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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을 공경하라 / 벧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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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공경하라
벧전 2:13-17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 보수와 혁신이 갈등하는 사회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전반이 고통 중에 있습니다. 즉 보혁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남북 문제를 비롯하여 노사 문제, 지방 분권 문제, 검찰권 독립문제, 언론 자유 문제, 호주제 존폐 문제, 이혼율의 증가로 인한 가족문제 등 사회 전반에서 보수와 혁신이 갈등을 빗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제도와 법 그리고 관행 등을 존중하며 지키려고 하는 세력을 보수 세력으로, 그것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세력을 혁신 혹은 진보세력이라 부릅니다. 서로간의 이유와 철학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를 안정시키며, 동시에 역사를 진보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보수냐 아니면 진보냐?” 혹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는 보수냐 진보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몇몇 말씀 가운데서 자신의 분명한 태도를 밝힌 곳이 있는데 그것이 양자를 다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상보훈 가운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동시에 또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혁신적인 행동 강령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그런데 오늘 설교 본문은 보수적인 태도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첫째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은 “every authority instituted among men"(사람들 사이에서 세워진 모든 권위)라는 뜻인데, 성경은 사람들이 합의하여 세운 정당한 절차의 제도와 법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당한 절차로 세워진 법과 권위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부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같은 가치로 경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권세(권위)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롬 13:2)
 
둘째는 모든 제도 혹은 권위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그에 “순복하라”(submit)고 까지 강하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적 지속성은 성도들의 “순명”으로 가능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다른 어느 사회 공동체보다 더 강하게 순명을 강조해 왔습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파면 또는 출교를 감행해 왔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곧 신앙의 척도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회는 매우 강한 보수성을 띄고 있습니다. 


2. 동시에 교회는 “정당한 권위냐”를 묻는 진보이기도 합니다.

설교 본문을 자세히 보면 순복해야 할 권위자로 왕과 왕이 보낸 방백을 두고 말하는데 그들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는 자들”로 설명(14절)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바울 사도의 로마서에서도 “제도적 권위자(권세자)”에 대하여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 13:3-4)

그러므로 성경은 순복하되 선한 관원, 정당한 질서와 규범이란 전제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하고 정당할 때는 마치 “하나님의 사자”와 같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당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권세자에게는 순복해서는 안된다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하여 성경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 바로 “주안에서” 혹은 “주를 위하여” 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매우 강한 보수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매우 강한 진보성향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가정의 소중함을 어느 종교 혹은 윤리철학보다 더 강하게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서구 문화사에서 기독교회로 인하여 가정의 신성함이 엄청나게 많이 고양되어 왔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전 야만족 시대의 문화에서는 여자는 오직 성 노리개 감일 뿐이었습니다. 여자는 전쟁을 통하여 취하는 전리품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부 중심의 가족 개념은 매우 열등한 상태였고 거저 자손 번식의 목적만이 가정의 가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회의 복음을 통하여 서구는 가정의 윤리가 세워졌고 인간 행복의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복음을 위하여 처자와 부모를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이처럼 매우 과격한 진보적 태도를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 백성의 처음 조상으로 부름 받았던 아브라함에게 먼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즉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유명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은 곧 인간에 세워진 모든 권위의 뿌리입니다. 그럼에도 그 뿌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의 온상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라”고 함으로써 그 권위에 불복종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순복과 불복의 자유가 있습니다. 선하고 정당한 권위 일때는 순복을, 악하고 불법적일 때는 불복을 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가 우리를 스스로 속일 때 도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즉 정당성과 선함이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호 혹은 나의 형편이 그 기준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여 순종해야 할 권위 앞에서 불복종하고, 불복종하여 떠나야 할 때 오히려 그 앞에 굴복하는 죄를 짓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우리 나라 근대 정치사의 대부분의 여정을 겪고 자라난 세대입니다. 물론 자유당과 장면 총리 시절의 5.16 혁명기에는 어려서 그 진모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후 유신 헌법시대와 5공화국 체육관 대통령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화 투쟁의 여정에서 청소년기와 대학 및 청년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저의 기억에는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사회 어른들은 당시 정권에 순종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신문과 텔레비젼에서 나오는 뉴스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 매체들은 정부의 홍보물과 같았고, 주위 어느 누구도 당시의 대통령을 욕하거나 험담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어른들은 정부에 따르는 것이 곧 신앙이고, 데모를 하면 불신자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친정부는 곧 건전한 신앙이고, 반정부는 곧 불건전한 사상의 잘못된 신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그 당시의 어른들의 입장이 엄청나게 달라져버렸습니다. 이젠 대통령을 험담하고 비판하는 것을 더 과격하게 하며 반정부 정도가 아니라 정권 퇴진론을 아무런 자리에서도 자유롭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변해서이기보다는 시절과 우리 국민들이 변한 것입니다. 철권 정치 앞에서 두려워하던 시절이 바뀐 것입니다. 강자 앞에서 약했고, 약자 앞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변화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오히려 강자 앞에서 강하고, 약자 앞에서는 부드럽고 자비로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종의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4. 마무리하며

사랑하는 우리 범어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당하고 선한 모든 권위에 순복합시다. 함부로 권위자를 업신여기거나 책임 없이 비판하지 맙시다. 그러면서 정당하지 못하고 악한 권위에 대하여는 두려워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깁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정말 선한 사회가 되도록 합시다. 선한 아름다운 사회는 17절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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