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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을 발견하는 힘 / 잠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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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행복을 발견하는 힘
본문 : 잠언 4:1~9

  오늘 성경말씀에는 유대인들의 전통적 신앙교육 교과서가 나타나고 있습
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잠언 성경은 유대인
들의 생활 필독서로서 아버지들이 아이들에게 거의 강제적으로 읽히는 성경
입니다. 엄격한 가정에서는 잠언 한 구절을 읽지 않으면 밖을 나가지 못하
게 했다고 합니다. 잠언 전체의 내용은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하는 말이며
아들들에게는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는 교육인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먼저 이해할 수 있기 때문
에 아버지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진 그것이 잠언 성
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우리 세상의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가
가장 마음에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의 행복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고, 온 세상 우주 만
물을 만드신 것은 인간들이 넉넉히 세상에서 사는데 필요한 모든 제도를 하
나님이 완벽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고,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위치라 하는 것은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지불할 수 있
는 마음이 열려있는 그런 존재를 아버지, 어머니라 부릅니다. 우리들이 아
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을 때도 그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랬고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유난히도 자식들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
불한다는 그런 열려있는 마음을 가지고 자식들을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합니
다. 제가 먼저 있던 미국의 교회에서도 그런 가정이 많이 있었고, 갈보리교
회에서 지난 8개월 동안 열심히 심방 하면서도 그런 가정을 많이 봤습니
다. 이제 결혼해서 자식들 커가고 그러면 40대 초반정도 되는데 40대라고
하는 이 좋은 나이에 부부가 아주 행복하게 제일 복을 누리면서 살아야 할
그런 시기에,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녀들의 가는 길에 성공을 빌어주
기 위해서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가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아빠는 한국에서 혼자서 기러기 아빠인지 갈매기 아빠인지 그
렇게 하고 사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토렌스 교회 목회할 때
도 그런 가정이 많이 와 있었고 우리 갈보리교회에도 그런 가정이 많습니
다. 내 인생에 가장 행복을 누릴 만한 40대라고 하는 그 좋은 나이에 부부
가 떨어져서 오직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면서 어떠한 희생도, 외로움도 다 견딜 수 있다는 한국 부모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또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삶의 가장 큰 가치를 효
(孝)에 두었습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중에 제일이 불효(不孝)라고 했습
니다. 또, 임금을 섬기는 충(忠)을 절대화하는 문화라서 우리 나라에는 충
효(忠孝) 사상이라는 것이 우리 문화를 오랫동안 지배하여 왔습니다. 이러
한 우리 나라의 충효사상은 그래도 우리 기독교 신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고 나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임금님과 같이, 혹은 아버지 같이 섬
기는 길이 어렵지 않게 열릴 수 있는 기초가 충효사상에 있었다고 나는 그
렇게 봅니다.

  서울에 가면 '효자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경복궁 임금님이 사시는
바로 옆에 있는 동네인데, 왜 '효자동'인가? 전설이 있습니다. 어느 가정
에 어린 손자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얼마나 그 손자가 귀여운지 늘 데리
고 주무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께서 잠버릇이 좀 고약해 가지
고 그만 깔아서 죽였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잠
을 주무시는데, 아들 며느리가 그 죽은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나와서 큰 걱정
을 합니다. 그런데 그 걱정은 자식이 죽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이 사실
을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 그것이 더 걱정스러워서 죽은 자식의 뺨
을 때리면서 "이 불효자식아 어쩌자고 할아버지 마음을 이렇게 슬프게 만드
느냐?" 했더니 죽은 아이가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
임금님한테 들려져서 임금님이 "그 동네 이름을 '효자동'이라 그래라!" 그
래서 '효자동'이랍니다.

