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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누구신가? (행 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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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14~36 
제목 :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신약 교회 첫 번째 설교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설교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 수 있는 설교입니다.

지난 축제 때 어떤 분이 교회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절에 열심히 다니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눈에 비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에 가면 돈 내고 절만 하고 오는데 비해서 교회에는 자기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고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시간, 간증들이 있어 참 좋았다” 이렇게 평가를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자기 종교에 대해서, 자기가 믿는 교리에 대해서 설명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자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와서 보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는 지나갔지만 사람들이 모두 여러 나라 방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은 흩어져 살던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한 온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고120 여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모여들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자기들이 태어난 곳 방언과 완벽한 액센트로 말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몇 가지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긍적적인 반응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꼭같은 상황에서 상당한 사람들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듣는 현상 앞에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말합니다. 놀라면서 무슨 현상인지를 정리하지 못하고 서로 서로 말합니다. “이 어찐 일이냐”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중립적인 사람이요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을 보아도 부정적인 말을 하기를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다고 감격하는 무리들 속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군!” 조롱하며 비하합니다.

여러분이 오순절 성령께서 내려오신 현장에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 세무리의 사람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요? 평소 여러분자신의 처신이나 습성을 가지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평가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입장은 덮어두고 눈치만 살핍니까? 아니면 언제나 비아냥거리는 부정적인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그 습성이 바로 이번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통해서도 표현되었을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입장에서 유보적인 입장으로, 유보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인 입장에로 나아가는 것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교회를 위해서도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베드로는 왜 설교했습니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뭔가 놀라운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맨 먼저 부정적인 평가를 한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소리를 높여서 묻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3시니” 지금 우리 시간으로 하면 아침 아홉 시입니다. 아침 아홉시에 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술취해 있는 것을 여러분 보신적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 들으신적 있습니까? 때가 아침 아홉시입니다. 이러니까 술 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드로는 답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라고 본격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거나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여러분도 이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십시오.

그는 “이는 곧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선지자 요엘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데, 저는 나사렛 예수라는 분으로만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것을 증명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윗을 길게 인용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미리 보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기”(29절) 때문에 다윗의 말은 그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육체가 썩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 들어간 육체는 썩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무릇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임을 당하지 아니하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니라그 묘가 오늘까지 있는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썩지 아니함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거기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33절)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제게는 한 가지 설명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보고 들은 이 사실은 예수님, 여러분이 목격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베드로처럼, 설교를 통해서 저는 이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회상시키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나사렛 예수도 역사적 인물입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16절). 그는 수세기 전에 살았던 선지자를 인용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예언의 성취라는 것은 이 설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훨씬 나중에, 편지를 쓰면서 이 놀라운 구원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두 번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곧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었던 바를 확실하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죽게 되겠지만 죽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들은 진리를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그렇게 질문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까?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셨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ꡓ첫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을때는 바울은 자신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 그의 부활하신 모습을 본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는 오백여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직도 태반이나 살아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본 사람들은 다 사라져 갔습니다. 베드로가 편지를 쓸때 쯤 되어서는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예수를 사랑하지만 눈으로 본적은 없다고 그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미 베드로가 살아있을 그때에 육신의 눈으로 예수를 본 적이 없지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새로운 시대가 닥쳐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내 이 귀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던 그 순간에 나는 야고보와 요한과 더불어서 친히 그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묘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이 꾸며 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고난을 당했고 앞으로도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남다른 고통 가운데서 세상을 떠날 것을 말해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편지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귀로 들은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지만 그것들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 증언을 믿지 못하겠고 내 증거를 믿지 못하겠다면, 여기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기록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말년에 베드로는 자신의 오순절 첫 설교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ꡒ너희도 아는 바에 . .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ꡓ라고 상기시키고,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라고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특별히 두 사람의 선지자를 들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엘과 선지자 다윗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요엘의 말한바가 성취된 것이고 다윗이 이야기한 바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 여기 논지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태어나기 수세기 전에 다양한 사람들이 장차 구원자 오실 것을 말했고, 그 예언대로 예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죽었고,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분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었고 문서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제가 믿는 기독교의 근본입니다. 도대체 여러분과 저는 무엇에 근거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언이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베드로의 마지막 편지에 나옵니다. 그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20). 이것은 어느 누구도 예언을 단순히 생각이나 상상력을 동원해서 쓴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선지자가 그저 앉아서 인생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로 인생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번득이는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입니다. 다른 종교는 한 인간의 깨달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가 깨달은 바를 전하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모든 세상적인 진리는 탐구해서 규명하는 진리입니다. 리서치 해서 알게된 진리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진리입니다. 나타내신 진리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예언이란 하나님께 받아서 전한 말입니다.

