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만난 사람 (왕하 5:1-18)

  • 잡초 잡초
  • 262
  • 0

첨부 1



Subject  하나님을 만난 사람 (왕하 5:1-18)

지금부터 20년전인 1984년 1월에 미국 정가에는 한 정치인의 충격적인 은퇴선언이 있었습니다. 메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이며 장차 미 합중국의 부통령후보로, 그리고 대통령후보로 진출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폴 송가스 의원이 현직에서 사퇴할 것은 물론, 앞으로의 어떤 선거에도 일체 출마하지 않겠다는 은퇴 선언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 발표로 전 미국의 정가가 술렁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후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런 선언을 했는지를 알고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가 임파선 암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유망한 정치인의 퇴장을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의 병을 알아본 결과, 그 병은 완쾌는 안되지만 치료는 할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병의 상태는 그가 정치인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나, 그의 수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의원직을 사퇴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송가스 의원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은퇴를 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어서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송가스의원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내 병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아네. 그러나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네. 단순하지만, 그러나 가장 분명한 그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산거지. 그리고 생각했네. 영원하지 않은 내가 해야할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어. 국가의 법을 바꾼다든지 역사책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열심히 자신의 세속적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이건 참 어이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시간이 유한함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고 생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의 절실함을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한한 줄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짜 중요한 가치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간이 유한하고,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생명이 유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눈에 들어오는 법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폐암판정을 받고 난 뒤에 했던 말도 이와 유사합니다. "가장 아쉬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왜 내가 건강했을 때에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희생만 시켰을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기절정의 코미디언으로 돈을 한없이 벌고, 명예와 인기로 둘러 싸여 있었을 때에는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비로소 인생의 소중한 것에 대해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을 특징짓는 단어를 딱 한가지 말해 보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조금도 서슴없이 그건 '유한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 사람에게 있습니까? 시간에 있어서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 영원이고, 능력과 자원에 있어서 유한함을 뛰어 넘는 것이 무한입니다.

그런데 무한이나 영원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유한하고 한계를 가진 인간은 그러므로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안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받은 삶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지 못하고, 마치 스스로 다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자기 힘과 자기 의지, 그리고 이 세상의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그것만 소유하고 있으면, 하나님없이도 얼마든지 영원하고 전능하게 살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을 한번 보세요. 인간이 전능합니까? 인간은 항상 부족함과 한계에 쫓겨서 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삶의 문제와 고통이 온 것 아닙니까?
인간에게 시간이 무한하다면 왜 우리가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능력이 무한하다면 왜 먹고 사는 것에 집착하겠으며, 자원이 무한정있다면 왜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인간에게 있는 모든 문제와 고통의 근원에는 이 유한함의 문제를 하나님없이 풀어보려고 하는데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서로 부족하고 유한하니까 그 유한함을 메꾸어 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다가 그 부족함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압제는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부족한 나의 자원을 채우기 위해서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를 해서라도 내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는 이기심이 사회 곳곳에 억압과 압제를 낳습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고 할까요? 자신의 자원이 부족함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 돈이라는 것을 무한정 확보하면 내 안전과 평안함을 이룰 수 있는 줄로 알기 때문에,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는겁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정도면 안 되었나'...싶은데 자기는 '아직도 부족하다.조금만더 조금만더'..하고 말하는것이지요.

