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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흩어져 있는 나그네 (약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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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 있는 나그네
약 1: 1-8

  오늘은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흩어져 있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똑같은 대상에게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를 흔히 디아스포라고 하는데 가나안땅에 살지 않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오늘 야고보가 얘기하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어느 지파에나 빠짐없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 그들은 심한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당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즉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위로해주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의 야고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자 나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을 지내고 있는 야고보입니다.

  야고보 감독이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 사실상 오늘날 우리도 모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입니다. 하늘나라가 사실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지하여 흩어져 있는 나그네인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교제해야 하는 나그네 (1-)

  하나님은 사람을 혼자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너”와 더불어 어울려서 교제를 나누면서 함께 살도록 지음 받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혼자 산다면 교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기 까닭에 교제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는 꼭 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도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초창기 천주교에서 영세문답 시에 “성도들끼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던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이라고 하여서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도신경은 성경에 있는 요점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아니하면 즉 예배순서에서 빠지면 이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야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을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요점들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고백처럼 믿고 살수록 좋습니다. 그 중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면서 사는 것을 고백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형제사이에서도 교제가 없으면 사돈의 8촌쯤 되는 것 같고 전혀 상관없는 이웃이 옆집에 살면서 하루에 열두번을 왔다갔다하며 교제하면 친형제같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교제가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제는 깨져 버립니다.

  저는 목사이기 까닭에 목사들을 많이 알고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는 극히 적은 수가 꼭 남을 이용하려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저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면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을 경우 하루에 열두번도 더 전화하고 일주일에도 몇 번씩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다 하면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한번의 연락도 하지 않으며 헌신짝 버리듯 버립니다. 그러다가 또 필요하면 찾아옵니다. 여러분, 한번이나 당하지 두 번을 당합니까? 절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면 교제가 깨지게 됩니다.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흩어지면 만나고 싶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사실상 기독교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중에도 예수 믿으면서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이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받기 전에 유대인들에게 먼저 핍박을 받습니다. 즉 같은 동족에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목수 노릇이나 하였고 제자라 하여 열두명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십자가에 죄인으로 처형당한 그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라고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흩어져 있는 나그네들, 즉 예수 믿는 유대인들은 그 예수가 곧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인들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메시아를 모독한다고 하여서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을 사정없이 핍박하였습니다. 그래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들에게 문안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안이라는 것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오면 야고보를 꼭 찾게 되고 야고보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야고보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지도를 받으며 야고보와 교제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편지하면서 문안할 정도로 교제를 하였습니다. 믿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에 도움을 줄만한 사람과 교제를 해야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이 야고보와 친교해서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교제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교회에 나와 믿음생활할 때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들과 반드시 교제를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 할수록 믿음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어린 자녀들을 길러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어린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에 보고 접촉하고 말을 듣고 배우는 것이 어머니가 아닙니까? 항상 어머니 품에 안겨서 먹고 놀고 자면서 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배웁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아는 것이 아버지요, 형제들입니다. 집안에서만 왔다 갔다 하면서 가정이 전부인줄 알고 자랍니다. 그러다가 걷기 시작하면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밖으로 나가게 되면 앞집, 옆집, 뒷집의 어린이들과 어울리면서 친구삼아 그 집에 놀러가지 않습니까? 여러 친구들의 집에 가보니까 자기의 집과 다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세계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또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웁니다. 사람은 교제를 통해서 사람사는 법을 배우고 사람자체를 배웁니다. 친구들과 어울림이 없다면 이런 것을 배울 수 없지 않습니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배우고 생각하며 자기의 인격이 형성되어 나갑니다. 또 나중에는 학교에 가서 친구를 사귀고 직장에 가서 동료들을 사귀면서 사회에 적응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에 적응하려고 하면 반드시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사귐 없이는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사귐”은 우리의 믿음에 도움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믿음에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예배합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혼자 예배 드려도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에 꼭 나와서 예배드려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교회에 나와서 드리나 집에서 혼자 드리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게 되면 너와 나와 더불어 드리는 친교, 교제가 있고 집에서 혼자 드리면 너는 없고 나만 있을 뿐입니다. 나만 있다는 것은 교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이 계명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께 잘 하라는 계명을 주시지만 동시에 네 이웃에게도 잘 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이웃을 멀리하고 이웃을 소홀히 여기고 이웃을 깔보고 단절된 상태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갓난아기가 교제를 통해서 지식을 넓혀가고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듯이 우리는 믿음에 손해보는 사람들을 사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믿음에 도움이 될 사람, 배울 것이 있는 사람, 들을 것이 있는 사람, 볼 것이 있는 사람을 사귀면서 믿음에 플러스가 되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1:3하). 너와 내가 교제할 때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계시는 교제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교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한가운데 계시는 교제를 할 때 그 모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앉아서 말끝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듣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없는 곳이 없으시고 어느 곳에나 계신다고 하시지만 계시고 싶지 않은 곳에는 안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항상 어느 모임에 있던지 이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가 어떨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자리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면 바로 뛰쳐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임은 만날수록 믿음에 도움이 되고 이런 교제는 꼭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시고 너와 더불어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믿음을 키워 가는 사귐은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생활이라고 오늘 본문 첫마디에 야고보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일주일동안도 믿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면서 신앙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뻐해야 하는 나그네 (2-4)

  베드로는 같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말합니다(벧전 1:6). 믿음까닭에 여러가지 환란과 핍박을 받으며 잠간 근심하게 되지만 크게 기뻐하게 되는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덧붙였습니다.