  이조 500년 역사에 여인들이 너무 학대를 받아서 조선의 아버지들 이미
지가 좀 나빠졌죠? 우리 나라 종교 역사를 대략적으로 구분하면 4가지가 있
는데, 첫째가 무당종교로서 샤머니즘 시대를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
다가 고구려 소수림왕 제 2년에 불교가 들어옴으로 불교 문화의 영향권에
서 또 우리가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고려 말년까지 큰 영향을 발휘해서 말
년에는 신돈 같은 스님이 나라의 모든 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역사를 우리가 또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조 500년 유교 문화권에
들어갔습니다. 이 유교문화권에서는 유익과 손해가 동시에 나타나는데 큰
문제는 유교는 절대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을 참 많이 다
녔는데 '심양 대학'의 총장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유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참 이 이야기 잘 나왔다고, 지금 한국에서 조
선 사람들이 이 공자의 도덕, 윤리를 종교화해서 유교라고 부르면서 종교화
했는데 유교는 절대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공자 님
을 생각하는 것 보다 중국 사람들이 공자님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낮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도덕과 윤리를 가르친 것이
그게 왜 종교냐? 그런데 이 대국 사상이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너무 심해
서 중국을 숭배하다 보니까 중국에서 온 것은 모두다 종교화 해가지고 그
조선에서 유교를 종교화 해버렸지, 언제 우리 중국사람이 조선에 가서는 이
것은 종교니까 잘 믿으라고 전도한 사람이 누가 있냐고, 그건 당신들이 만
든 것이지 중국 사람들이 전해 준 것이 아니라고, 유교는 절대 종교가 아니
니까 그런 줄 알라고 그렇게 저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그
러다가 1900년대 이후는 기독교 영향권에 들어와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
이 유교 전통 문화의 틀을 벗겨나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을
겪어 왔습니다. 주자학의 주체성은 글자가 세 가지로 끝납니다. 임금 군
(君), 아비 부(父), 지아비 부(夫) 세 글자입니다. 이 세 글자에 다 들어
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에게 충성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남편 받
드는 것이 여인의 삶이라 그렇게 가르쳐서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았잖아
요? "부인이란 사람에게 구부리는 것이니 이런 일에는 이유가 없도다. 삼종
의 도가 있으니 집에서는 아비를 쫓고 시집가면 남편을 쫓고 남편이 죽으
면 자식을 쫓아 여인은 스스로 이루는 바가 없느니라." 그렇게 해서 여인
비하의 문화 속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언제 내쫓아도 괜찮은 여자 7가지 제목이 있으니까 기록하시기 바랍니
다. 먼저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 없이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는 여자", 두
번째는 "남편에게 이유가 있을지라도 자식을 낳지 못하면", 세 번째는 "바
람을 피웠을 때", 네 번째 "어떤 경우에도 남편을 질투하는 여자", 다섯 번
째 "몸에 질병이 있으면", 여섯 번째 "말이 많으면", 일곱 번째 "남의 것
을 훔친 일이 있을 때" 그러니까 여인은 인권이란 것이 없는 그런 유교 문
화권을 우리가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시대가 되면서부터
여권신장, 여성 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서구 사회의 교육에 힘 입
어서 인간의 가치관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에 이르렀습
니다. 사실 그래서 대한민국 교회는 여인들이 많아요. 여인을 살려준 문화
가 기독교에서 왔거든요. 이제 한국은 호주제 폐지가 법안으로 통과되도록
국회에서 거론을 하고 있어서 얼마 안 있으면 이제는 "나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어머니 성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그런 시간에 와있지 않습니까?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
사 '스크랜튼' 부인이 한국에 와서 여학교를 세우고 여인들을 교육해서 사
회의 역군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했을 때 명성황후께서 '이화학당' 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대한민국의 여성해방 운동에 큰 공
로가 있었습니다.

