헬라의 유명한 도시 아테네를 방문했습니다. 이제 몇몇 친구들이 와서 사역을 함께 시작해야 되는데 아직 친구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네 시내 관광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거기에는 웅장한 신전이 남아 있습니다. 당대에는 훨씬 더 많은 신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곳곳마다 신들 앞에 제물을 바치는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이름을 가진 신들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한 제단을 보니까 거기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써놓았습니다.

사랑의 신, 전쟁의 신, 평화의 신, 치료의 신 할 것 없이 온갖 신들을 그들은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기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한 신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아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제단을 새겨서 만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알지 못하는 그 신이야 말로, 아직까지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그 신이야 말로 더 힘센 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테네의 시민들을 향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껏 알지 못하고 섬겼던 그 신을 오늘 내가 알게 해 주겠습니다”(행17:23)라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저도 지난 축제에 이어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제가할 사명은 지금껏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그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도록 해주는 것이 제 사명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도해보면 그게 그렇게 쉬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섯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성장해 오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 늘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기가 제가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우리 노대통령이 즐겨 쓰는 대로 여러분들 코드에 맞춰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오늘 설교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기왕 시작한 것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첫 선을 보러 나와서 데이트를 하러 나가서 그런 결심을 했대요. 내가 지금 만나는 이 여자를 적어도 열 번은 만나보고 결혼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겠다고.

그래요, 누구를 아내로 맞이할 것인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전자제품은 한번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한평생을 좌우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적어도 열 번을 만나보고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로 결심한 분은 잘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열 번 만나보고 결혼을 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한 평생을 좌우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숨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여러분이 누구를 하나님으로, 누구를 신으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자의 운명은 어떤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인생의 운명은 누구를 자기가 섬기는 신으로 모실 것인지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단지 여기서 우리가 사는 날 동안이 아니라 영원토록 영원한 죽음 다음의 여러분의 운명까지도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열 번도 나오지 않고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려고 아예 마음먹지 마십시오. 일을 좌우하는 문제에 열 번 시간을 들인다고 하면 한평생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이 문제는 정말로 여러분이 신중하게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사실 알려져 있지 않은 분입니다. 절대자, 궁극자 뭐 이런 표현들을 쓰기를 현대인들은 좋아합니다. 막연한 힘처럼, 막연한 영향처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있다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의 답답한 사연을 하소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초두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를 펼쳐도 마찬가지 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 시작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저의 모친이 83세이신데 어머니가 전화하는 것 보면 신통해요. 전화가 걸려오면 받아서 하시는 말씀이 “나다” 그런다고요. 그런데 상대방에서 그걸 알아듣습니다. 나는 속으로 신학을 제가 공부를 해서 그런지 ‘어머니 표현이 좀 과하시네요. 하나님만이 나는 “나다” 하실 수 있는 분인데 어찌 어머님이 “나다”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그게 통하더라고요.

진정으로 “나는 나다”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은 우리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내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올라가게 하리라”(출 3:17)고 선언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거”가 아니시고 “절대자”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우리 사정을 낱낱이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음조차도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요점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ꡓ 한곳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때 갑자기ꡒ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해졌다.ꡓ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별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물론 기도했지요. 정성을 들였지요. 그러나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 축제기간에 여러분이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앉아서 말씀 들으면서 꽃바구니를 들고 새로 온 사람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많이 졸이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아예 들어올 때부터 한번 가 주는데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번 가준다” 이거지요. 그래서 누가 말 조금이라도 잘못 붙이면 야단맞을 것처럼 그렇게 도도하게 나타납니다.

