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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소망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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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그리스도인의 소망
성경말씀 : 로마서 15:13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는 희망의 위대함을 말해 줍니다. 존시라는 한 젊은 여자가 폐렴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 창밖의 담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 넝쿨의 잎사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늦가을인 11월이 되자 잎사귀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듭니다. 이 가엾은 여자는 담쟁이의 마지막 잎사귀가 지면 자기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시를 간호하는 친구 수우가 이 말을 듣고 아래층에 사는 삼류 화가인 베어만 노인에게 존시의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구합니다.

드디어 모든 잎사귀가 떨어지고 담벽에 담쟁이 잎사귀 하나만 남았습니다. 존시는 저 잎이 떨어지면 자기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새도록 세찬 비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커튼을 제치자 벽에 담쟁이 잎새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잎새는 여전히 싱싱한 빛을 띠고 남아 있었습니다. 이를 본 존시는 희망을 갖기 시작하였고,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좋아졌습니다. 사실, 그 잎사귀는 베어만 노인이 그 날 밤에 비바람 속에서 페인트로 그린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차 대전 당시에 영국군에게 사로잡혀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포로들 중에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건강하게 생존했지만 절망한 사람들은 거의 다 병들어 죽는 것을 보고, 희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이처럼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똑같이 어려운 환경에 놓였어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너끈히 역경을 이겨내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포자기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 시간 저는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관해서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소망의 근거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전능하심, 선하심, 신실하심은 우리가 가진 소망의 확실함을 말해 줍니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실망할 일이 생깁니다. 아무리 유력한 사람이라도 죽고 나면 그만입니다. 지난 날 김영삼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간에 정상회담을 열기로 약속했는데, 김일성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신처럼 추앙받던 김일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호흡을 거두어가시니 사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려고 애쓰지만, 옛말에 권불십년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십년은커녕 오년 이상 가는 권력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권력에 붙어서 떵떵거리던 사람들이 오늘 와서 교도소에 가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편 146편에 보니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코로 숨쉬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반드시 실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세상에는 재물에 대하여 소망을 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년퇴직할 때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돈에 대한 욕심 없이 하루하루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년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랩니다. 언제 밀려날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것은 돈밖에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돈 버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이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립니다. 그러나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 역시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던 재벌의 총수가 자기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돈을 보면 대체로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동서를 막론하고 비슷합니다. 돈이 둥글게 생기다 보니 잘 굴러 가는데, 마치 돈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업가들은 자금을 회전시킨다, 돈을 굴린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결국, 돈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여기서 저기로 돈은 굴러다닙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항상 나의 수중에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물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언젠가 낭패를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므로 기독교인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선교사도 파송하고, 구제도 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업을 활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도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돈에 대한 우리의 인식입니다. 돈을 생활의 도구로 생각하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지만, 돈을 우상화하고 절대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의 주인이 되어야지, 돈의 종이 되면 안 됩니다. 돈은 생활의 도구지,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주일에 나가서 일하면 얼마를 벌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주일을 빠지다보니 어느새 믿음을 다 잃어버리고 불신자처럼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리 사정이 어렵더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에 힘쓰면 영혼도 살고 물질적으로도 윤택하게 되는 복을 받지만, 예배 생활을 등한히 하고 돈을 좇아가면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물질의 복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1장 2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고 하였고, 시편 39편에 “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하시고, 능력과 지혜가 한량없으시며,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모든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둡니다. 그러나 이 땅의 것은 영구하지 못하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낡고 부서지고 녹슬고 불타고 썩고 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운명입니다. 어느 나라든 옛 조상들이 남긴 유물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물들은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점점 소멸되어 갑니다. 이는 문화재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티비에서 120살 난 어느 프랑스 할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얼굴이 쪼글쪼글해졌고, 치아도 다 빠졌고, 몸집이 작아진데다 매우 야위었고, 목소리도 작았습니다. 마치 미이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할머니가 처음부터 그런 노인인 것이 아닙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앳되고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그 젊은 처녀를 할머니로 만든 것입니다. 세월과 싸워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세월에 대항하여 무모한 싸움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라지고 말 육신의 젊음에 소망을 두지 말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하였으며, 베드로전서 3장 3절로 4절에는 “3)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신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이방 종교들처럼 육신을 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의 구원이 가장 중요하므로 이를 위해서라면 육신의 고통이나 죽음조차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며 몸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그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천국에 들어가고, 그 몸은 무덤 속에 누워 편안히 잠이 듭니다.

그러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 무덤 속에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51절 이하에는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몸이 어떠한지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그리고 빌립보서 3장 20절로 21절에 보니 “20)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그 아침에 성도들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기쁘고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장 3절로 4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상속이란 부모의 재산을 자녀가 물려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자 부모를 둔 사람은 자기가 땀 흘려 수고하지 않아도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썩어질 재물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화와 영광스런 특권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말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금이나 보석이나 돈을 상속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나라를 상속 받는다 함은 그 나라에서 성도들의 신분이 어떠한지를 말해 줍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왕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2장 11절로 12절에는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고, 계시록 22장 5절에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는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성도들에 대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시면서 언제나 활기찬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희망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고전 13:13)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공기와 물과 양식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 3분만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3일 내지 5일밖에 견디지 못합니다. 음식은 좀 더 오래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약 40일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으면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들 가운데 소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그만큼 소망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옥에 갇히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매를 맞고, 심지어는 목 베임을 당하거나 맹수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기독교인들이 숨어 지냈던 지하무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카타콤이라고 하는 그 지하무덤은 햇빛이라곤 전혀 들어오지 않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서운 핍박을 견디고 또는 어둡고 습기 찬 무덤 속에서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천국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불신 가족이나 동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 성도들이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소망하면 너끈히 핍박을 이겨내지만, 이 소망을 붙잡지 못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생활 가운데서도 항상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도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몸이 병들 때도 있고, 실직할 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배신을 당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외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처지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젊은 나이에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형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궁을 떠나서 광야의 동굴을 전전하면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한국에는 광야가 없기 때문에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릅니다 마는, 사실상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얼마나 도망 다닐 곳이 없었으면 광야로 갔겠습니까?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절박한 형편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시편 62편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6)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7)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고 했습니다. 현실을 보면 낙담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자 사울 왕의 손에서 건짐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소망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환난 가운데서 그를 지켜 주셨으며 드디어는 사울 왕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슨 어려운 문제를 만났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곤경에서 건져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동일하신 능력으로 성도님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는 국가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국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당면한 어려움은 정치가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해결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백성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도 소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해서 덕을 세우려면 상급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숱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노릇이 힘들다고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서 8장 18절에 그 답이 나와 있는데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였기에 핍박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 보면, “나는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상급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급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신자는 주의 일에 충성할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소망하지 않는 것은 곧 상급을 약속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고 권면합니다. 그런즉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항상 소망하면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잠언 14장 32절에 보니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 것이요, 이제 그만 오라고 부르시면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조차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에게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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