  이 잠언에 표현되어 있는 아버지 개념은 어머니도 포함합니다. 부모 개
념인데, 유대 문화도 여인 멸시 문화이기 때문에 아버지만 기록 되었습니
다. "아들들아" 하고 아들을 부르는 말로 시작이 되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제 삼자가 하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제 3자는 하나님의 의미
로 해석을 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지어다." 하나님과 아버지가 동일하게 아들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이렇게 잠언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법'이란 대체 어떤 법을
말하는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끝 부분
을 보면 모든 인생들이 세상에서 소원하는 그런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
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
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은 뭡니까? "행복하게 살게 해줄 것이
다. 너는 영화를 누리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
다. 행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광스럽고 영화롭고 머리에 면류관이 빛
난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혹은 우리 가정에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존재입니다. 사실 이 부모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자식이 사는 그런 존재가 부모입니다. 하나
님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희
생이라도 내가 지불하겠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아
버지나 어머니가 자식의 불행을 보고 싶어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보다 더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자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축
복을 원하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그것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
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1. 행복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행복이 주어져 있는데도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계시
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연
구가 하나 나와서 그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에 '정신건강 협
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The National Association for Mental Health" 라
고 하는 기구가 있는데, 이 기관에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5가지 조건을
발표를 했습니다. 그 발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음가짐'이라고 했습니다. 관용, 포용력, 아량 … 마음가짐이
곧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준비 안된 사람은 어떠한 외부 조
건이 잘 마련이 되어도 결코 행복하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
기 손에 행복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누릴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이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네 마음 가운데 있느니라."
넉넉히 행복한 조건들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날마다 불행을 노래하면서 사
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행복을
발견하는 힘! 마음가짐 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재는 자기 평가를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
다. 'realistic estimation'이 라고 하는데, 이게 뭐냐면 이렇게 설명을 하
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목사의 행복을 찾아야만 행복합니다. 목사가 재벌의 행복을 바라본다든지,
조폭을 그리워한다든지 이러면 그 목사는 영원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
니까 "현실적 자기 평가를 잘 하라!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다!" 얼마나 좋
은 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나의 위치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길
이 무엇인가? 내 손에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을 동경하면서 마음을 불행하
게 만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어요. 현재 주어지는 것에서 자
기 평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질 때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personal pride'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라 그랬습니
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의 자유함! 내 스스
로 나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태도를 가지라! 특히 우리 한국사람들은 다
른 사람의 평가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과 같이 남의 행복을 건드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면 불행하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건드리지도 말
고 내 행복을 다른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내 마음에서 자유함을 얻
고 사는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Try best'라고 하는 실패하는 삶을 살지라도 최선을 다해
서 살면 마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 참 안됩니
다. 내가 목표로 정해도 성취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불행한
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선한 목표를 향해서 최선을 다하면 그 자체
가 나의 행복을 약속해 준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저는 한 목사를 친구 목사
로 삼은 것을 내 인생에 아주 큰 수확으로 생각하는 그런 습관이 생겼습니
다. 이 목사님은 저하고 연령이 비슷한데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면 행복할
게 없습니다. 우선 목사로서 그 목회 하는 것을 보면 방법이나 그 내용이
조금 그렇습니다. 수준에서 좀 떨어진다 고나 할까? 사람의 매너라든가 모