예배자리에 와서도 처음에 나와서는 다른 사람이 웃는데도 아예 웃지 않을 각오를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워낙 안민 교수님께서 시원시원스럽게 말하니까 다른 사람 다 웃는데 안 웃을 수는 없는가 봐요. 나중에는 같이 웃으면서 좀 풀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지켜보고 있는 모처럼 남편을 모시고 온 여 집사님들 보니까 정말 제가 딱하더군요. 제가 뭔가 도와줄 수 있으면 확실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제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저도 그냥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찾아오시기를 바라는게 그게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설치는 종교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최근에 ‘복있는사람’ 묵상하면서 웃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궤를 실어서 나르는데 소가 놀라서 법궤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붙들었습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치셨다고, 하나님이 죽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웃사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소가 뛰어서 법궤가 떨어지면 깨지니까 그걸 붙들고 싶었어요. 그러나 왜 하나님은 그를 죽이셨을까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붙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멋진 성전을 지으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어요. 선지자에게 이야기 했는데 선지지가 기도해 보지 않고 너무 감동해가지고 “임금님 잘 하셨습니다. 그동안 승리하셨고 왕궁도 지었으니 이제는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 짓는 것 잘 결심 하셨습니다.” 그러고 선지자가 갔는데 기도를 해보니까 하나님이 “No” 라고 합니다. “너는 아니다” 그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싶었어요.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내가 너를 붙잡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금으로 세워주는 분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설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의 말씀입니다.

다른 종교는 모두 죽은 신을 섬깁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 유교도 다를 바 없습니다. 불교 신도들에게는 찾아갈만한 신이 없습니다. “어휴 목사양반 모르는 소리 하시네, 초하루 보름 우리는 찾아갔는데..” 그래요 공양미 이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올라갈 때 말합디까? 내려올 때 말합니까? 온다고 고생했다고 올라갈 때 여러분에게 마음에 말씀합디까? 내려오는데 그래 네 소원 들어 주마 라고 확신을 주십디까? 일방통행입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쏟으면서 열반을 말하고 무아지경을 말하지만 내가 깨쳤다 그렇게 말하는 종교 아닙니까?

누군가가 찾아와서 만나줬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는 종교입니다. 일방 통행하던, 제 정성만 기울이던 종교에서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만나고 나서부터는 노래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 분위기를 좀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노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노래해야 될 사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찬양해야 될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인생은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명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모였다하면 그분을 노래하고 교회는 이와 같은 성가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한낮에도 어둠 속을 헤매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더듬는 사람들에게 주는 빛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여러분이 살면서 지으신 하나님과 등져서 행복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도 여러분은 출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등져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건 마치 집 주인하고 사이가 나빠서 그 집에 세들어 살면 행복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세상을 소유하시며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멀리 있는 신이 아니시고, 비인격적인 모호한 신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을 지으셨고 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눈에 파악을 못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여러분이 어떤 소원을 가지고 여기 오셨는지를 아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당신이 지은 세상을 바라보시고 당신이 보는 인생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이 땅에서 행하신 하나님의ꡒ큰일ꡓ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오늘 몇 가지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포기하시고 떠나신 분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지요? 정말 세상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면 어떻게 이렇게 비참한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마치 보면 그분이 만드셨다 하더라도 이제는 워낙 애를 먹여서 그냥 포기하고 떠나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만큼 세상은 난장판입니다.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다음부터 세상은 혼란 속에 빠져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을 회복할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북한 양반들은 주체 몇 년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야 말로 역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운명을 바꾸어 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행동했습니다.

한 뼘 땅이라도 더 늘려서 곡식을 심는 것이 인민들이 할일이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가보면요 오십 미터 백 미터 높이까지 개간을 다 했어요. 땅만 있으면 농사가 지어집니까? 산을 개간한 땅에는 물이 있어야 됩니다. 비가 내려줘야 되요. 그런데 비가 안 내리니까 아무 소용이 없지요. 가뭄이 95년 이후로 몇 년 동안 들어서 실농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산에 풀이 있고 나무가 있어야 물을 흡수할 수가 있습니다. 벌거숭이 산이니까 홍수가 나가지고 또 실농을 합니다.

