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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떠나도 또 부르고 싶은 사람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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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도 또 부르고 싶은 사람 (요 21;15-17)
                               
우리 교회를 거쳐 나가 단독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가 지금 17 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생각만하면 다시 불러 같이 일하고 싶은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날 생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치는 목사도 있습니다. 떠나도 또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떠났는 데 그 교회에서 또 부르는 목회자가 종종 있습니다. 충주에 김 기웅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 교회를 떠났는 데 그 교회에서 다시 부름을 받아 그 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부름받을 수 있을 가 조심스럽게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영국에서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영국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속에서 제임스라는 목동을 만났습니다. 왕자는 길을 안내하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동이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저는 주인 집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주인 양 떼를 지키는 것이 내 임무입니다. 왕자님을 안내하는 것이 내 임무가 아닙니다>
왕자는 월급을 얼마 받느냐고 물으면서 월급의 3 배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동은 여전히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더 주셔도 못 합니다. 저는 이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왕자가 화가 나서 총을 겨누며 말했습니다.
<안내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
그 목동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예, 죽을 지언정 왕자님을 안내 하지 않고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로 안내해 드리지요. 저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20 분간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
왕자는 할 수 없이 말로 안내하는 대로 길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임스 목동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났습니다. 그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임스는 목동에서 재상으로 신분의 대단한 변화가 일어 났습니다. 목동에 충성하였던 목동, 사명에 충성하고 있었던 제임스에게 재상으로 충성하여 달라는 부탁이 있게 되었습니다. 충성하였고, 충성하고 있고 충성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제일 먼저 가셨습니다.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고 계신 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는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 다시 만날 때도 역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하였기에 주님이 오셨는데도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고 명하셨습니다. 고기가 153 마리 잡혔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고 <주시다>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이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생선을 구워 떡과 함께 조반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베드로와 오고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이 것이 오늘 대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떠난 사람을 또 부르시러 갈릴리 해변을 거니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다시 부르고 싶어 할까요?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다시 부르신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충성하였고, 충성하고 있고, 충성할 사람을 부르십니다. 떠나가도 다시 부르고 싶어지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셨습니까?

1. 충성했던 사람을 다시 부르십니다.
사람을 다시 부르고 싶어할 때에는 충성하였던 사람을 다시 부르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떠난 부목사님들중에 충성하였던 부목사님은 기회만 되면 다시 불러 같이 일하고 싶어집니다. 우리 교회 일을 자기 일처럼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였던 부목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니까 가룟 유다는 자살하였고 11명 제자는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기에 갈릴리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비러 먹을 놈들! 내가 분명히 죽으면 3일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세 번씩이나 말했는 데 한 명도 믿지 못 하고 다 도망갔구나. 3 주 걸리는 것도 아니고, 3 개월 기다리는 것도 아닌 데.... 3 일만 기다리면 되는 데... 3 일을 기다리지 못 하고 도망갔구나!
다른 제자들을 모집하자. 다시 훈련시키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충성하였던 제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충성하였나요?
3 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집에 한번도 휴가 간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한 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가정으로 돌아 간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를 모시러 간 적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3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돈많은 예수님도 아니었습니다. 장정이면 일년에 은 반 세겔 성전세를 다 내게 되어 있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은 반 세겔은 1.42 g 정도입니다. 500원 정도입니다. 이 정도 돈도 안 가지고 다녔기에 고기를 잡으니까 그 안에 돈이 들어 있어서 세금을 낼 정도로 가난한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불평불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으로 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병자, 주린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 다니며 좋아 하였지만 보통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조롱할 때였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럽게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충성하였던 제자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 주님 열한 제자 다시 부르시사
마지막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가서 제자 삼으라......>

