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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의 은혜 / 눅 16: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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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침묵의 은혜
본문 : 누가복음 16:27-31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부조리한 것을 눈으로 보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부요하게 태어나서 일생동안 편안하게 살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고난 가운데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며 살다가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평생 부자로 살고 어떤 사람은 평생 절대 빈곤 속에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운명적 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하는 생각을 갖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은혜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탄식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유일한 모델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고통, 불행한 요소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신분으로 말하자면 가장 천대받는 거지요, 그가 먹는 양식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요, 삶의 거처는 부자의 대문간이었습니다. 그는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온 몸은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그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친구 하나를 꼽는다면 가끔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아준 개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날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먹고, 마시면서 연락했습니다.
두 사람은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대조적인 환경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나사로는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의 고난, 건강의 고난, 거처의 고난, 식량의 고난, 인간적으로 어느 것 하나 내놓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자기 처지에 대해서 탄식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불행하다고 슬퍼하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사로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침묵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입을 열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기에 일생동안 말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말이 과연 하나님의 심정을 지니고 하는 말인지, 또 평화를 창조하는 말인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옛 선조들과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사람들의 심성이 악해졌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옛 선조들도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 화풀이로 자녀들에게 살기찬 말이나 욕설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과 같이 독소를 품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전자 매체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문자로 표출되는 언어를 보십시오. 한 사람을 죽이고, 헐뜯고, 상처내고, 매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단 1분도 안걸립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총탄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인간의 말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잠히 들려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침묵하라"


침묵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말을 절제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침묵하는 사람을 은혜의 사람, 도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도를 통하고 나면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한국 교회사에 존경받는 이용도 목사님의 한 일화입니다. 옛날에는 부흥집회를 하면 일주일씩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회를 인도하고 나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도 이용도 목사님이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서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려 3시간 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수많은 청중이 통곡을 했습니다. 그가 외치는 말씀 선포는 없었지만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주님의 심정과,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주님과 교통하는 그 마음의 소리를 듣는 청중은 시종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우리는 '침묵' 하면 일반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침묵에도 외적인 침묵과 내적인 침묵이 있습니다. 외적인 침묵은 겉으로는 자기 마음을 억제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속에서는 계속 소리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적인 침묵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상태, 마음까지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지난 번 미국 선교집회 갔을 때 아틀란타에 있는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아틀란타에서 가장 큰 교회와 천주교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아틀란타에서 가장 큰 교회는 찰스 스탠리 목사가 시무하는 제일침례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는 대지가 2만 5천평이었고 건물에서 건물 끝까지의 거리는 200m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실이 아주 많았습니다. 제일침례교회를 다 돌아본 후에 상당한 거리를 달려서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니까 입구에 "여기를 들어오는 순간부터 입을 다무십시오. 여기는 말로 은혜 받는 곳이 아니라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로 말하는 기도를 많이 하지만 진짜 깊은 은혜는 침묵기도를 통해서 받습니다.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전혀 말하지 않아도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다 압니다.
유명한 영성학자인 토마스 머튼은 "외적인 침묵은 교만의 침묵이고 내적인 침묵은 겸손의 침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의 침묵은 세상을 향하여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때문에 고통의 침묵이요, 겸손의 침묵은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기쁨의 침묵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교회 앞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맹인이었습니다. "자매님,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마흔입니다." 저는 마흔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이 20대처럼 젊어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이가 마흔이나 되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20대 소녀와 같이 예쁩니까?"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분이 "이 분은 보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서 젊어 보이는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는 다섯 가지 침묵을 얘기했습니다. 입의 침묵, 마음의 침묵, 눈의 침묵, 귀의 침묵, 정신의 침묵을 얘기했습니다. 입의 침묵은 비록 세상이 악하고, 부조리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침묵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것입니다. 눈의 침묵은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 등급을 메기고 평가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귀의 침묵은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침묵은 자기를 비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침묵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사로는 눈만 뜨면 부자의 인간적 교만, 몰인정, 타락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것을 보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는 좋은 음식을 먹여주면서 헌데를 앓으며 대문간에서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나사로는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부자를 통해 현대인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개가 최고로 대접을 받습니다. 비싼 고기 먹여주고, 품에 안아주고, 좋은 옷 입혀주고, 좋은 침대 위에서 재워주고, 병이 들었을 때는 고급 주사를 맞춰서 치료해 줍니다. 개에게는 모든 좋은 것을 다 해 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는 인색합니다. 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부요해지면서 개를 상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를 품에 안고 살면서도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손길도 펴지 않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나사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가난과 부요를 모두 초월한 경지에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부요를 초월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자족할 수 있고, 부요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한가지를 알았습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자기는 비록 낮은 곳에 있고 부자는 높은 곳에 있어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똑같다는 사실을 나사로는 믿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통된 두 가지 운명이 있습니다. 부자도 늙고 가난한 자도 늙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부자도 부자로서 고통이 있고, 가난한 자도 가난한 자로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섞여 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죽어야 합니다.