남쪽에는 그해 농사 잘 지었는데, 자기들도 잘 지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하나님도 휴전선이 어디에 그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휴전선 북쪽에는 해일이 닥쳐가지고 농사를 실농했습니다. 그래서 95년 이후에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일컬어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일컽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동네마다 김일성을 신으로서 동상 만들어 세워놓고 인간 역사를 주체 몇 년이라고 가소롭게 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두고보시지는 않으시는 거지요. 인간은 오랜 세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것이 문명과 정치 활동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질서 가운데서 최대한 질서를 보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결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생이 범죄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그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분입니다. 이 과실만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것이라고 속삭였는데 거기에 넘어가서 과일을 먹었더니 밝아지긴 했는데 자기의 헐벗은 초라한 몸만 보게된 것입니다. 하나님같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숲속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생이 있는 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십니다. 내려 오셔서 남자와 여자에게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악함을 들어내시고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쫓아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이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이 없었더라면 생명 사랑 나눔 축제에 나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일에 관심이 있으시며,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며 하나님 활동의 역사입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죄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대신에 세상 물질을 섬기는 자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섬겨야 할 주인 대신에 지배해야할 세상을 섬기게 되는 것, 돈이 신이 된 세상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얼핏얼핏 들려오는 소식들 한번 보십시오. 도대체 사람이면 어떻게 그런 짓 합니까? 사람이면 어떻게 자기 시어머니를 죽여서 매장을 하는 이런 악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돈이 전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돈만 알고 살아가며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옛 세상을 한때는 홍수로 멸하셨습니다.세상에 홍수로 인간을 벌하셨습니다. 쓸어버리셨고 노아의 한 가족만 남겼습니다. 우리는 옛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픽션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역사의 이야기 입니다.홍수로 세상이 멸했다는 증거들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홍수 이후 잘난 인간들은 ꡒ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ꡓ고 스스로 격려했습니다(창 11:4). 구약의 바로 이 시기가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성을 쌓고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세우자고 합니다.

지금도 동일한 시도를 합니다. 게놈지도를 완성해서 모든 질병을 퇴치하자고 주장합니다. 인간배아를 복제해서,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 합니다. 우리의 과학지식으로 하늘에 닿는 대를 쌓으려 합니다. 우리는 곧바로 낙원에 살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모든 것을 혼란케 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악한 모든 성읍들을 무너뜨렀습니다. 돌무더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것은 한 면일 뿐입니다.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온통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셨어요. 보시고 불러내셨어요. “너는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110만 인구 가운데서 “너는 나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울산교회 예배의 자리에 불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름 받아 나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던 땅이 훨씬 펀안한 곳이지요. 어쩌면 한번도 시작해 보지 않은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ꡒ갈 바를 알지 못하고ꡓ떠났다고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이제 신앙생활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여러분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부르신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분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도우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한 속에 멀리 계시는 어떤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하면 대답하시는 그분이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여기 나와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아무 느낌도 없는 그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오늘 처음 나와서 앉아 있어보니까 봄날 교회 나와서 앉아 있는 게 쉽지 않다 이런 생각 들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안민교수 그 양반은 재미있는 연애이야기도 하고, 한번씩 멋진 노래도 불러주는데 저는 노래 부를 때마다 방송실에서 볼륨을 낮춰버리더라고요 이상하게.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 마음을 시원하게 할 노래 부를만한 상황이 되지 못하는 것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 참석한 여러분이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힘들게 느낀다고 하면 이 사람들 돈 주고 이 사람들 꾸어다 놓은 사람 들인 줄 압니까? 이 사람들 다 돈 내고 앉아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자기 돈 내 가면서 왜 여러분이 느끼듯이 힘든 자리에 나와서 앉아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아직까지 접선이 되지 않으니까, 불이 안 들어와서 여러분이 답답하게 느끼고 앉아있지마는 하나님하고 연결만 되면 그 때부터는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내고, 물질 드리고 노력하고 이래 정성들여서 우리가 나오지 오늘 여러분이 나와서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자리라고 하면 교회 벌써 텅텅 비었지요. 아무도 없지요. 저는 사람들 돈 주고 빌려올 만큼 재벌가도 아닙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보다 훨씬 더 멋지게 생기고 괜찮은 정말 사나이다운 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마 이 형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나라도 형 에서를 사랑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쪽이 훨씬 더 멋지고 괜찮은 남자처럼 느껴지니까 둘 다 자기가 낳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통하는 쪽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는 연세가 많아지고 보니까 축복을 해주고 세상을 떠나려고 하는데 틀림없이 아버지의 마음은 형한테 가있었어요. 형을 내 보내면서 “너 사냥해가지고 와서 요리를 해오너라 내가 먹고 내가 기분 좋게 너에게 마지막 축복을 해 주마”