  금광석이 있지 않습니까? 금이 섞인 돌을 캐보면 사실상 금이 얼마 만큼이요, 돌이 얼마 만큼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용광로에 넣어서 찌꺼기를 여러 번 걸러냅니다. 여러분이 18금과 24금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18금은 열 여덟번을 녹이며 찌꺼기를 버린 것이요, 24금은 스물 네번을 녹이며 찌꺼기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8금에는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 24금이 되면 99%가 금이 아닙니까? 이렇듯 고난의 풀무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 순수한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가족을 모두 잃고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가 나를 연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고 합니다. 연단은 우리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연단을 통해서 우리가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진 것도 귀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믿음을 순금 같은 믿음으로 만들어 주는 연단을 위한 고난까지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야고보와 베드로의 공통적인 주장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부터 4절까지를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믿음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고난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까닭에 고난 자체까지라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면 그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 뜻이 있기 까닭에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고난까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싫어하고 거부하면 안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만 아기를 낳을 때에 고생하며 낳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믿는 사람들만 아기를 쉽게 낳는다면 전도하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고통 속에서 낳습니다.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고난까지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이 싫으면 아기를 낳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낳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필수인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연단이 필수입니다. 아기 낳는 고통이 지나고 나면 새 생명을 얻는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연단이 있기 까닭에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도 큰복입니다.

  Paul Brand라고 하게 되는 유명한 나환자 재활병원 원장이 있습니다. 문둥병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한번은 영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가게 됩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 몇 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가서 볼일을 다 보고 다시 기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옵니다. 너무 피곤해서 저녁에 씻고 자려고 하는데 발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핀을 하나 구해서 발뒤꿈치와 복사뼈의 아래쪽에 찔러 보았습니다. 피가 막 흐르는데도 아픈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핀으로 찔러서 피가 나는데도 아픈 감각이 없는 것을 가장 겁을 냅니다. 왜냐하면 문둥병에 걸렸다 하면 손가락이 모두 멀쩡할 지라도 꼬집으면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경이 죽었기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단계에는 살이 문드러져 갑니다. 그것을 치료해주고 그 병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이 사람이 밤에 잠이 오겠습니까? 내가 남은 생을 문둥병자로 살아야 하는가? 라고 고민하며 긴밤을 지냈습니다. 아침에 한번 더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핀으로 찔러서 피가 막 나는데 너무 아파서 펄쩍펄쩍 뛰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브랜드 박사가 원망했겠습니까? 기뻐했겠습니까? 그렇게 아픈 것 자체를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프지 않으면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요, 아프다는 것은 그 병에 안 걸렸다는 뜻이기에 고통 자체가 기뻤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고통을 고통으로 알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기 까닭에 고난의 결과도 기뻐할 일이지만 고난자체도 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기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하는 나그네 (5-8)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부터 8절까지 읽어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하는 얘기가 너희들이 지혜가 부족하다 생각되거든 하나님 앞에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구하지 말 것도 당부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구해도 얻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후히 주시고 책망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구하라 주시리라”는 말씀은 기도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혜만 부족합니까? 생활해 나아가다 보면 돈이 너무 필요한데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뿐입니까?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부족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어느 집안은 모두다 좋은데 남편이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한 멍에를 메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합니까? 또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자녀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부족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을 주시되 후히 주시고 절대 책망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할 때 기도생활해서 손해볼 것이 하나도 없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는 자꾸 무언가를 달라고 조르기만 하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활발할수록, 대화가 진지할수록, 대화가 깊을수록 귀하고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해서 나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우리의 믿음에 밑거름이 되는 은혜가 충만한 지혜를 후히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아버지처럼 생각하시고 늘 진지하고 활발하고 구체적인 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후히 주십니다. 없다고 원망하지 말고 원망하는 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로서 부족함이 많은 우리들은 하나님께 더욱 기도해야 한다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간다에 대통령을 지내면서 독재자로 명성을 날렸던 이디 아민이라고 하는 사람은 구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그 숫자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헤아려보아 20만에서 50만명 정도로 계산을 합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서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이다가 나중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쫓겨가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몇일 전에 죽었습니다. 우간다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이디 아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종종 이디 아민 정부에 대해서 기탄 없는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 말이 이디 아민 대통령에게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다섯 사람을 시켜서 그 목사님을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섯명이 예배가 끝난 후에 당회장실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나가면 끝장이라는 것을 그 목사님이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5분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너무 길어서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 2분만을 허락 받고 기도하는데 목사님이 도망갈까봐 다섯 사람도 그 옆에서 지키면서 그 기도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짧게 네마디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디 아민 대통령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보낸 다섯 사람들도 이 자리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분들의 죄도 용서해 주옵소서. 내가 지금 끌려가면 죽게 되는데 이런 죽음은 나로서 끝나게 해 주시고 나 같은 죽음이 다시없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에 평화를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다섯명이 옆에서 듣고 난 후에 슬그머니 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너무도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그 기도가 얼마나 뜨겁고 진실했겠습니까?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흩어진 나그네는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기도생활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의 삶은 첫째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를 말합니다. 교제하는 중에 보고 듣고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신앙이 자라고 신앙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교제는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둘째는 기뻐해야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은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고난 끝에는 영광과 칭찬이 있고 믿음은 성숙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난까지라도 기뻐해야 합니다. 셋째는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도우심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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