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아론의 속죄제사보다 훨씬 더 존귀합니다 ..

  • 잡초 잡초
  • 461
  • 0

첨부 1




   

분문 : 히 4:14 - 5:10
제목 :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아론의 속죄제사보다 훨씬 더 존귀합니다. 


히브리서의 두 주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와 또 예수를 믿는 믿음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자연스럽게 전반부에서 강조하여 설명하는 것은 첫 번째 질문,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강조하는 두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백성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신분을 지칭하고 제사장은 죄인의 편에 서시는 인간 예수님의 역할을 지칭합니다.

히브리서 1-4장까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선지자, 천사,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뛰어나고 존귀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계시자요 사도요,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자이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계시자, 사도, 인도자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지자들보다 온전한 계시를 주셨으며 아들의 신분으로서 천사들보다 존귀한 충성을 드리셨으며, 아들의 지위로서 모세보다 탁월한 지도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여 깨우치면서 반복해서 강조한 멧세지는 "그러므로 한눈 팔지 말고 예수님 말씀 잘 들어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히4:14절부터는, 칼로 베듯이 딱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여 보여 줍니다. 대제사장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은 한번만 읽어도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하나님과 동등이신 예수님의 신성의 존귀함을 강조하였다면,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연약한 죄인의 편에 서셔서 인간들과 함께 하며 죄인을 위하시는 예수님의 인성의 사랑을 돋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놀라운 사랑의 위대한 대제사장(great high priest)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제사장의 역할로서, 예수님은 인간 제사장들,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레위 지파의 직무라고 일컫는 제사장, 제사장이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5:1-4>에서 제사장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밝혀 줍니다. 제사장이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무나 제사를 드리면 되지 않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사의 요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용서와 화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정해야 하고 사람의 모습도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4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했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합니다. 또 <1,2절> 사람 가운데서 취하고.. 사람을 위하여,,사람을 대표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요새 북한 핵을 둘러싼 갈등이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뉴스거리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민족의 장래가 달린 중요한 사안입니다.