해아래 비밀은 없으니까 엄마가 그 소식을 듣고는 둘째 아들을 위해서 멋진 요리를 해서 남편의 마음에 맞는 요리를 해서 드렸습니다. 문제는 목소리가 좀 다릅니다. 게다가 동생은 저처럼 맨들맨들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형은 아주 털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만져보면 목소리 통과하더라도 수상쩍어서 만져보면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들통 나면 어떻게 됩니까?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만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하는 말이 “저주는 다 내 몫으로 돌리고 팔에다 염소 가죽을 씌워서 들어가 그러면 아버지가 만져보고 털이 있으니까 축복해 주실거야” 그렇게 해서 축복은 받았지만 여러분이 형 같으면 어쩌겠어요? 기분 좋겠어요? 뒤에 고기를 가지고 왔는데 아버지께서 “아니 너는 누구냐? 나는 지금 잘 먹고 축복 해줄 것 다 해줬다. 남은 것 하나도 없다”말씀하셨습니다. “동생 야곱이 다 가로챘구나 아버지 눈만 감아봐 내가 살려두지 않을거야” 그렇게 결심을 했어요. 그러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먼 타향으로, 외가집 동네로 떠나갔습니다.

가다가 밤에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들판에서 자야지요. 폭신한 베게 대신에 돌을 하나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아주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야곱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ꡒ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展)이요 하나님의 문이로다ꡓ(창 28:17). 그랬습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들판에서 잠들었는데 여기가 바로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는 천국의 입구였다는 것을 내가 알지 못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을 만났다고 그는 외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모두 그런 역사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한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자생활 한지 벌써 40년 되었습니다. 한때는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당대의 최고 공부를 한 지성인이었습니다. 자기 민족 위한답시고 한번 성질을 부린 것이 좀 과했던 모양입니다. 사람을 쳐서 죽이고 그게 발각이 나서 더 이상 애굽 땅에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광야로 도망 간 것입니다. 다행이 딸 많은 집에 사위가 되어서 40년 동안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지만 그렇게 평생 살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덤불에 불이 활활 붙고 있는데 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들불이 났거니 하고 지나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불은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 것입니다. 한번 더 살펴보려고 갔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과학적인 사람입니다. “이게 뭐지? 도대체 무슨 현상이지?”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살펴보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 . .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4-6). “

깜짝 놀랐습니다. 이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이야기도 못 들었을 것이고, 이 일이 없었다면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간 이야기도, 여리고성이 왕창 무너진 이야기도 우리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일을 계획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세는 그냥 그렇게 말하자면 목자로서 평생 지내려고 각오한 사람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출 3:7). 그들이 그 반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정황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손 내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분, 그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 알기도 전에 하나님이 날 먼저 사랑했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송을 그래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지 않은지 400년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요단강 가에 있는 요한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 ꡒ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ꡓ(요 3:16).

