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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의 복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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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
(마 5:5)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아닌가 싶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주말에 방송하는 명화극장을 아버지와 둘이서 밤이 늦도록 보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릴 적 보았던 영화 중에서 영화 속의 특정한 장면까지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 주연의 ‘애수’라든가, ‘쉐인'이나 ’오케이 목장의 결투‘같은 유명한 서부영화들, ’콰이강의 다리‘ 같은 전쟁 영화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런데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홍콩 무협 영화의 한 대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적이 아주 특별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긴 막대같이 생긴 무기였는데 그 막대 여기 저기 집게가 달려있어서 다른 사람이 내리치는 칼을 그 집게로 집어서 부러뜨리거나, 집게에 물린 상대방의 칼을 빼앗을 수 있는 아주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주인공은 복수를 위해 무엇인가 그 무서운 무기를 대적할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궁리 끝에 종이처럼 대단히 얇게 쳐서 칼을 만들었습니다. 칼이 너무 얇기 때문에 잘 휘어져서 마치 허리띠처럼 허리에 차고 다닐 수도 있어 칼을 감추기도 좋고, 집게에 물린다고 해도 너무 얇아서 다시 빠져나오거나, 혹 물려있어도 적이 자신의 막대를 이러 저리 흔들지만 칼은 그냥 휘어지기만 할뿐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그런 칼이었습니다. 영화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승리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제가 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의 복에 관해 설교하는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영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 눈치를 채신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온유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먼저 그것을 언급해야 하는데, 저는 온유란 바로 제가 어릴 적 보았던 무협 영화에서 주인공이 개발해낸 그 얇은 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단단해 보이는 집게 달린 막대 무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막대 무기와 버금 갈만큼 단단한 칼이 아니라 잘 휘어지는 얇은 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 것입니다. 바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에서 보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유하다는 것은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하며, 자기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이리 저리 휘어져 줏대가 없어 보이는 얇은 칼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온유하다는 것은 어쩌면 현명한 삶의 자세와 미덕이 아닌 바보 같은 삶의 대명사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온유하면 늘 빼앗기고, 온유하면 늘 무시당하고, 온유하면 늘 지면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기준에서는 복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는 국어사전에서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가리키고, 영어 단어로는 ‘gentle'이나 ’meek'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두 ‘온순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온유하다는 헬라어 단어 자체는 ‘길들여지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상의 여러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본문에서의 온유란 자기를 잘 절제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다‘라는 뜻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온유함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누가 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 10:1)라고 언급한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모습 속에서 그 분의 온유함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가장 잘 드러낸 성경 구절은 뭐니 뭐니 해도 이사야 53:7 입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떨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장차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 그 분이 사람들의 온갖 멸시와 조롱과 미움과 버림을 받았고,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에 맞고, 채찍에 맞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셨으며, 옆구리를 창에 찔리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모진 고난 속에서 결코 맞서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항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죽하면 베드로 사도는 그런 예수님을 가리켜서 욕을 받으셨지만 대신 욕하지 않으셨다고 말했겠습니까?(벧전 2:23)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서는 자신의 스승을 체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의 귀를 잘랐을 때, 예수께서는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고 말씀하셨던 적도 있습니다. 그 분은 고난 앞에서 몸부림치며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의 표현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날아오는 침과 주먹과 채찍을 받아들이셨고, 자신의 살을 찢으며 뚫고 들어오는 못과 창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 누가 그것을 모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한 가지란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보여주셨던 고뇌와 갈등입니다.

예수님은 신이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예수께서는 체포되시기 직전까지 겟세마네에서 자신 앞에 다가온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깊이 고뇌하고 고민하셨습니다. 땀방울이 마치 핏방울처럼 떨어질 만큼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스러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받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난을 앞에 두고 자신 안에서 큰 싸움을 벌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 안에서 벌어진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분은 기도하면서 자기 안에서 벌어진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분은 이미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진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자신 안에 세우신 십자가에 자신의 자아, 의지, 고집, 자존심, 체면, 그 모든 것들을 못 박았던 것입니다. 이미 겟세마네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날아오는 침과 욕설과 저주와 조롱과 주먹과 채찍과 못과 창 앞에서 저항하지 않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 역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러면 이제 무엇인가 희미했던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신이었기 때문에 큰 고난 앞에서도 끝까지 온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나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자신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온유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기질과 성격 상 도저히 온유할 수 없다는 식의 자기합리화로 자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기질의 문제나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적 싸움이며,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곧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고,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별세의 신앙’이라고 부르더군요. 참으로 합당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땅을 차지하리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함과 폭력과 여러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끝내 죽였습니다. 그 단계에서 예수님의 온유함은 무능력했으며,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 2:9-11).

예수께서는 강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그 위에 높임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온유함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온유함으로 만물을 그 앞에 무릎 꿇리셨으며, 온유함으로 모든 이들의 주님이라는 시인을 받아내셨습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던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하십니까? 강한 무기를 대적하여 승리한 것은 버금가는 강한 무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휘어지는 얇은 칼이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그것은 부드러움에 날을 세운 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부드러운 칼로 강한 모든 것들을 이기셨고, 그 부드러운 칼로 강한 모든 것을 정복하셨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강한 것들의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강한 도전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나 형제들이 강한 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순간 내 성질을 이기지 못해 강한 도전에 역시 강한 응전으로 맞서거나, 강함 앞에서 역시 강해지지 않으면 질 것 같은 불안감에 더욱 강하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함은 강함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강한 것들은 서로 부딪혀 둘 다 부러질 뿐입니다.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게 될 뿐입니다. 반대로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 이깁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먼저 강한 도전에 직면한 우리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몸부림치는 기도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리하셨다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영적 무능력을 발견하고, 죄악의 현실 앞에서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자신이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달렸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강한 것을 강한 것으로 정복하는 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삶의 길이고, 예수께서는 몸소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앞에 강한 것의 도전이 있습니까? 온유함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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