1994년,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을 때, 북한과 미국을 중재했던 사람이 빌리 그레함 목사와 지미 카터 집사였습니다. 이 두사람은 김일성이 북한의 입장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이한, 정직한 미국인으로 신뢰를 받았습니다. 또 이사람들은 당시 미국 정부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재자,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층에게는 다른 미국의 관리들, 학자들, 이들은 다 똑같은"미국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재자는 양쪽의 인정을 다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찬가지입니다. 백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 수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레위 제사장들, 그 중에서도 뽑은 대제사장들도, 연약한 인간, 이미 죄를 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의 역할, 용서와 화해의 중재자로서 온전한 역할을 하기에는 자격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무식하고 연약한 인간의 심정, 죄짐을 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면에서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죄의 용서를 구하는 하나님 앞에 나서기에는 자기도 떳떳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앞서 무엇을 먼저 합니까?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먼저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장의 용서와 화해의 제사는 효력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좇은 인간 제사장들과 사뭇 다름을, 히브리서 기자는 깨우쳐 줍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인간들에게 어떤 대제사장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특징,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세우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입니다<5,6,10절>.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세우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입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나 예수님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른 인간 제사장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제사장인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세우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냐? 이 사람은 성서속의 베일에 가려진 존재입니다. 후에 7장 강해할 때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고 오늘 맥락에서의 요지는,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 레위 지파의 계보를 좇은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고 보내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차순에 따라 임명된 일반 검사보다 대통령이 직접 동의선택, 임명한 특별 검사가 훨씬 더 권위가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앞에서 인간 제사장은, 제사장으로서의 능력이 한계가 있는 데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인간 편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용서와 화해의 요청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확실한 능력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 죄가 나를 고발해, 좀 어느 그늘에 피하고 싶은데, 인간 제사장은 의지를 하고 싶어도 나랑 똑같이 흠많고 허물이 있은지라, 온전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예습을 안해와서, 예습을 잘 해왔겠거니, 범생이처럼 보이는 형제 옆에 앉아서 도움을 좀 받으려고 했는데, 가서 보니 똑같이 예습을 안해왔으면 실망스럽고 난감합니다, 별 도움이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흠없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그 품에 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속죄, 죄의 용서와 화해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흠없는 자격을 갖춘 분이십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것은 온전한 죄사함의 중보자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죄많고 흠많은 우리가 넉넉히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우리가 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대어 봐야 아무런 능력없는, 똑같은 죄인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능력의 확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2.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4:14,15>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14절>의 체휼이라는 말은 영어로 understand, 이해한다, 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의지하고 기대는 대제사장이 우리 사정을 전혀 모른다면, 우리 연약함을 전혀 모른다면, 우리를 향하여"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죄를 지을 수가 있냐? 죄값을 치루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돌변할 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죄를 짓고야 마는 인간의 처절한 연약함, 속마음의 아픔을 만져주지 못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난에 대한 작문을 하게 하였습니다. 한 학생의 작문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빠도 가난했고 엄마도 가난했다, 오빠도 가난했고 언니도 가난했다, 청소부도 가난했다, 요리사도 가난했다, 정원사도 가난했다, 운전사도 가난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가난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정 떨어지지요.
예수님 당시의 일반 사람들이 바리새 종교인들을 향하여 이와 비슷한 정서를 느꼈을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중재자로서, 대표격인 제사장으로 선다는 것은 마음 닫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제사장이라면, 정 떨어집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의지할 수 밖에 없지만,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겪는 무서리치는 죄의 유혹들, 그 유혹앞에서 처절하게 갈등하는 우리의 심정, 때로 허무하게 죄에 무너져 내리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예수님은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목수 생활은 오늘날의 영업사원처럼, 발품을 팔아야 하는, 동네마다 집집마다 수리가 필요로 하는 집을 호객하며 찾아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방문하시며 인간의 삶의 현장을 목도하시는, 목수로서의 예수님의 생활은 인생의 진실과 인간의 연약함을 생생하게 체험케 하는 한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사흘 굶으면 도둑 안되는 사람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배고픔, 추위, 갈증, 따돌림, 멸시와 같은 고단한 삶의 질곡을 경험하셨으며 그 가운데 초라하게 느껴지는 인생의 심정을 아시며, 외로움을 아시며, 멸시받을 때에 분노가 화산처럼 치솟아 오르는 것을 아시며, 욕망이 끝없이 충동하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소아백혈병은 못 고치는 병은 아닙니다.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고 어린아이가 몹시도 고통스러운 투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난치병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골수 주사를 맞을 때면 아이가 거의 자지러집니다. 그래서 아이의 눈에는 자신을 치료해 주러 오는 의사가 반가운 것이 아니라 저승사자처럼 무섭게 느껴집니다. 의사만 보면 도망가고 숨고 하곤 합니다.

순천향 병원에 소아백혈병을 전공하는 한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 의사로부터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조금 큰 아이들은 이 의사를 좋아합니다. 물론 이 의사가 골수주사를 안아프게 놓는 마술적 재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이 인턴의사 역시 어렸을 때, 소아백혈병을 앓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골수주사를 맞는 아픔을 압니다. 자신이 그 아픔을 체험했기에, 한 마디 건네는 위로의 말도 그 정감이 확연하게 다르게 아이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달려 갑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요, 홀애비 심정 과부가 안다고 하듯이, 교도소 안에서 죄수들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듯이,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듯이,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먹고 살기도 만만치 않은 세상의 찬바람을 아시며, 죄인들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관계의 피곤함을 아시며, 어떻게 그렇게 나의 연약한 부분을 골라서 찾아와 매혹적인 유혹을 뻗치는지  사단의 유혹을 아시며 그 앞에 흔들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 예수님이기에...우리는 예수님께 가까이 친밀함으로써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아십니다. 당신 스스로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다른 사람은 알아주는 척 애쓰기까지는 하여도 아무도 몰라주는 당신의 마음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그 마음까지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 예수님이시라면,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3.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주신 예수님이십니다<5:7-9>.

셋째로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7-9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에, 어느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겠습니까? 외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써서 기도하신 그 때, 왜 예수님은 그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화목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당신의 마음에도 형언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하나님의 뜻에의 순종은 그냥 쉽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뒤집어써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 수없이 많이 예수님의 마음에도 충동질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아버지는 꼭 이렇게 하셔야 하는가?"

