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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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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오늘은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에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데는 퇴폐한 도시였습니다. 이 성경이 쓰여지기 전 700년에 사데는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루디아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당대에 제일 강한 나라였습니다. 부요한 나라였습니다. 그가 있는 동안에 헬라는 강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헬라의 비극의 작가 애스킬러스는 루디아왕은 헬라인에게 멍에를 메우라는 위협을 감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데는 헬머스 강 골짜기 평원에 위치했는데 에베소, 서머나, 두아디라, 빌라델비아가 사방으로 같은 거리에 포위하고  있습니다. 평원 북쪽에는 산이 있었습니다. 그 산에서 앞으로 박차처럼 고원지들이 생겼는데 그 위에 사데성이 약200미터 높이 앉았습니다. 사데는 망대처럼 높이 앉아 헬머스골짜기를 지키는 파수꾼 같았습니다.  난공불락의 자세를 자랑했습니다. 도시가 발전되는 대로 고지에는 산성을 쌓고 그 밑으로 시가지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데의 부요는 전설적으로 유명합니다. 산 밑의 도시가 가히 절경이었답니다. 헤라어의 살레이데스는 곧 산위의 도시와 산 밑의 도시로 복수입니다. 사데의 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누구나 죽기 전에 사데를 보지 않고 죽은 사람은 정말 살았다는 이름뿐이라 했습니다. 그 만큼 사데가 유명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가 문제였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사데는 정말 육신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신은 죽은 것입니다. 신약은 흔히 죄와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목회서신에 “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딤전5장6절) 탕자가 집에 돌아 왔을 때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누가복음15장24절) 라 했습니다.

로마의 신도들은 예수님을 주로 섬기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가 되라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죄는 의지의 죽음입니다. 사람이 범죄의 유혹을 계속 받으면 결국은 죽음입니다. 악습이 자라고 자라 아무리 그것을 끊어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제 이의 천성이라 합니다. 죄에 깊이 빠져 아무리 그 죄가 밉고, 진저리가 나도 거기서 헤어 날 수가 없습니다. 세네카의 말대로 ‘ 사람이 그 죄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된다” 고 했습니다. 결국은 죄의 종이 되어 그 세력 밑에 드는 것입니다. 어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기에 애 써본 경험이 없는 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첫 번 범죄에는 많은 주저와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죄의 힘이란 하도 세어서 결국은 사람의 의지를 죽이고 맙니다. 마비시킵니다.

다음은 감정이 죽음입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은 밤사이에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 범죄에는 많은 주저와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첫 번 교회 주일을 범합니다. 목사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물론 하나님에게 부끄럽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합니다. 그러나 이게 몇 번 지나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너무 당당해 집니다. 처음은 자신에게 다짐합니다. 다시는 주일을 법하지 말아야지 합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지나면 어느 사이에 면역이 생깁니다. 결국은 주저함도 없어집니다. 양심의 가책도 온데간데없어집니다. 이런 것을 감정의 죽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유감없이 의당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방송국에서 이러 한 통계를 말 합디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얼마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약 20프로라 합니다.

한국 전 인구의 종교인 수는 얼마인가를 어느 방송국과 리서치 회사에서 조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 인구의 50%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50%가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절반의 비 종교인 중에 과거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상당하답니다. 그 절반이 교회에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우리 다시 생각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그 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한 이유도 됩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가져가 버립니다.

그 다음이 우리의 정서를 굳게 무감각하게 합니다. 죄의 비극은 죄가 사람의 최고 본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움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가 무섭다는 것은 죄가 사람의 가장 아음다운 것을 가장 흉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최고의 욕망이 세력욕으로 변합니다. 사랑의 욕구가 미움으로 변합니다. 죄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죄는 마약입니다. 죄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죽여 버립니다. 우리가 죄에 정복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그 죄를  어기고 해방되게 합니다. 사실은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주 당하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서가 죄 하나로 연결 한다면 우리는 정말 비극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우리 어때요 아무런 재미도 없고 마치 석고 인간 같다면 우리는 걱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 정서가 늘 행복해야 합니다. 사람은 심장이 멎으면 그는 사람으로서의 가능이 멈춘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에서 사람이 산소호흡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는 사람,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감각이 없는 그런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런 사람은 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합니다. 그 기능이 제대로 못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사데 교회는 이방 신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요하고 방탕했습니다. 무서운 지진으로 도시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황제의 후의로 다시 건설된 도시입니다.