모든 것 뒤에 계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시며 모든 것을 알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선지자들은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역자 가운데 한 사람은 회의를 할 때 하는 말이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할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요 오셔서 모든 예언을 이루신 분입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거라고 열한 사도와 베드로가 함께 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께서 오셔서 너희들 가운데서 선한 일을 하시고 기적을 베푼신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고 그들을 다그쳤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주장하고 논쟁하는 철학적인 “미지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을 나타내시며 지식을 주시고 정보를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주시면서, 세상을 향한 큰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합니다. 다른 희망은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하나님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짓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역사를 어디로 몰아가야 할 것인지를 정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주님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율법없는 로마 사람들이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라고 그들을 다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기독교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가 우연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진 시행착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원대한 목표의 한 부분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오신 방문자 여러분, 수백 년 전 당신의 계획을 계시하신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여 가십니다. 그 계획을 이루고, 그 계획의 일부로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원한 계획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요엘 인용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영원한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거스리고 그분께 범죄 했으므로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영원한 형벌로부터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지식을 가지기 위해 구원받습니다. 새로우며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영원한 영광으로 이어지는 새 삶을 위해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교회 와서 찬송은 따라 부르는데 전혀 찬송하는 기쁨이 마음에 없으면 여러분 아직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않은 겁니다. 와서 그냥 몇 달 교회 다니다 보면 자기가 신앙생활 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십년이든 이십년이든 마찬가지 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마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가 여러분에게 갖추어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직도 믿음 밖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찬양할 이유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가대가 있고, 그러기에 회중이 함께 찬양을 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웃음의 감사가 있어야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선포 될 때에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기간이 무엇을 보증해 주진 않습니다. 오늘 처음 이 자리에 나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10년을 나와도 나와서 끈질기게 앉아서 졸고만 가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볼륨 좋은 스피커를 가지고도 제가 7년 반 동안 말해도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한 아기가 베들레헴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 예배하면서 동정녀 마리에게 잉태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구원자. 오실 메시아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셔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고 “나를 따르라, 나를 본 받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까? 감사하게도,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자는 단순히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그러면 너희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고 교회에 발을 디딥니다.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 이제부터 나도 종교를 하나 가지자. 교회 나가서 내가 마음을 다잡고 새로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와서도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하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을 다잡아 먹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더러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들려주는 종교입니다. 수 백년 전에 예언하셨고, 예언대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우리의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당신이 보낸 아들이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죽은 그분은 사흘 만에 살려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죽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하나님이 사망에서부터 그를 풀어서 살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육체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음에 매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죽음에 매어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께서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그분은 사망의 결박을 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의 결박과 권세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를 지어서 죄인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악습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 어쩔 수 없는 한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며, 오늘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계획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이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지한 군중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망치질 하는 그 순간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원수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분을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을 보면서 예수 이야기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노예된 사람들을 해방 시키셨습니다. 지옥의 문이 열렸고 인간과 마귀는 가장 극악한 짓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박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이것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여러분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그를 죽였지만 그는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다시 살리셔서 여러분의 구원자로서 여러분의 주인으로서 우뚝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첫날 베드로의 설교였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렛 예수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는 사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피해가십니까? 왜 이런일이 일어났습니까? 수백년 전에 태어날 것을 예언했고, 예언대로 태어나서 예언을 모두 성취한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어야 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르지만 한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우리 모두는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오늘의 삶을 결정할 것이고, 영원한 운명을 결판낼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구원자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것은 빌라도의 고민만이 아닌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는 예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태어나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3년이라고, 서기 2003년이라고 말하지만 좀더 풀이하면 주님의 연대 안에 들어있는 2003년 입니다. 주님의 통치아래 들어온 2003년이라고 우리는 헤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서기 2003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한 사람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그분을 중심으로 그분이 오시기 전과, 그분이 오신 후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중심에 서신 그분에 대해서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아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유능한가, 재능이 있는가는 별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배웠는가 무지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일단 나오시면 지금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인간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서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이 진리 앞에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되는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대성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로부터 도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히는 바에 따라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거부하든지 받아들이든지 결단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선지자들은 그의 오실 일에 대해서 미리 예언을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을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까? 그 죽음이 여러분과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에 여러분이 답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예수께서 구원자라는 사실과 그들을 위해서 되어진 예언에 대해서 직면하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죽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어둠과 죄의 비극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죽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역사와 진리 앞에 바로 서셔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셔야 합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이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한 결단이 있어야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눅 19:10).

그분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막 10:45).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언의 성취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셔서 새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분을 여러분의 마음에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예언의 성취대로 오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구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하는 신자의 삶의 자리로 들어오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세상이 할 수 없는 기쁨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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