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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화도 한통 없으신 하나님 / 욥 2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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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욥기 23:1~17 
  제목 : 전화도 한통 없으신 하나님(박원일목사)

요사이 부쩍 심방을 하면서 가슴 답답한 집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성도들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어서 가슴 답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너무 잠잠하고 있어서 답답한 가정들입니다. 분명 답은 하나님 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그 성도는 열심히 하나님 바라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무심하게 전화도 한통 안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뭘 큰 것을 바랍니까? 그냥 전화 한통 해주는 정도의 작은 응답이라도 해 주면 좋을텐데 그것마저도 안해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았든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것들을 구했다면 그래도 좀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딴에는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문자메시지나 음성메시지도 열심히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열심히 메시지를 남겨도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적혀 있는데, 그리고 목사님이나 집사님들도 누누히 얘기해 주었건만 그래서 기도하고 매어달렸는데도 응답은커녕 문제가 더 악화되어 갈 때도 있습니다.

사실 내 형편이 괜찮을 때면 남의 도움이나 전화 같은 거 없어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전화 한통 없어도, 은혜 못받아도 잘 살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성도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형편이 괜찮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나 도움에 별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들은 좀 일찍 정신 차리길 바랍니다. 암튼 자기 사정이 어려우면 남의 따뜻한 손길이나 위로의 전화 한통을 바라게 마련입니다. 특히 신앙이 있는 성도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왠지 하나님이 응답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경력도 있고, 직분도 있어서 대놓고 하나님께 섭섭하다고는 못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좋은 말이든 싫은 말이든, 크든 작든 한 마디 만이라도 확실하게 들려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한마디만 확실하게 들려주신다면 뭐든지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겠는데 그 한마디를 안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안타까움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은 동방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장 큰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과 가족과 자신의 건강 등 모든 것을 다 잃게 됩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이 문제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침묵 정도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알수 조차 없다고 합니다. 2-3절과 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23:2~3),

욥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을 보기만 한다면 자신의 이 억울함을 호소할텐데.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과 고통을 듣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풀릴텐데. 10절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내가 가는 길 즉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 그가 나를 단련해 보면, 그가 나를 테스트해 보면, 심문해 보면 난 정말 정금같이 깨끗하고 무죄하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11절과 12절에서 자신의 깨끗한 삶을 다시한번 피력합니다. 결국 억울하고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 했는데 결과가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욥기가 계속되면서 욥은 갈수록 더 처절해 집니다. 나중에는 당하는 것까지도 좋은데 알고나 당하자고 소리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래야 되는지 이유라도 안다면 그래도 좀 낫겠습니다’라고 절규합니다. 하지만 그 절규에도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이건 비단 욥의 얘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때론 하나님이 내 가까이에 역사하시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전혀 구하지 않았는데도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 딴에는 나름대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기도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응답도 없고, 은혜도 없고, 역사도 없고 정말 전화도 한통 없으시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먼저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분명 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욥은 거룩한 삶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되지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분명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이 86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므로 사라대신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고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도록 무려 13년이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 아뭏던 하나님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죄라면 우린 회개해야 합니다.#그게 정답입니다. 그 옛날 시51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내게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린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심각한 사람은 죄를 짓고도 그래서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하나님이 은혜 베풀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위험하고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십니까?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욥과 같이 거룩하고 진실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고, 그래서 기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계획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는 욥기가 마칠때까지도 모르고 마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서 말씀해 주실때도 욥이 왜 그런 고난을 당했는지 끝내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우린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뭔지 알기라도 하면 고난을 당해도 훨씬 나을텐데. 욥도 그랬습니다. 왜 당하는지 알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그에 대한 답은 주지않고 오히려 우주의 신비에 대한 말씀으로 그 답을 주십니다. 땅의 기초가 뭔지 아느냐, 바다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빛은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별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러한 질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돈의 개념도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주식시장이니 경제지표니 하는 것을 설명하겠냐는 것입니다. 원자나 분자의 개념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하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설명해야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도의 애매한 고난과 자신의 침묵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치 않으십니까?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더 많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주의 신비를 다 몰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우주를 운행하시듯이, 우리가 우리 고난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알던 알지 못하던 우리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알던 알지 못하던 수행해야 할 우리 자신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은 사랑과 인도와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일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사탄이 욥에 대해 시비를 거는 문제는 다름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사탄은 욥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얼마나 경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물론 얼마나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아닙니다. 사탄이 욥에 대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축복 없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응답이나 은혜 없이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화 한통 안해 주어도 욥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냐는 것이며, 이에 대해 사탄은 어림도 없다고 장담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사탄에게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도, 그리고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도 다름아닌 욥의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아야 되겠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는지 알아야 되겠다, 그리고 언제쯤 이 고난이 끝나는지, 어떻게 하면 이 고난이 끝나는지, 고난이 끝나고 나면 어떤 보상을 줄 건지, 온통 그런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신뢰라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왔는지도 모르고, 왜 하나님이 침묵하는지도 모르고, 언제쯤이면 이 고난이 끝날지 몰라도 여전히 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아무 느낌이 없어도, 전화 한통 없어도,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훌륭한 사랑입니다. 또한 고난과 침묵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삶으로 드리는 가장 훌륭한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6:29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요6:28-2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가졌느냐 또는 얼마나 가난하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전도를 얼마나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그 분과의 관계, 즉 신뢰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한 번 살펴봅시다. #먼저, 내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억울해도 섭섭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섭섭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이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2절에도 욥의 억울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섭섭함도 하나님 앞에서이며, 하나님을 향해서입니다. 다윗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미워도, 억울해도, 섭섭해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울었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억울합니까, 섭섭합니까, 답답합니까, 하나님께 토로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뢰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지만은 마시길 바랍니다. 한단계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13절부터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욥이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나의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애매히 고난 당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은혜를 받던 받지 못하던 상관없이 그 분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전화 한통 없어도 그 분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시고,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내 환경이 좋지 않다고, 내 느낌이 없다고, 응답이 없다고해서 그 분이 진짜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하나님 어디 있냐고 고함칠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욥을 보고 계셨습니다. 단지 그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내 감정대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사실대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니까 진짜 자신이 두려워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심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작정하신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니까. 13절부터 17절까지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16절과 17절의 의미가 개역성경에는 뚜렷하지 않아서 제가 현대어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여리게 만드시는군. 전능하신 이께서 공포에 빠뜨리시는군.
정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
깜깜한 어두움이 내 두 눈을 가리운다 해도 난 하나님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이 내 용기를 꺾으셨기 때문이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떨게 하셨기 때문이지.
내가 무서워 떤 것은 어둠 때문도 아니고, 흑암이 나를 덮은 탓도 아니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욥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니 진짜로 두려워할 것은 흑암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흑암 때문에, 고통 때문에 머리를 싸매었는데 알고보니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리고 두려운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신 대로 하시는데 내가 아무리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모든 일이 그대로 될 것이기에 하나님이 가장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무엇이 두렵습니까? 돈이 없어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돈이나 권력이나 세상이 자신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돈이 있고 없고를 더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신뢰한다면 환경의 변화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것입니다.#

