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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기다리는 4가지 자세(눅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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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4가지 자세
누가복음 12장 35-40절

< 고도를 기다리며 >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20세기에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간 상태에 대한 풍자극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여러 차례 공연되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고도(God, 즉 하나님)를 기다리는데 고도(하나님)는 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풍자극입니다.

극중의 유일한 소품은 죽은 나무입니다. 그 죽은 나무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베케트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인생은 불합리하고,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죽은 조형물 없이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려고 메시야가 이 땅에 온다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사상과 생각을 지배해서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런 믿음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극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속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오신다는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오지 않을 때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암시를 통해 베케트는 기다림의 축복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말세가 되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벧후 3:3-12) 많은 사람들이 의심과 절망 속에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싫증내게 될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망 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우리가 주님에게 가든지, 주님을 만난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쁘게 예배하고, 전도하고, 헌신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다시 만난다는 기대를 잃지 말고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과 임재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 어떻게 하나님의 기다려야 합니까? >

그러면 주님을 기다릴 때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밥 플레이하트(Bob Flayhart) 목사님은 3박자로 이루어진 복음의 왈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복음의 3박자 왈츠는 'repent-believe-fight(회개하고, 믿고, 싸우라)'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주님이 기뻐하지 않은 삶을 회개하고(repent), 그 회개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believe), 은혜를 앞세워 이제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매일 투쟁하는(fight)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기다려야 할까요?

첫째, 열심히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35절 말씀을 보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이 말은 깨어 근신하라는 말입니다.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린다는 말은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말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길을 찾아보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도 안되지만 너무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은혜만 내세우고 준비가 없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준비된 삶(a lifestyle of readiness)'을 이끌어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없으면 그것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 맞을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축복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행복도 주실 것입니다.

서울에 신실한 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습니다. 두 달 남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낙심이 되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은 두 달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먼저 재산부터 정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지!"하면서도 한번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일부를 잘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처녀시절에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살다 보니까 그 다짐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 제대로 선교 한번 못한 것을 생각하고 또 일부를 잘라 늘 기도하던 선교사에게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유서를 썼습니다. 미웠던 사람에 대한 모든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를 했고,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두 달이 지났습니다. 죽을 시간이 다가왔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병원에 찾아가서 다시 검진을 해보았습니다. 며칠 후에 의사 선생님이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간암이라고 한 것은 오진인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진을 했는지, 아니면 그 사이에 병이 나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진을 했어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버렸으니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그분은 말합니다. "저에게 지난 두 달처럼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 종말의식을 가지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보다 진실하게, 보다 깨끗하게, 보다 성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이 건강해집니다. 그때 우리의 육체도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살면 언제 주님을 만나도 "주님! 기다렸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고 하며 기쁘게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기루와 비전의 차이는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계획과 준비가 없는 비전은 사람을 돈키호테로 만듭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이란 큰 꿈을 꾸면서도, 그 꿈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도 찾고 준비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릴 때 주님 맞을 준비를 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기다림이 길어져도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계속 깨어 있는 것을 보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영수증이 나오는데 늦게 나온다고 손으로 잡아 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만족과 편리를 추구해서 기다림의 예술을 잃어버렸습니다. 러시아 같은 곳에서는 한 조각의 빵을 기다리기 위해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립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몇 주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자!" 가게에서 몇 분만 기다리면 얼굴이 "구기자!"가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축복이 즉각 폭포수처럼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하기를 원합니다. 조급함은 육적인 것이고, 인내는 영적인 것입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일이 즉각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완벽한 때에 하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인이 혹 이경이나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이경과 삼경은 가장 어두운 때입니다. 인생과 관련되어 말하면 이경과 삼경은 가장 힘든 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하면 주님께서 더욱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 때에도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캘리포니아의 칼스바드(Carlsbad)에 계시는 크램블릿(Craig Cramblet) 목사님의 느헤미야 강해를 그분 웹사이트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1982년 10월 위스콘신 매디슨에 있는 배저 스타디움(Badger Stadium)은 관중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6만 명이 넘는 위스콘신 대학의 열광적인 팬들은 열심히 응원했지만 상대인 미시간 대학에 형편없이 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수 차이는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관중들의 응원과 박수갈채는 더욱 커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도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면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저 스타디움에서 70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경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간에 메이저리그 야구의 밀워키 브루어스(Milwaukee Brewers) 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 팀에게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배저 스타디움에 있는 팬들이 휴대용 라디오로 들으면서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앞의 게임에서는 형편없이 지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게임에서는 승리하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지금 형편없는 모습일지라도 승리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고 기다리면 반드시 그 승리의 현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4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우리가 예상한 때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기다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절대 신뢰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잃어버리고 예수님 시대에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우리 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고 분노 가운데 일어선 무리들이 바로 셀롯인들(Zealots)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옳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테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도 조급함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분석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능력으로 빨리 로마 제국을 뒤엎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로마 총독의 손에 붙이면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메시야적인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 순간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방법을 주님에게 강요하는 불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을 신뢰하고, 무엇보다 주님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 중의 하나가 헨리 누웬(Henri Nouwen)의 책입니다. 누웬은 죽기 얼마 전에 "안식으로의 여행(Sabbatical Journeys)"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분은 "날아다니는 루델라스(Flying Roudellas)"라고 불리는 공중 곡예사였던 그분의 몇몇 친구에 관해 썼습니다. 그들은 누웬에게 공중 곡예에서 '나는 사람(the flyer)'과 '잡는 사람(the catcher)'은 철저히 그 하는 일이 따로 정해졌다고 합니다. 즉 '나는 사람'은 철저히 나는 일만 하고, '잡는 사람'은 잡는 일만 한다는 것입니다.