인간의 끝없는 탐욕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유한한 본질에서 우러나온 현상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유한함입니다. 유한함을 이 땅의 유한한 것들로 채워 보려고 하는 인간의 깊은 이기심이, 우리 삶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 지혜는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출발합니다. '나는 한계를 가졌고, 나는 부족하며, 나는 언젠가 끝이 있는 존재다'고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것들로 그 부족을 채워볼까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앞으로 나아갈 때 삶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에 있어서 한계를 느껴보셨습니까? 결코 내가 영원하지 않은 존재이며, 내가 내 힘과 내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이땅에는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십니까?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문제들은, 사실은 내가 결코 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깊이 깨닫게 하는 소중한 도구가 됩니다.
왜 우리 인생에는 고난이 끝이 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문제는 끊임없이 내 삶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고, 그 고난과 문제를 통해서 인생문제의 해결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정한 생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났거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낙담하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으세요. 자신이 한계를 가진 유한한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고백하세요. 전능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무능하며, 완전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인하십시오. 하나님은 문제앞에서 우리가 그 소중한 지혜를 깨닫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도의 믿음입니다.
//
오늘 본문에는 문제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나아만입니다. 그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절
1)아람왕의 군대장관
2)그 주인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
3)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

한 마디로 그는 아람제국의 영웅이었습니다. 군대장관으로서 권세를 가졌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명예와 부를 한 몸에 가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족함이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무서울 게 있겠습니까?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All things are possible! 다 가능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어느날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1절 하반절에 "문둥병자라".....문둥병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문둥병은 요즘의 암이나 에이즈같은 불치의 병입니다. 더군다나 이 병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 것으로 여겨져서 이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대책은 오직 하나 사람들로 부터 격리를 시켜놓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게 되면 이 사람은 육체적으로 온 몸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을 받는 것과 아울러서,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완전히 격리가 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이 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나아만에게 이런 몹쓸병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이 만난 문제를 스스로 힘으로 풀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쌓아올렸던 돈이나 권세나 명예와 같은 것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힘을 넘어서는 문제를 만나기까지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문제를 만나기까지는 적어도 돈이 있고, 자신의 힘과 자기 의지만 열심히 가지면 못할게 없는 줄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 문둥병의 문제를 만나고 나니까 그동안 자기가 힘으로 믿고 의지하고 살았던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얼마나 무의미하며 얼마나 무기력한 것들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능자가 아니요, 한계를 가진 한 인간에 불과하며, 내가 그동안 든든하게 여기던 것들 조차도, 내 한계를 벗어난 이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까 그는 겸손해졌습니다. 2절-4절을 보세요.
이전에 건강했을 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람제국의 영웅 나아만이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자기가 전에 포로로 잡아왔던 이스라엘의 한 작은 계집아이의 말에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자기 자신이 쌓아왔던 것들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는 말이고, 동시에 그 마음이 포로로 잡힌 계집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겸손하고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만날 수 있습니까? 겸손한 자...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겸손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나는 무력하며,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나는 지극히 유한하며,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나는 지극히 짧은 생을 가진 인간에 불과한 것임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이 겸손이 있고라야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부딪히는 고비앞에서 자기의 얼마 안되는 힘을 가지고 그걸 해결해 보겠다고 애쓰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무한과 풍요로 여러분의 부족과 한계를 채워가십시오. 거기에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렇게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오는 나아만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두 번째 관문앞에 서게 하십니다.
9절-11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 선지자 엘리사의 집 문앞에 섰는데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이 말 앞에 나아만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11절

'내 생각에는....'----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보니까 엘리사의 말이 터무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까짓 말 들으러 여기까지 온 것 같으면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나아만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 해결 못하니까 하나님앞으로 나아온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는 또다시 자기의 생각을 절대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은 반드시 하나님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올 때 자기를 포기하고 왔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도 계속 자기를 포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하신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했더니 결코 해결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문둥병을 깨끗하게 치료하고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올 때의 겸손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까지 계속 이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권능을 힘입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하나님앞에 실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겸손히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내 삶의 안전과 평강이 달렸음을 믿고 끝까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부족함과 무력함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에 참예하며 하나님의 무한과 영원의 세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무한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인정하십시오. 나의 무능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전능을 힘입기 원한다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하게 간구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으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도 끝까지 겸손하십시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을 맞추어 가십시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체험합니다. 전능하신 은혜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문둥병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 나아만처럼 여러분 삶을 괴롭히는 문제들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권능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