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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행복지수는? /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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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빌립보서 4:4-7
◎ 제목 : 당신의 행복지수는?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세계 각 나라 중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즉 국민들이 만족한 삶을 사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놀랍게도 가장 가난하게 사는 방글라데시라고 합니다. 이들은 큰 걱정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선진국일수록 걱정이 많고, 후진국일수록 걱정이 적습니다.
우리 나라 말에도 "천석군 천 가지 걱정, 만석군 만 가지 걱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선진국이 되길 원하고, 만석군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돈이 걱정도 주지만 행복도 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돈이 주는 행복은 상당히 많이 있으며, 돈이 없으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고 하고, 돈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람들이 행복지수를 얘기할 때 돈이 얼마나 있느냐? 혹은 아파트 몇 평에 사느냐? 승용차가 몇 씨씨 짜리이냐? 보유한 주식이 얼마나 되느냐? 등등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나 승용차 2000씨씨야!' 했는데 상대방이 '나 2500씨씨야!' 하면 갑자기 송아지 소리를 내면서 음메 기죽어! '나 아파트 42평 짜리에 살아!'했는데 상대가 '나는 60평에 살아'하면 또 사람이 갑자기 송아지가 되고 맙니다. '내가 보유한 주식이 수천 주야!'할 때 상대가 '나는 수만 주야'하면 음메 기죽어! 또 송아지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지수를 돈이라는 가시적인 것으로 평가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불신자와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대화에서 불신자보다 가진 것이 적을 때 여러분도 소로 변신을 합니까? '음메 기죽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과 대화에서도 적어도 행복을 논한다면 소유에 관계없이 기죽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완전히 나의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을 믿는다면 어떤이 앞에서도 대재벌 앞에서도, '음메 기 살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스도인은 주안에서 항상 기쁨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안에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들아 아무것도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염려거리를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다 나에게 아뢰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돈은 그저 한 부분에 속할 뿐입니다. 돈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 행복을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돈은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대재벌이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였습니다.

경남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분은 전영창 목사님으로서 철저한 성경을 교육이념으로 하여 학교를 세웠고, 지금도 거창고등학교는 철저한 성경을 바탕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데 언젠가 그의 아들이신 전 성은 선생님의 강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서울대를 몇 명 들어갔느냐? 공부 잘하는 사람이 몇 명이냐?로 학교를 평가하는데 과연 옳은 평가인가? 이런 평가는 굉장한 모순을 안고 있으며 옳은 평가가 될 수 없음에도 아직도 그런 평가로 학교를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창고등학교는 그렇게 평가하지 말고 '꼴찌끼리 한번 비교해 보자.'라는 것입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 몇 명은 어느 학교든 있을 수 있습니다. 몇몇 학생은 공부를 잘하여 서울대를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그 나머지는 천차만별이요. 공부 못하는 학생은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1등 성적을 말고 꼴찌끼리 성적을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명문고등학교는 서울대학 몇 명이나 들어갔느냐가 아니라 전체 학생이 얼마나 원하는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나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학생이 골고루 공부를 얼마나 잘 하느냐?로 명문학교를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말합니다. 누가 돈 많은가 비교해 보자. 그래서 누가 더 행복하냐? 따져 보자.며, 행복지수를 누가 많이 가졌나로 평가합니다.  '예수 믿어도 나보다 더 가진 것이 적으니, 예수 안 믿는 내가 더 행복한데 뭐하러 예수 믿냐?' '너는 예수 믿어도 나보다 행복하지 못한데 뭐하러 예수 믿냐?'합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모순을 안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아! 일리가 있구나! 부끄럽구나.' 그래서 '음메 기죽어'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당당히 말하십시오. '누가 많이 가졌나?' '돈이 얼마 있나?'로 비교하여 행복지수를 평가하지 말고, '누가 기뻐할 일이 더 많으냐?'로 따져 보자. '누가 염려를 적게 하는냐?'로 따져 보자!라고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따져 봅시다.     
불신자에게 1억이 있고, 그리스도인인 나는 1천 만원이 있습니다. 1억을 가진 자가 1억을 가진 것 때문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근심이 적을까요? 염려가 적을까요?  중국 설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도대체 쓸 줄을 모르는 부자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돈 버는 법을 배울 참이었습니다. 부자는 청년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더니 절벽 위에 서게 했습니다. 그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부자는 청년에게 소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게 했습니다. 청년이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가지로 옮겨가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벌벌 떨면서 가지로 옮겨갔는데, 부자는 이번에 그 가지 끝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밑은 천길 낭떠러지, 나무 가지는 금방이라도 꺾어질 판이라,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가지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았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돈은 그렇게 꽉 움켜잡아야 한다."

오늘날 돈으로 행복지수를 말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천길 낭떨어지 위 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심정이니 식은땀 나지요. 소유를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염려는 더 커집니다.
그러나 1천만원 가진 나는 감사함으로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선교헌금도 감사헌금도 건축헌금까지 내어 드리고 나니 마음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쓸것이 1억을 가진 자보다 적어도 염려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 님은 부자 청년의 비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마19:16-22) 
한 부자 청년이 예수 님에게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는 부자이기에 그 부를 가지고 무슨 선한 일을 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어려운 계명 하나를 받았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고 하셨습니다. 이때 이 청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 님은 왜 다 팔아 나누어주라고 하셨을까요? 그런 선행 때문에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영생은 다 팔아 나누어주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데 있습니다.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네가 가진 것이, 나를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기에 그것을 다 팔아 나누어주어야 온전히 나를 따를 수 있고, 나를 따르므로 영생의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의 기쁨을 돈 때문에 포기하였습니다. 작은 기쁨 때문에 엄청나게 큰 기쁨을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큰 기쁨을 포기하는 만큼 큰 염려가 몰려오지요. 가시적인 것으로 행복지수를 평가하는 자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가 있어 영생이 있고, 예수가 있어 하나님의 자녀되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삽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염려 주께 맡기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 할까" 믿는자 외에 누가 이런 노래 부를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누구를 만나든 누가 기쁨이 많은가 따져 보세요. 염려거리가 누가 적은지 따져 보세요. 만약 가시적인 것으로 즉 돈으로 행복지수를 따진다면 이미 그 사람 속에는 예수님 대신 돈(맘몬)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삶을 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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