사데교회는 그 풍성함 보다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이 덕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겉은 아주 그럴싸했습니다. 그러나 덕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내용이 없는 껍데기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았다 하는 이름뿐인 교회라 하신 것입니다. 네가 산 것 같으나 사실은 죽었다 하십니다. 크리스천의 생활과 성취의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기대 하시는 것은 내용입니다. 이름만의 교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양적인 부흥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질적인 데로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양은 대단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중에 무려 다섯이나 우리나라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어떻습니까. 사회가 알아줍니까. 교인이라면 보증수표처럼 인정해 줍니까. 시장에서도 교인이라면 초면이라도 외상을 줍니까. 예수 믿는다면 무슨 거래를 할 때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아도 거래가 가능합니까. 아니지요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일 때 예수 믿는 목사 장로는 이름 그대로 교회에서만 목사 장로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에서도 대단한 신분상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인도 일반 사람과 똑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는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은 회사에서 체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너무 따진다는 것입니다. 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사회의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인들이 넘쳐 나는데 사회가 왜 이 모양입니까.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싸우고 멱살잡고 고소하고 정말 부끄러운 일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교인은 더 이상 이 사회의 모범생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릅니까. 기도를 못합니까. 전도를 못합니까. 다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았다 하는 이름뿐이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사데교회가 아니지 모릅니다. 겉만 본 사데 교회는 대단 했습니다 몇 번이나 지진으로 무너진 교회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이었습니다. 건물이 아닌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의 생활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 문제였습니다. 속은 다 썩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신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데 교회는 그 것을 몰랐습니다. 겉만 화려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바리세인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존경 받아 온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이미 죽은 믿음이었습니다.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러고도 어떻게 너희가 지도자가 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떨는지 한 번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몇 년 전에 “ 한국 교회 이래도 되는가” 라는 책이 나온 것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사회에 끼친 공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쁜 것을 보여 준 것도 대단히 많다는 것입니다. 한 때는 교회들이 앞 다투어 건물을 높이 올리고 수양관이다, 대형 버스다, 하고 양적 성장을 과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봉고 하면 교회 차였습니다, 그리고 차에다 아주 크게 아무 아무 교회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위반을 너무 많이 해서 많은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교회의 본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교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각성이 꼭 필요 합니다. 이 말씀이 곧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는 늘 이 사데교회처럼 이름만의 교인이 아닌지 늘 살펴야 합니다.

맺는 말

오늘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요.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 잘 아시지요. 이 세상에서의 소금이라 하신 것입니다. 바리세인 정말 그들은 그 사회에서 빛입니다. 소금입니다. 성경 많이 알지요. 기도 많이 하지요. 헌금 잘 하지요. 구제 많이 하지요. 어느 구석에 존경 받지 못할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어느 하나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세인과 서기관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보신 것일까요. 겉이 아니었습니다. 속이었습니다. 진실이 문제였습니다. 입으로야 사랑 사랑하지요. 그러나 속에 칼을 품고 있으면 뭘 합니까.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차라리 사랑을 노래하지 않은 것 보다 더 못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정말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지요. 겉이나 속이 다 같지요.  양파는 까고 벗겨도 양파일 뿐입니다. 우리도 벗기고 벗겨도 예수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아요. 더 열심을 냅시다. 더 진실 합시다. 더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더 예수님처럼 삽시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요즈음은 과학이 많이 발달 되었습니다.예전에는 속을 보려면 엑스레이를 찍으면 어느 정도 압니다. 이제는 C. T.를 촬영합니다. 더 나아가 M. R. I. 라는 기계로 봅니다, 요즈음은 내시경으로 보고 사진도 찍습니다. 수술도 합니다. 좋은 세계입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지 아니면 형식적인지 다 아십니다. 우리도 이 시대의 사데 교회와 같지 않고 늘 열심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고 겉과 속이 하나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셔서 주 안에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3년6월 4일 박 충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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