습이라든가 그분을 이루고 있는 모든 조건들이 모두 떨어지는 분인데, 그
런 분이 목사가 되어서 열심히 목회를 하는데 나는 그분과 함께 한 방에서
일년을 room mate로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 자기에게 주어
진 일에 대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새벽 4시만 되면 365일 하루도 빠지
지 않고 일어나서 기도를 드리고 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은 그 작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합니다. 그 사모님이 늘 말해요. 우리 남편 목사는 아마 세
상에서 평가는 꼴찌 목사에 속하는데 자기가 남편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 사
람은 다른 사람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실력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그 노력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라고… 20년 목회 했는
데 교인이 20명이에요. 그러니까 수준에 이르지 못하죠? 그런데 본인과 그
사모님은 아주 넉넉한 행복을 가지고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회를 하
는 목사보다도 훨씬 더 행복하게,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나에게 주어진 모
든 것을 가지고 나는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서 산다고
하는 그 자부심! 이게 바로 'Try best'라고 하는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최
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2. 밝고 명랑하게 살도록 자신이 자신을 도와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별로 고민거리도 없는데, 온 세상의 걱정 근심을 한 몸에 지닌 듯 날마
다 구름 낀 얼굴을 하고 날마다 불편한 말만 하고 그런 매너를 가지고 사
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는데 그 사람 얼굴만 보면 불
안해지는... 우리는 이런 말을 기억하죠?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으면 문제
가 안된다!" 우리가 걱정하는 모든 불안은 다 미래 불안입니다. 현재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닥치지도 아니할 것을 미리 걱정해 하는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주어진 자기 삶에서 자기
를 도와서 밝고 명랑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3. 우리는 상대적 불행을 만들지 말고 상대적 행복으로 볼 수 있을 때
인간은 행복감이 있다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상대적 불행을 상대적 행복
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지
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 오늘 이렇게 비가 오잖
아요? 세계 50개국 이상 돌아다니는 중에 일년에 비 한 방울 안떨어지는 지
역이 허다합니다. 가보십시오. 성경에 3년 6개월 비 안왔다는 기록이 있는
데 사실입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안떨어지는 나라 있습니다. 어
떻게 사느냐? 그래도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비만 오면 축제입
니다. 비만 오면 온통 다 휴무입니다. 비가 온다고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
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는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분명하고 저렇게 한강 물
이, 산더미처럼 맑은 물이 대한민국 어디에 가나 볼 수 있고… 이렇게 좋
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한번 다녀보십시오. 이것은 정말 젖과 꿀
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내 현실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우리가 행복한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는 어떤 조건을 가져다
주어도 이런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아니할 때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
다. 작은 행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사
람의 삶이 행복하고 불행한 것입니다. 마귀복음 1장 1절이 있다고 합니
다. "항상 걱정하라. 쉬지 말고 싸워라. 범사에 불평하라." 그렇다고 합니
다.

  우리는 고난 경험을 행복으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든
지 평탄한 길을 소원합니다. 그러나 고난스러운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이 고난이 싫지만 지난 다음에는 값진 인생 창조가 거기에서부터 나옵니
다. 누구든지 다 똑같습니다. '나는 행복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는 갈
보리교인이 있으면 오늘 제가 24시간 안에 행복할 수 있게 만들어 드릴께
요.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세요. 지금부터 24시간 금식기도 하세요. 그러
면 '아! 세상에 먹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이로구나!' 금방 알게 됩니다.

여러분, 금식기도 일년에 한번씩은 꼭 하십시오. 하루만 하십시오. 언제 하
느냐? 성금요일에 24시간 한번 금식기도 해보세요. 그러면 행복을 발견하
게 됩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 전도사 시절에 삼각산을 금식 기도하러 다
니는 산으로 정하고 거기를 자주 다녔습니다. 삼각산도 그 최고 정상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월요일에 갔다가 금요일에 내려오는
그런 기도를 다녔는데 그때 그 금식기도 하러 다니면서 참 은혜 많이 받았
고 평생 잊지 못하는데 그것이 뭐냐면 '사람이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가?' 금식기도 하면서 받은 은혜는 그겁니다. 뭐, 이틀 되니까 사실 기도
를 하는 건지 밥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먹는 것만 계속 생각이 나
는데, 그 삼각산 그 경치 좋은 데서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있으면 그게 빈대
떡 같이 보이고 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서울 시내에서 집집마다 올라오
는 연기를 보면 '아∼ 저게 다 설렁탕 집이겠지?' 뭐, 이런 생각만 계속 하
면서 내려오면 지나오면서 떡볶이 장사만 봐도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말
이에요, 빈대떡 장사만 보면 '저렇게 좋은 것이 세상에 있었나?' 그렇습니
다. 분당은 내가 보니까 소비 도시에 먹자골목이 많아요. 저렇게 많은 음식
이 내가 언제 가도 돈 몇 푼만 가지고 가면 나를 반겨주는 데가 있는데…
이 세상은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이지, 좋은 것들을 얼마든지 손에 가지
고 있는데도 자기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감사를 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합니다.