이 노래 배경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강요한 선교사가 파나이 섬에서 13년 째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선교비를 내어 필리핀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46 가정을 다 보라카이로 초청하여 성막 쎄미나를 열었습니다. 필리핀에 살면서도 그 유명한 세계적인 관광지 보라카이를 가보지 못 한 선교사가 80%가 넘었습니다. 선교 활동에 바쁘기도 하였지만 쥐꼬리만큼 보내는 선교비로는 그런 곳을 가볼만한 물질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약 60 명이 파나이에 모였다가 보라카이로 이동하는 데 약 4 시간 걸렸습니다. 나는 강요한 목사 승용차를 탔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버스에 합승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탄 승용차가 버스를 뒤따라 갔습니다. 필리핀은 차를 만들지 못 하는 나라입니다. 얼마나 차들이 낡았는 지 매연이 뒤범벅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요한 선교사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뒤따르지 말고 앞으로 가라>
그 기사가 말했습니다.
<주인님이 뒤따라 오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가> <주인님이 뒤따라 오라고 그랬어요>
<내 말들어. 가도 괜찮아>  <주인님이 뒤따라 오라고 그랬어요>
<내가 네 주인의 형이야. 내 말들어>  <주인님이 뒤따라 오라고 그랬어요>
그 기사는 도무지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휴게소에서 잠시 머믈렀습니다. 그 때 동생 강 요한 선교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깔깔 웃으면 이 기사는 자기 말 외에는 절대로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강 선교사가 앞으로 가라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보라카이 올 때까지 앞에서 왔습니다.
아침마다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면 꼭 물을 준답니다. 어느 날은 비가 오는 데도 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야단을 쳤더니 <주인님이 아침마다 물을 주라고 그랬잖아요?>라고 말하더랍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차 에어컨이 고장이 났습니다. 카센터에 가서 고치라고 하였더니 가서 전화가 왔습니다. 500 불 달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비싸게 생각되어 다른 곳에 한번 더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카 센터에 가서 700불에 고쳐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주인님이 다른 곳에 가보라고 하였잖아요?>
사람들은 충성하였던 사람들을 다시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있는 곳에서 충성하여야 합니다. 지금 충성하여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충성하여야 합니다.

런던에 있는 박물관에 아주 특별한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습니다.
그 밑에는 제목으로 <충성>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AD 79년 폼페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폼페이는 사치와 허영과 음란의 도시였습니다. 그 때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였습니다. 용암은 낮은 지대인 해변으로 흘러야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용암이 폼페이로 흘렀습니다. 화산재도 바람으로 인하여 폼페이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신비입니다.
사람이 더러워지면 땅이 더러워 지는 영적 법칙은 증명하여 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니까 에덴동산이 가시와 엉겅퀴로 못 쓸 땅으로 바뀐 것과 같습니다. 그 때 용암이 흘러 내리고 화산재가 쏟아져 내리니까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도망을 쳤습니다. 성을 뒤로 하고 도망치다가 용암이 덮치니까 성을 뒤로 하고 굳어진 시체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병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성문앞에 한 병사는 그대로 똑바로 창을 든 채로 서서 죽은 모습입니다. 죽도록 충성한 병사입니다. 만일 이 병사가 살아 난다면 문지기 병사로 틀림없이 취직이 될 것입니다. 이 병사가 예수믿고 죽었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천국 문지기로 취직을 시켜 주실 것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미국 시애틀에 가서 185 기 성막 쎄미나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가까운 곳에 레이니 산이 있습니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산입니다. 그 옆에 헬렌 산이 있습니다. 헬렌산은 1990 년 폭팔하였습니다. 화산이 품어 나왔습니다. 반경 200 km 까지 화산재가 덮였던 세기적인 화산 폭팔이었습니다. 그 때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가 그 화산 폭팔을 취재하러 접근하였습니다. 본사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좋은 사진을 보도려고 사진 기자를 접근시켰습니다. 정부에서는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좀 떨어진 것같은 마을 사람들은 설마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곳도 용암이 순식간에 흘러 도망갈 틈이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죽는 모습을 생생하게 사진으로 담다가 한 기자가 죽었습니다. 용암이 덮친 것입니다. 그 사진 기자 시신을 발굴하여 보았습니다. 마지막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찍은 필림을 꼭 끼어 안고 죽었습니다. 본사 명령을 죽기까지 사수한 신문기자였습니다. 생생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만일 그 기자가 살아 난다면 문제없이 다시 부를 것입니다. 엄청난 월급을 주면서 다시 부를 것입니다. 천국에 갔다면 하나님은 충성된 사진 기자가 왔다면서 지옥 사진 기록 기자로 당장 임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를 때 충성하였던 사람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 충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부르신 것은 3 년동안 충성한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2. 충성하고 있는 사람을 다시 부르십니다.
아무리 과거에 충성스럽게 일하였다 할 지라도 현재 충성하지 못 하면 다시 부르지 않습니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제자들은 어제까지 충성하였지만 오늘도 충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게 못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재빨리 자기 일을 찾아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3년 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돌아 왔으니 아마 정리할 시간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같으면 아내를 만나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여보! 미안해! 3년 전 당신에게 전화 연락도 하지 않고 그 목수를 무조건 따라 갔었지. 내가 무엇에 홀렸었나봐. 미안해. 이제는 당신 곁을 절대로 안 떠날 게.. 용서해줘! 내가 어리석었어. 우리 새로운 마음으로 어디 콘도에 가서 며칠 지내며 미래를 다시 정리하자>
이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각기 자기 일도 돌아 갔습니다. 어쩌면 3 일만에 그렇게 제 자리를 빨리 찾을 가 할 정도로 빨리 충성되게 일하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성하였고 충성하고 있는 사람을 다시 부르십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에 이야기입니다.
그는 남의 집 청소를 하여 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에 1 불씩 받기로 하였습니다. 도산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청소를 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청소 도구를 개발하여 만들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깨끗이 청소를 하였습니다. 베란다에서 안 창호가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주인이 한 시간에 50 센트씩을 더 주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 데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하십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하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도산 안 창호는 한국에서 쓰임받고 부름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을 시키든지 항상 충성되게 감당하였습니다.

