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보내 주소서 / 사 6:1-8

  • 잡초 잡초
  • 958
  • 0

첨부 1



제목 : 나를 보내 주소서 
본문 : 이사야 6:1-8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합니다. 다른 짐승도 많은데 왜 돼지를 잡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주인이 소를 잡으려고 하니까 소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밭농사는 누가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듯해서, 주인은 개에게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개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집은 누가 지킵니까?"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고양이에게 갑니다. 고양이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잡지요?"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돼지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잠만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잔치를 위해서 사명이 없는 돼지를 잡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려 죽은 후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답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욱을 남기는 것입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한번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청춘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엘리어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사명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녀도 사명으로 하고 자녀를 양육해도 사명으로 양육하고 부모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기고 부부가 사랑해도 사명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겨야 합니다. 당신은 반드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사명자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스펄전이 청년시절에 절망과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길을 가다가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 여섯 명이 모여 설교를 듣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라고 설교합니다. 목사님께서 스펄젼을 보고 큰 소리로 "저기 있는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젼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생각하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만나 거듭나게 되었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이 탄생된 것입니다. 성전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 천사들의 찬양을 받는 하나님의 영광, 온 땅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 안이 열린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무너지는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을 덮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심령의 공허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사야의 시대도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입니다. 정권 교체기입니다. 북쪽으로부터 앗수르의 침공위협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불안의 요소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문으로 '사명'이라는 말은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붙인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calling(부른다)'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보내는 것이 사명입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사명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명자가 되는 첫 걸음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인간을 붙들고 사명 받는 것 아닙니다. 환경을 보며 사명 받는 것 아닙니다. 권력을 붙들고 돈을 붙들고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질의 웃시야, 권력의 웃시야, 지식의 웃시야, 인기의 웃시야로부터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명자의 첫 발견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념이나 철학, 종교, 사상으로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만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가, 야곱이 요셉이, 엘리야가, 엘리사가, 베드로가 바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자는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법률 고문이었습니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했습니다. 냉철했답니다. 머리가 비상했답니다. 그런데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으로  괴로움과 좌절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상원의원으로 있는 세 명의 친구들이 전도하러 왔습니다. 상원의원 중 한 사람은 법원에다 자기가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했답니다. 그들의 전도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새로워 졌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똑같은 감옥인데 감옥이 백악관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어두움이 떠나고 빛이 찾아 왔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꽃피웠습니다. 불안은 살아지고 평안이 찾아 왔습니다. 남의 빨래 다 해줍니다. 청소를 합니다. 자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책을 씁니다. 'born again'(거듭남)입니다. 교도소에서 전도를 합니다.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어떤 고백을 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고백한 것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뒤에 비로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사명자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느냐고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운한 생각을 가지면 결국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사명자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는 과거에 구두 깁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식합니다. 그러나 정열적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그 마을 신문에 무디에 대해서 무식하다느니, 그의 허물들을 줄줄이 나열해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신문을 보는 동안 그 지방의 목사님들이 "이 나쁜 사람들이, 이런, 이런……."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버려두세요.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럴 것 없습니다. 사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며, 그들이 지적하는 죄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사명자는 항상 바닥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우리를 깨끗게 하여 사명자로 사용하십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사명자가 되려면 죄인된 우리 자신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혈의 피로 의롭게 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셋째로 사명자는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주바라기 '이지선'양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교통사고의 화상으로 얼굴에 눈 두 개만 남고 전신이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수술만 열 한 번을 했는데 한 번 수술을 하면 열 네 시간에서 열 여덟 시간이 걸리는 대 수술이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정신이 들었을 때 죽으려고 했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보았습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내 고통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신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합니다. 눈썹이 없으면서 눈썹의 귀중함을 알립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합니다. 귓바퀴가 없어져서 귓바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녀로 인해 위로 받고 살 힘을 얻는 많은 이들이 그의 사이트를 찾았습니다. 사명자의 삶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가‘이만큼 고생했다’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여러분을 울리기 위해, 동정을 받기 위해 쓰는 것도 더 더욱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누구도 살 수 있을꺼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리셨고 또 사랑하셨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디 제 이야기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길 기도합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손’에서는“저는 요즘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주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 말씀하실 때 "나를 보내주소서" 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할 일 많은 이 땅위에 일할 사람을 누구를 보낼꼬, 이 땅의 죄와 죽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위해 누구를 보낼꼬,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누구를 보낼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누구를 보낼꼬, 가난과 헐벗음으로 죽어가고 배우지 못해 무지하게 살아가는 자를 위해 누구를 보낼 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이사야 같이 '나를 보내주소서'의 대답을 해야 합니다. 사명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 부르심에 헌신해야 합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남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지 않고 그 사람이 받은 사명을 쓰십니다. 우리는 이익이 아니라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편리가 아니라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쾌락이 아니라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죄인된 나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 음성에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사명으로 응답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