예수님, 당신이 이 땅에서 초라한 인간들이 오만한 멸시를 받을 때마다, 한낱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에게 손가락질과 비웃음의 화살을 느낄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리심으로 인간의 성질대로 행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에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비웃음과 비난을 받으셨다면, 밤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마음의 갈등을 담은 스펀지를 짜내는, 간구와 소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마다 예수님은 다시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수치와 멸시를 받으며 치를 떨치게 하는 군중들의 분노와 기가 막히게 억울한 제자들의 배반 속에서 아무런 대항이 없이 외롭게 죽어야 하는 전날 밤, 그 밤은 어느 때보다 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서, 인간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런 정서를 누르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의 마음으로 당신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7절>의 '경외하심'은 영어로 번역된 것에 의하면, reverent submission, 경외함으로 드리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순종, 죽기까지의 순종 그렇게 자연스럽게 감정이 흐르는대로 쉽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과 통곡의 마음풀이가 있고서. 여전히 감정과 정서로는 내키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을 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은 어렵게 사시다가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서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온전한 화해의 은혜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죄범한 인간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죄사함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 진통을 거친 순종의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누립니다.

죄가 용서받은, 더 이상 양심에 정죄함이 없이 용서받은 자유를 누리며, 미래의 불길한 공포에서 해방되어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바라보며 오늘도 세상을 이기며 거슬러 올라가며 살아가는 능력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에 이은 순종, 그 순종의 제사가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준 구원의 은혜입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면, 자린고비 할머니 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하루에 두끼밖에 안먹습니다. 밥도 날마다 계란 비빔밥만 먹습니다. 그렇게 억척같이 모아서 이 할머니, 등록금이 없는 대학생들 장학금을 줍니다.

장학금을 받아 이제 취직을 한 할머니장학생들이 일년에 한번씩은 꼭 함께 찾아와서 인사를 드립니다. 할머니의 최대의 낙이 장학생들이 찾아오는 날입니다. 그리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드립니다. 이 학생들이 찾아옴이 당연하지요. 또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사람의 예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우리의 영원의 운명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감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예수님이시라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감이 복이고 또 마땅한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1992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였었습니다. 그동안 막혀 있던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구경을 하고자 하도 많이 몰려 오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통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 이전에는 죽음이었는데 이제는 긍휼하심을 입어서 당당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 나아가 이미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사랑을 드림도 마땅하고 즐거움이거늘,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나아갈 때마다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4:15>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예수님의 구원은 지옥에서 면제받는 그 미래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이 필요로 할 때마다, 기꺼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욕망은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욕망을 채워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약속해 주셨지만, 편리는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행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지만, 불편하지 않게 인도하시겠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약속해 주셨지만 쾌락을 약속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강인한 마음을 약속해 주셨지 강팍한 마음을 약속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직하게 사는 삶을 인도하신다고 하였지 세상에서 처신을 잘하는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 멋있는 사람을 약속하셨지 멋부리는 사람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오만하게 하고 눈을 멀게 하는 욕망의 충족이 예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영적이고 질적이고 실재적인 필요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그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예수님은 넉넉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부릅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담대히 나아오도록 초청합니다. 담대히라는 성경원어의 의미에는 자유롭게(freely), 기쁘고 신나게(joyous)와 같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기쁘고 신나게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라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배의식을 드리러 온 이 공간, 순간에도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브러더 로랜스처럼 설거지를 하면서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심령이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보다 더 구체적인 측면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마11:28-30>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구체적은 행동은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관계를 맺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한 구절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믿는 도리(신앙고백)를 굳게 잡을지어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능력의 예수님, 그 예수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맨 사람임을,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당신의 심령이 늘 기억하십시오. 바라보십시오. 주인님께 아뢰십시오.

영원한 죄사함과 영생을 약속해 주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그 심령으로 고백하며 붙드는 당신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흠없고 죄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넉넉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와 똑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겪으신 분이기에 우리는  친밀함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의 산고를 거쳐 죽기까지 순종하신, 친히 희생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사랑이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분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분의 은혜를 기리고 은혜의 뜻에 우리도 따르기 위하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당신도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당신에게도 넉넉한 피난처가 되시며 당신을 아시며 당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