  4. 행복은 양심의 자유함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아무리 주변이 화려하
게 잘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마음이 괴로우면 그게 무슨 행복이 되겠습니
까? 지극히 복음적 이유가 됩니다. 이 문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
면 누구든지 걸리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선생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발표한 적
이 있으며 성경에 나타난 모든 신앙의 조상들도 이 문제만은 똑같았습니
다. 양심껏 살지 못하는 위선의 자기 자신을 갈등하도록 인간은 그렇게 되
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어주신 길
이 뭡니까? 회개라는 겁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양심
의 자유함을 얻게 제도적으로 마련해 놨잖아요? 내가 죄 지은 것 남한테
왜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그래야 양심의 자유함이 있어서 자기 행복에 도움
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고해성사 없이 직
접 하나님께 회개를 통해서 양심의 자유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
셨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함을 우리가 해결하는 문
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상대는 나 자신이 됩니다. 남들의 평가는 잘
못된 평가가 너무 많고, 또 그 옳지 아니한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 소
멸됩니다. 그러나 나의 양심 속에 자리잡은 나의 적은 그 양심의 문제가 해
결을 볼 때까지 없어지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아니하고 용서하지도 않고 계
속해서 나에게 괴로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성령님이 주시는 용
서와 평안의 은혜만이 해결해주기 때문에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
면 회개하는 고백을 항상 주님과 가져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
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
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해서 양심의 자유함은 회개의 사역
을 통해서 해결하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죄 없다 하는 자
는 거짓말하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죄인 됨을 자백하므로 양심의 자유함
을 얻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5. 마지막으로는 영혼의 갈 길이 준비된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나이가 저와 같이 좀 많아지게 되면 사람들이 병원 가기
겁이 납니다. 죽는다는 진단이 나올까봐 그렇습니다. 사진 찍기도 싫어합니
다. 자기 얼굴 자기가 보기 싫어집니다. 하기야 그렇게 많이 썼으니 고장
날 것도 당연하죠. 시간이 간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늙음과 죽음에로의 초대
가 됩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세계관이 좁아지고 자기 자신만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뚱이 하나 보존도 힘이 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럴 때 행복은 무엇인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
다." 여기에서 찾아야 행복합니다. 세계관을 바꾸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영혼의 갈 곳을 철저히 내 영혼 가운데 준비가 되었을 때 자신감이 있
고,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들의 마지막
인생에 나타나는 현상은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똑같이 이미 내
가 알고 있는 하늘나라가 있는 형제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제 동기생 목회
자들 중에 몇 사람이 벌써 하늘 나라에 가있고 내가 목회 하면서 그렇게 친
분이 좋았던 형제들이 하늘 나라에 가있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됩니다. 가
끔 생각합니다. '이제 나도 얼마 안있어 하늘나라에 갈 터인데, 하늘나라
에 가면 그 신학교 때 그렇게 죽마고우로 참 친하게 지냈던 내 친구들, 목
사들 거기 가서 다 만나겠지? 나와 그렇게 친분이, 그리고 교분이 두터웠
던 수백 명의, 수천 명의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거기 가서 다 만나겠지?
거기 가서 내가 또 개척교회 하면 내가 또 행복하게 살겠지?' 현 정부가 잘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이산가족 만남'입니다. 지상에서 헤어졌던 가족의
만남도 그렇게 기쁜데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있다고 하는 존재! 이게
얼마나 행복입니까? 우리도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살고 싶잖아요? 행복이
란 무엇인가? '만남'인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실 저는 주일날마다 여러분의 시선 마주치면서 설
교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내 아버지의 마음
과 똑같다. 아버지의 마음이 뭔가?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
불한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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