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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형제 사랑 / 요일 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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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성도의 형제 사랑
성 경 : 요일 4:20~21절


누가복음 16장에는 인생을 아주 행복하게 살다간 부자의 이야기와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살다간 가난한 거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의식주 문제가 잘 해결되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은 부자의 삶은 행복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가정은 화목했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은 다툼이 없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많은 원인은 바로 배고픔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복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좋은 집을 짓고 많은 하인도 거느리고, 좋은 옷도 입고, 좋은 가구도 들여 놓았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니, 늘 마음이 여유로워서, 무슨 일이 있으면 잔치를 베풀며, 먹고 마시고 즐거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어느 날 죽어서, 음부에 갔습니다. 맹열히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서 그는 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내가 여기에 와야 되느냐?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되느냐? 고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심판주가 되시는 절대자 앞에서, 자기에 대하여 항변할 수 없는 어떤 자각이 있었음이 확실 합니다. 그 자각이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부자의 사후 처지와 나사로의 사후 처지를 대비하면서 이웃의 삶에 대하여 얼굴을 돌렸던 그의 삶의 자세에 대하여 질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를 즐기는 동안에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의 그늘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을 잃어버린 삶!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바로 이웃을 발견하고,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중종 때의 학자 김정국은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고 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삶! 은혜 받은 자의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은 어떻게 가꾸어 가야하는가?


Ⅰ. 사랑은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와 주님과의 사이를 양과 목자의 사이로 비유하셨습니다. 목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양을 먹이고, 양을 지키고, 양을 보살펴 주는 것이 목자의 사명입니다. 목자의 관심이 늘, 양에게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늘 성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움트고,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자라고, 관심 가운데서 사랑이 꽃피고, 관심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이것은 짐승이나, 사람에게 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 못하는 식물에게도 해당이 된다고 했습니다. 말 못하는 ‘난’도 주인이 늘 쓰다듬어 주고, 늘 대화해 주면서 길러야 난이 잘 자란다고 했습니다.

가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자녀들의 관심 속에서 부모님들의 마음이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남편의 관심 속에서 아내가 행복하고, 아내의 관심 속에서 남편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산업화 사회, 핵가족화한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관심의 기회를 잃어 버리고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아파트 중심의 주거환경! 쾅! 하고 문을 닫으면 안방과 건너 방,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완벽하리 만큼 단절됩니다. 한 집에 세 가구가 세를 들어 살아도, 안방 주인이 가스배출기 고장으로 죽은 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알지 못했다는 이 단절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웃에 눈을 돌리면, 내 집 문 앞에서 구걸하는 나사로가 보일 것입니다(눅16:20). 이웃에 눈을 돌리면, 풍요로움을 구가하는 이 시대에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보일 것입니다. 눈을 조금만 멀리 돌리면 하루에 수천 명씩 기아에 죽어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기근만난 이웃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웃에게 고정합시다.


Ⅱ. 이웃 사랑은 실천입니다.

본문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8절의 말씀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호가 아닙니다. 몸으로 행하는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희생이 있어야하고, 봉사의 땀방울이 있어야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2:17).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실천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간 사랑에도,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희생이 있었고(요일4:9).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겉옷을 주시고, 속옷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물을 주시는 희생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입으로야 무슨 희생인들, 무슨 사랑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데, 얼마나 서툰 사람들입니까?

본문의 말씀에도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지 않고 믿는 자!” 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요20:29). 보이는 형제를,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천자가가 됩시다.


Ⅲ. 성도의 형제 사랑은 평안을 이룹니다.

1980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 BBC 방송의 여기자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일평생,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살았는데,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시켜 주는 것 - 즉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살아 있는 동안 단 몇 시간이라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이웃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영혼에게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사명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1).

성도의 이웃 사랑은, 크리스천의 생활강령입니다.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늘을 우러러 땅을 향하여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됩시다. 사랑안에 사랑! 사랑안에 기쁨! 사랑안에 행복! 사랑안에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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