3. 충성할 사람을 다시 부르십니다.
아무리 과거에 충성하였고 지금 충성하고 있다고 하여도 내일 충성스럽게 살 사람이 아니면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도 중요하지만, 현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일입니다.
예수님의 11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은 후 죽기까지 충성하였습니다. 이럴 모습을 예수님은 미리 보셨습니다. 아무리 충성하였었다 할 지라도 앞으로 충성하지 못 할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부르심을 받은 후 한결같이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다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아가야 파트리에서 십자가게 거꾸로 못 박혀 복음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12 제자들중에 제일 먼저 순교하였습니다(행12;1-3)
요한은 밧모섬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들렸습니다. 펄펄 끓는 가마속에 요한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 났습니다. 도저히 어떻게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밧모섬을 귀양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안드레도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 주지사가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면 살려 주마> 안드레는 말했습니다. <지사님이여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잃지 마시오>
이런 식으로 모두가 순교당하였습니다. 한 가지 일을 위하여, 보람있는 일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충성할 사람을 사람들은 부릅니다.

어느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났습니다. 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 한 명이 생겼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기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까?>
이 말을 들은 토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엽을 긁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벌레 한 마리를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시뻘겋게 불타고 있을 때 그 토인은 벌레를 꺼내 살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지옥불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을 위하여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경재 감독님이 공주에서 목회할 때 이야기를 우리 교회에서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공무원 동창이 식목일 날을 앞두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산 하나 전부를 교인들을 동원시켜서 식목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감독님이 물었습니다.
<왜 우리 교인들에게만 나무를 심으라고 하십니까?>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작년 식목일에 사람들을 동원시켜서 엄청나게 많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심은 나무는 경쟁적으로 많이 심으려고만 하였습니다. 무성의하게 심어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심은 나무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동원시켜서 정성껏 심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앞에서 행동하기에 늘 조심하며 일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렘48;10)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는 유명합니다.
어느 주인이 먼 나라로 갈 때 세 종을 불러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잘못해서 잃어버리면 본전까지 날라 갈가 두려워서 땅속에 묻었다 가 다시 가지고 왔나이다>
이 때 주인은 노하면서 말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렇다면 은행에라도 넣었다가 이자를 받게 하지 왜 땅에 묻어 두었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리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그 종을 책망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책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충성하지 않는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성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런 두 가지 명언을 남겼습니다.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과 같이 여기며 살아야 한다>
<나는 오직 한 번만 인생을 산다는 각오로 부지런하게 산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충성하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다윗은 부지런히 양을 치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밤새도록 잡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부지런히 밭을 갈다가 엘리야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곳에서 사람을 찾을 때에는 충성했던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할 사람을 찾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떠나간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떠나도 다시 찾고 싶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충성하였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충성할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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