공중 곡예를 할 때 '나는 사람'은 나는 순간 그네에서 손을 떼고 몸을 공중으로 던집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계속 날면서 자기를 잡아줄 '잡는 사람'의 강한 손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면서 "날아다니는 루델라스" 멤버 중의 한 사람은 누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은 결코 '잡는 사람'을 잡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의 할 유일한 일은 '잡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잡아주는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즉각 잡아주실 때도 있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고 잡아주실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잡아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낭비된 시간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주님께서 무대 뒤에서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제일 초점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주님을 우리는 철저히 신뢰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출판사 사장님이 저를 찾아와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목사님의 책 한 권을 들고 와서 저보고 꼭 번역해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저는 너무 훌륭한 책인 줄 알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다른 좋은 분에게 맡기라고 사정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랜 기다림은 임신한 여성을 왜소하게 만들뿐입니다." 임신한 여성이 왜소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기를 낳았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즉 오래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작품을 출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기다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멋진 삶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업기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기간이 길다고 내가 성급하게 나서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해야 합니다.

메리 브레이너드(Mary Gardner Brainard)는 말했습니다. "나는 빛 가운데서 홀로 걷는 것보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더 좋다. 나는 보는 것을 통해 홀로 걷는 것보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더 좋다(I would rather walk in the dark with God than go alone in the light. I would rather walk with Him by faith than walk alone by sight)."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곳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한 결과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넷째, 열심히 선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고,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은 선교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7-8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가장 마지막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은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선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선교의 최전방에서 선교사님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여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같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내는 기도와 물질이 오지에 있는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애쓰는 선교사님들의 눈물을 닦아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처럼 벅찬 감동이 어디에 있고, 그 일처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수요일에 몽고로 떠날 임병철 목사님과 송명희 사모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임병철 목사님은 저의 신학교 동기이고, 목사 안수 동기입니다. 1993년 그분은 괌 아래 축(Chuuk)이라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1년에 2백일 이상이 섭씨 36도가 넘는 고온 다습한 지역이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냉장고도 없는 지역에서 3년 반 동안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몸이 망가질 대로 다 망가져서 1996년 뉴욕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서 요양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교회가 지금 120명 정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냥 있으면 아무 어려움이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편할수록 귀에는 오지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정된 목회지를 떠나 다시 몽고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가장 더운 축(Chuuk)에서 가장 추운 몽고까지 가는 그 열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나이 49세에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의 가장 부촌에서 목회하다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빈털터리로 오지로 가는 분들도 있는데, 우리가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목사님과 사모님은 사명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안쓰럽습니다. 13살의 첫째 딸 다비다를 대만의 선교사 자녀 학교에 떼어놓는 것도 안쓰럽지만, 함께 몽고로 가는 11살의 둘째 딸 사라와 8살의 셋째 딸 조이를 생각하면 더욱 안쓰럽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구월동에 서너 평 되는 달동네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분당 60평 아파트에 살다가 사명 받았다고 하면서 달동네 초가집으로 가서 산다면 어느 자녀가 좋아하겠습니까? 지금도 아이들은 화장실에 갈 때에 마스크를 쓰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김재호 선교사님 사모님인 김연희 사모님은 처음 몽고에 들어가서 매일 2년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8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몽고에서 열렸던 선교사 연례 회의(Field forum)에서도 김연희 사모님은 일주일 내내 울었다고 합니다. 그 눈물은 선교지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말해줍니다.

며칠 전에는 임준호 선교사님의 사모님인 임정자 사모님이 고등어 자반 3팩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 팩은 임준호 선교사님 부부, 한 팩은 김재호 선교사님 부부, 한 팩은 임병철 선교사님 부부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15팩을 사 보내드렸습니다. 바다가 없는 몽고에서 임정자 사모님이 "고등어 자반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흔한 고등어 자반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길이 바로 선교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와 후원으로 그분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반감시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20년 전 흑암 중에 살던 우리 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선교사님이 찾아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병원을 세웠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살만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의 빚을 갚으려면 우리도 마땅히 선교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다 갈 수 없기에 우리를 대신해서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방에서 '희망의 사자로 가신 선교사님들'에게 희망을 드리기 위해 마땅히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선교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위해서라면 후방에 사는 우리도 물질과 시간과 땀을 아끼지 말고 최선을 다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곧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도록 항상 선교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더욱 동참하여 주님 만날 때 기쁜 마음을 만나 뵐 수 있는 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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