우리 하나님은 성경에 보면 우리가 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뭘 언제든지 사랑하셨고, 하나님이 주셨고, 그런 이야기가 주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동하셨습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는 이제 끝맺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 초두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 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했고, 사람들은 그냥 모여서 앉아만 있는 거예요. 제가 축제 때 믿지 않는 여러분의 남편 옆에 앉아만 있었던 것처럼 별 도리가 없이 역시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 온 집에 가득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교회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정말로 아내는 사람 아닙니까? 한번 교회 모시고 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아양을 떨어서 데리고 오는데 정말 큰 벼슬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는 것 보면 속 상하죠.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알고 나니까 내가 어떤 수모를 당했어도 내가 믿는 이 좋은 하나님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가 알게 되기를 소원해서 그렇게 노력하지 않습니까? 모시고 왔지만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앉아있는 것 밖에는 저나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하늘로부터 임하는 역사입니다. 하늘에서 내밀어지는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져주실 때에 사람은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처음 나온 여러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정말 저는 올해 오십년 이상 믿는 사람들 세계에만 살다 보니까 코드가 첫날부터 잘 맞춰지지 않는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여러분, 저는 보니까 우리 교회 처음 나오셔서 제 말씀을 알아듣게 되어서 기뻐하는 사람들 지난 7년반 동안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제가 대책이 없는 사람도 사실 있습니다.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가운데 예배시간 마다 조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그 사람들은 대책이 없어요.그 사람들은 어쩌면 주님이 오셔도 그럴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말이죠 처음 오는 분들이 제 말을 알아듣고 좋아하고 삶이 변하는 이야기들 저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겸비한 마음만으로 기도하십시오. “내가 하나님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좀 알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밀쳐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움의 손을 내미는 사람을 절대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은 받아주었습니다.

여러분 왜 오래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잘 못 알아들을까요? 그건 배가 불러서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배가 부르면 아무 소리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대로 잘 믿고 살았고, 천국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뭘 그렇게 애쓸게 있습니까?

그러나 처음 나온 여러분들이 답답해하고 있는 마음 우리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러분이 답답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도 말씀 듣고 나도 이제는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데서부터 노래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소원 가지고 있으면 말해야 알아듣나요? 여러분 심정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왜 그랬을까요? “누구든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고 잘나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딴 이야기 하면 잘 알아듣는 사람이 교회 와서는 꾸벅꾸벅 하는 것 보면 이상하거든요. 절대 회의시간에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잖아요. 딴 것은 다 똑똑한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꽉 막혀있기 때문에 하나님 이야기를 하면 이게 안 들어가거든요.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위대한 사람들도 결국은 늙고 병들어서 쓰러져 가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번 축제에 왔다가만 갔지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짝 믿음을 하고 있는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만 맡겨놓았다면 우리는 사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만큼 했으면 했지 또 무엇을 더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 아는 사람으로 만드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배우자를 터치해 주시기만 하면 그도 오늘 우리처럼 하나님 예배할 수 있는 자리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요 3:16)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살 찢고 피 흘리게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구원받아야 하며 구원 받을 방안을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소식입니다.

여러분에게 선하라, 노력하라, 좀더 착하게 하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선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봤자 우리는 안 되는 줄 알면서 엉뚱한 짓을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에 달아놓고 노래를 하고 있는데 하늘의 하나님이 모르겠습니까?

착한 마음먹어도 안 되고 이건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도 엉뚱하게 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딜레마라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고 더 한번 노력해 보라고 말하지 않고 여기 답이 있다. 너희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선할 수 없다는 것을, 선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하나님이 그걸 모르시면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여러분도 알고 좌절하고 있는데 왜 하늘의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시고 타락한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그걸 모릅니까? 아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셨다”는 (눅 1:68)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우리에게 자신을 다잡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바르게살기 본부가 이 땅에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욕과 악한 욕망의 포로된 자들입니다. 희생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붙잡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을 붙잡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기독교는 능력입니다. 강한 바람입니다. 바람이 한번 부니까 그 두려워 떨던 사람들이 신앙의 용사들이 되어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일꾼들이 다 되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지으신 세상에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찾아오셔서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상황, 그것이 어떤 처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성경은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참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야곱은 브니엘이라고 하는 광야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그분을 여러분은 만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에게 닿을 때에 여러분은 감사하며 찬송하는 새로운 영역의 삶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길은 여러분 앞에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을 알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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