반대로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돈없는 사람은 돈이고, 병든 사람은 건강이고, 실직자는 좋은 직장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난 속에서도 우리가 가장 바래야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설령 돈을 잃고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면, 건강을 잃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는 부산물 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가장 기대하는 그런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욥기에서의 보상은 잃어버렸던 것에 대한 더 많은 보상입니다. 재물도 자녀도 자신의 건강도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고난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에게 주어진 보상은 물질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모두 이렇게 보상해 주실까요? 돈으로 고통당했던 사람들은 부자로 만들고, 병으로 고통당했던 사람은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이 시대의 하나님의 보상일까요? 이 부분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구약의 모습을 아주 그리워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상과 축복의 상징은 거의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이 보상과 축복은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시기적으로도 꼭 그 시대에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팔복에서 애통하는 자의 복을 물질이 아닌 위로라고 말씀하시며,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의 복을 천국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축복은 오히려 영적인 것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상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에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방식의 물질의 축복이 보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이 그래도 난 물질의 축복이 더 좋은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저도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약의 축복보다는 신약의 축복이 더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며 예표입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더 완성되어지고 더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축복의 개념도 신약이 구약보다 훨씬 더 좋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데 우린 자꾸만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 성도는 하나님이 아무리 베풀어 주어도 여전히 섭섭하고 억울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부산물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가장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난 힘들어 죽겠는데 하나님은 전화 한통 안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섭섭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합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까? 왜 그런지 저도 잘모르고 때론 하나님도 말씀해 주시지 않을 수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답답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며, 최고의 예배입니다.

억울하고 섭섭해도 하나님께 토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죽겠다고 호소하면 됩니다. 그것이 출발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머물지 말고 하나님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내 감정대로가 아니라 사실대로, 성경대로 말입니다. 내 형편에 상관없이, 내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고 동일하십니다. 그리고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물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내가 가장 기대할 것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십시오. 그게 진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좋은 보상으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고난 속에서도 승리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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