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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창 3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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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창 39:1-10
새문안교회 2003. 8.31 주일예배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셉은 가히 신화적인 존재요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히브리 소수 부족에서 태어나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강대한 부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110세로 죽기까지 애굽왕 바로 다음 가는 막강한 권세와 바로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애굽을 지배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와 권력이 어떤 것인지는 창세기 41장에 기록된 다음의 몇 구절만 봐도 설명이 필요 없이 분명합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40-44).

요셉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의 제일 끝에 다음과 같이 짤막한 한 구절로 남아있습니다: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반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죽음에 관해서는 보다 길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창50:1-3).

여기서 시신을 향으로 처리하고 70일간 애곡하였다는 것은 그 신분이 바로나 그에 버금가는 애굽의 최고위 인사의 신분에 비할 수 있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 야곱이 유언한 대로 그의 시신을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창49:30) 선조들의 묘실에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다녀오는 그 길에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창50:7)들이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한 창50:9의 기록은 그 장례행렬이 얼마나 장관을 이루었을지 능히 짐작하게 합니다. 그만큼 요셉의 위세는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대성할 수 있게 했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지혜와 능력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간의 기근에 대비하여 혹심한 기근 중에도 온 국민을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리면서도 왕의 재산을 더욱 튼튼히 한 일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풍년이 들어 토지 소출이 심히 많았던(창41:47) 첫 7년 동안 애굽 온 땅을 순찰하며(창41:45-46) 각 성읍마다 흉년에 대비해 곡물을 충분히 저장하게 했습니다. 창41:4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바로의 꿈을 해석한 요셉의 말과 같이 애굽 땅에 7년간의 풍년이 그치고 7년간의 흉년이 시작되며 온 땅에 기근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과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온 각국 백성에게 곡식을 팔았습니다(창41:53-56).

요셉은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으로 바로의 궁을 채웠습니다(창47:14). 흉년이 계속되자 돈으로 산 곡물도 다 떨어지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곡물을 살 돈도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창47:15). 그러자 요셉은 곡물을 팔아 거두어들인 돈으로 백성들의 가축을 사들였습니다(창47:16). 다시 돈이 생긴 백성들은 그 돈으로 곡물을 사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창47:17). 그러나 흉년은 계속되었고 또 다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몸과 토지뿐”(창47:18)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의 소유로 만들고(창47:20), 백성들은 소작인으로 삼아 그들에게 종자를 주고 땅에 뿌리게 하여(창47:23) 추수의 5분의 1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5분의 4는 백성들이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온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게 했습니다(창47:24, 26). 그러자 애굽의 백성들은 요셉을 향해 말하기를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 극심했던 흉년과 기근 속에서 애굽의 모든 백성을 먹여 살렸으며 애굽의 모든 땅을 바로의 소유로 만드는 지혜와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혜와 능력의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혜 있고 유능한 사람이 정직함을 갖출 때 나라에 유익을 주지, 그렇지 않으면 유익은커녕 오히려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곧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유능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신뢰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애굽에 팔려 가서 처음 모시게 된 사람이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입니다. 오늘 본문 4-6절에 보면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했으며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했으며 간수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창39:22-23).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절대적 신뢰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나 애굽의 총리로서 바로의 총애와 온 백성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지혜와 능력뿐 아니라 요셉의 곧은 성품과 정직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거기에 그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혜와 정직 이상의 것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였습니다. 그의 삶을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을 섬기고 있을 때 요셉은 유능하고 정직했을 뿐 아니라 젊고 그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6). 그런데 이렇게 잘난 청년 요셉을 그냥 놔두지 못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 여인은 오로지 요셉과 동침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요셉에게 추파를 던지며 그를 유혹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에 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부정한 일을 저지를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그의 반듯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의 끈질긴 유혹과 간청에도 요셉이 꿈쩍하지 않자 아주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일하러 들어간 요셉만 있을 때 그녀는 요셉의 옷을 잡고 자기와 동침해줄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여인의 손에 잡힌 자기의 옷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도망쳐 나갔습니다. 그러자 자존심이 크게 상했으며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찼고 더 이상 요셉에게서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없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올라 집 사람들과 자기 남편에게까지 히브리 녀석 하나가 나타나 집안사람 모두를 우습게 여기고 심지어는 안주인인 자기를 희롱하려 했다고 떠들며 요셉을 모함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보디발은 아내의 말만 듣고는 크게 노하여 요셉을 잡아 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여주인의 그 집요한 유혹을 요셉이 끝까지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그 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믿음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문 8-9절에서 요셉이 한 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확고한 생각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그토록 신뢰하는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은 “큰 악”이라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그것은 인간적으로 큰 악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말한 것입니다. 요셉은 주인의 아내와의 동침을 주인에 대한 인간적 배신행위로서 볼 뿐 아니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홀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국 땅에 붙잡혀와 아는 이 없이 살고 있었던 몸이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늘 살아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여럿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옥에 갇힌 요셉은 거기서 바로의 고위 측근관원이었던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두 관원장이 같은 날 밤 서로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훗날 바로의 궁에 불려 들어가게 되고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계기는 바로 이 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줌으로써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하며 수심에 차 있을 때 요셉이 한 말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였습니다(창40:1-8). 그 당시 애굽에서는 “꿈해석학”을 상당히 정교하게 발전시켜 놓았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요셉의 말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겠습니까? 꿈은 인간적인 기술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꿈을 바로 해석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사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모든 사건들은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들을 꿈으로 계시해 주신 이들만이 해석할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 밑바닥에는 역사와 모든 사건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계시와 참 지식의 주인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통찰과 확신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가 한 가지 기이한 꿈을 꾸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해석해주는 자가 없어 번민하고 있을 때 그 꿈을 해석하도록 바로의 궁으로 불려갔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말하자 요셉은 답하기를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답을 하시리이다”(창41:16) 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꿈의 바른 해석뿐 아니라 마음의 참된 평안을 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애굽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도 기근이 극심해지자 아버지 야곱의 명령에 따라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얻으러 애굽에 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자기가 형들이 팔아넘긴 아우 요셉임을 형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 사실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망연자실하며 아우의 보복을 두려워할지 모르는 형들을 안심시키며 요셉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8)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여정과 의미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에서 찾는 요셉을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다시 한 번 두려움에 휩싸였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아버지 때문에 자기들을 해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는 요셉이 옛 원한과 미움이 되살아나서 자기들에게 복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달라고 거듭하여 비는 형들에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창50:19-20). 여기서도 우리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요셉의 깊은 경외와 신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항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보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즉 언제 어디서든 누가 보든 말든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며 사는 믿음을 지닌 요셉이었다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한 그의 대답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하는 믿음과 다짐으로 항상 자신의 마음을 지켰기에 요셉은 그의 여주인의 줄기차고 거센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항상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신앙의 좌우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려고 하면 온갖 더러운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패한 정치판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하는 믿음을 앞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청탁과 뇌물과 탈세와 온갖 부정한 거래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하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앞집 여자도 바람나고 뒷집 여자도 놀아나며 젊은이나 어른들이나 온통 불륜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하는 이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요셉처럼 들어 쓰실 것입니다. 요셉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야망을 가지고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 것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죄 지으랴” 하는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을 그의 아버지와 온 형제 가족들을 다 살리시며 온 애굽을 구원하시는 위대한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매사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힘씀으로써 하나님께 쓰임 받아 “애굽의 7년 흉년” 같은 세월을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살리는 도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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