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평안하십니까? (요 14:25-27 )

  • 잡초 잡초
  • 447
  • 0

첨부 1



평안하십니까?
(요14:25-27 )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1월,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생겼습니다. 바로 '밀레니움' (Millenium)입니다. 밀레니움은 라틴어로 '천년'을 가리킵니다. 이 말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역사적인 현장에 살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80입니다. 그렇게 보면 백년을 주기로 하는 한 세기도 우리 시대에 지나가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의 전환기에 살게 되었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밀레니움을 여는 1999년 12월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파티와 감격을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이 얼마나 그때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뉴욕 맨하탄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미국 전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밀레니움'만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밀레니움 포비아'(Millenium Phobia)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1999년 12월, 서방세계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특집으로 다루었던 내용의 핵심 단어입니다. '포비아'란 말은 '공포'를 뜻합니다. 물론 이 말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해 세계가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염려해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어쩌면 현대를 대변하는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밀레니움의 시대는 공포와 불안의 시대입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충격으로 몰아가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9.11 테러로 불안과 공포는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비행기도 무섭고, 건물도 안전하지 못하고, 사람들도 믿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으로 우왕좌왕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큰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7절에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바로 '평안'입니다. 평안은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은혜입니다. 예수 믿으면 평안이 찾아 오고, 평안이 믿는 것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지금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불안하십니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평안인데, 지금 불안하다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주님은 그것이 몇가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근심과 걱정입니다. 여기 주님은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14장 1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주님이 지금 평안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지금 몹시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근심이 평안을 빼앗아 가는 무서운 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근심, 걱정, 염려입니다. 지난 주간도 얼마나 많이 한숨을 쉬었습니까? 얼마나 여러번 걱정을 말했습니까?
근심은 옛날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현대인도 합니다. 현대는 모든 환경이 좋아져 근심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근심은 없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도 더 많이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모든 것 다 갖추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염려합니다. 근심은 인생을 오래 산 어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어린아이의 입에서 한숨이 나오고, 자기들 나름대로 걱정을 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다 하는 것이 바로 근심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의 가사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이처럼 근심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우리가 부질없는 근심을 많이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서 인간의 근심에 대하여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연구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은 통계가 나왔습니다. 인간이 하는 근심의 40%는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30%는 지난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12%는 내가 걱정 안해도 될 일을 걱정하는 것이며, 10%는 불확실한 일을 걱정하는 것이고, 8%만이 어쩔 수 없는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모든 염려와 근심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8% 마저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500회이상 이 말이 반복되었고, 주님도 제자들에게 여기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는 대상이 제자들이지만 일차적으로는 베드로에게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3장 마지막 부분에 베드로와 주님이 대화하는 것에서부터 이 말씀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나중에 그는 누구보다도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함께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베드로전서에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믿는다면, 더욱 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찾아 올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걱정과 근심속에서 날마다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보고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지금 몹시 두려워하고, 떨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삶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아갑니까? 우선, 고독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주님이 계속해서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떠나야 보혜사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은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떠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동안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주님이 커다란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런 주님과 헤어져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이 이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세상에서 혼자 인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필요하고, 사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은 죽음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공포는 없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세계에 누구에게나 찾아 오고,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죽음이 두려움이지만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를 초라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는 힘은 없지만 우리를 괴롭힙니다. 아직까지 완전하지 못한 우리이기에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법정적으로는 의인으로 나왔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인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몸부림치면서 죄를 이기려고 하지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더 큰 죄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우리가 지난날을 살았고 또 죄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죄짓고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양심이 찌르고, 믿음이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이기에 죄가 우리를 편치 않게 합니다.

  죄를 지은 후,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모습은 이런 나를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사탄이 약점을 잡고,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탄의 일이 '참소'라고 말합니다. 참소는 우리를 의기소침, 절망, 공포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끊임없이 사탄은 이렇게 참소합니다. "너는 안돼, 끝났어,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다, 너는 절대로 회복될 수 없어!" 이렇게 우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부끄럽지만 우리의 모습 이대로 주님께 나아가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여 용서받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존재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십니다.' 주님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이 믿음을 확고히 다지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셋째는 환란과 시련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또 불안하게 합니까?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이 도대체 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본문으로 읽지 않았지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13장부터 16장까지는 연극으로 말하면 한 막으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에서도 주님은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환란과 어려움, 바로 이것이 우리의 평안을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환란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 믿어도 환란이 있습니다. 만약 만사형통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믿고 더 어려워지는 예가 성경에, 역사에 많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삶은 잘 사는데 있지 않고 바르게 사는데 있습니다. 참되고 바르게 살다보면 때론 환란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모든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면 길이 협착하여 힘든 것입니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 때문에 사자의 밥이 되고, 몸이 찢겼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환란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복'을 말씀하지만 '환란'도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축복은 환란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당할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람들이 환란을 당하면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약해지고 무너집니다.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미국 시카고의 사업가였던 H. 스패포드(Spafford) 라는 사람이 지은 것입니다. 그가 이 찬송을 쓰게 된 배경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찬송이 그렇겠지만 특히 노래의 배경을 더욱 알면 은혜 스럽게 부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그는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4명의 자녀가 먼저 유럽으로 떠나고 스패포드는 화재로 남은 일을 정리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자녀를 태운 배가 대서양에서 영국철선과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4명의 자녀는 모두 죽고, 부인만 극적으로 살았습니다. 스패포드는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영국으로 갑니다. 같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길에서 선장은 이제 조금 있으면 당신의 자녀가 잠들어 있는 바다를 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과 환란의 연속인 그의 삶에 아픈 마음을 가지고 그날 밤을 지새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었을 때 그에게 놀라운 평안이 임했습니다.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평화였습니다. 그순간 그는 펜을 들어 시로 남긴 것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잔잔한 우리의 인생길에 때론 풍파로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분명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인생길이지만 동시에 주님의 위로와 평안이 있는 인생입니다. 환란은 아픔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환란 중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이제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두려움과 공포에서, 그리고 환란과 어려움에서 주님의 큰 평안을 받으며, 이번 한주간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