친척 가운데 시골에서 천석군 부자였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 집에 집이 너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하던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너무 살기가 어려우니까 60년대에 돈을 벌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와서 지게꾼 노릇도 하고, 이것 저것 장사도 하면서 부부가 열심히 일해서 꽤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봉천동에 2층집을 하나 샀습니다. 그 무렵 천석군 부자는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느라 기둥뿌리까지 다 팔아먹어서 이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머슴살이 했던 조카가 2층집을 사서 집들이한다고 천석군 아저씨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조카가 집을 샀다고 하니까 내심 '별거 아니겠지' 하면서 버스 타고 물어 물어 봉천동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대궐같은 2층집이 자기 앞에 떡 하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얘야, 내가 배가 아프다" 하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중에 혈압이 올라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에 대해서 전혀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혀 말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습니다. 나사로는 자기의 운명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받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난할 때 은혜를 못받으면 가난독이 들어옵니다. 고생하면서 은혜를 못받으면 고생독이 들어옵니다. 시어머니한테 시달리면서 은혜를 못받으면 시어머니독이 들어옵니다. 며느리에게 시달리는 시어머니는 며느리독이 들어옵니다. 병들어 고생하면 병독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나쁜독이 들어오지 않으려면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나사로는 가난 속에서도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침묵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엔도슈사꾸의 작품 중에「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에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도쿠가와 시대에 봉건 치하에서 카톨릭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성상을 밟고 거기에 침을 뱉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성상을 밟거나 거기에 침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주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죽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굳게 지키기 위해 배교를 거부했지만 그들의 가혹한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가혹한 핍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한번 죽어보라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죽게 했습니다. 바닷물이 빠진 바다 한 가운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은 십자가를 세워놓고 밀물이 들어올 때 물속에 잠겨 죽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숨에 죽지 않고 오랜 동안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어느 때라도 예수님을 배반하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저들이 십자가 처형을 거행하는 날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신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페레이라 신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교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배교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자진해서 배교의 희생 제물이 된 신부였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순교 장면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그때 잠잠히 그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침묵의 은혜를 받으셔야 됩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침묵의 은혜입니다.
중세기에 한 수도사가 고난주간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설교를 하지 않고 촛불을 켜더니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의 성상으로 가서 못박힌 손자국을 비춰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못박힌 발자국을 비춰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옆구리 창 찔린 곳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시관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나와 함께 가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내 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주님은 뭘 하고 계셨을까요? 나와 함께 슬퍼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침묵의 은혜입니다.
나사로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부자의 대문간에서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스러워할 때 하나님도 자기와 함께 고통스러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사로는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가 불꽃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눈을 들어 보니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집에 형제 다섯이 있으니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거기에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만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부자는 아직도 속을 못차리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옛날 자기집 대문간의 거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바꾸어졌는데,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요, 생명의 떡을 먹는 자요, 천사의 시중을 받고 있는 자인데 아직도 거지 나사로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주여, 아직도 저 자가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더 혼내주어야 됩니다."라고 한마디 할 만도 한데 나사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자기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 내가 할 일은 내 일로, 목사가 할 일은 목사 일로,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 일로 하면 됩니다.

부자의 장례식은 호화롭게 치러졌습니다. 수많은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비싼 관에 덮여 양지바른 곳에 묻혔습니다. 좋은 비석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가 없었습니다. 천국에서 문상 온 조문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나사로는 문상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한 몸 누울 관도 없어서 거적에 돌돌 말려 공동묘지에 버려졌습니다. 만약에 문상객이 있었다면 그의 상처를 핥아주었던 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부자에게 없는 하나가 있었습니다. 천국에서 파송된 조문객 천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내가 가난해도 나를 따르는 천사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실패해서 아무도 나를 찾아오는 이 없어도 천국에서 파송한 천사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 확신을 갖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탄식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역사할 때 환란을 당하나 담대할 수 있습니다.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우심이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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