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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분/ 엡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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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분
본문 : 엡1:17-19

우리가 사람을 보거나 사물을 볼 때 그리고 세상을 볼 때 정확하게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외모나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판단하므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 사람의 외모나 나타난 현상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이나 진심이나 선한 의도를 보지 못해서 오해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물을 받을 때도 선물 그 자체의 가격이나 가치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보내기까지 그 마음속에 담긴 그 사람의 사랑과 정성의 무게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에게 전달된 어떤 말이나 표현도 그 마음속의 깊은 뜻까지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음악이나 영화나 드라마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여인의 향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대개 여성의 성적인 매력이나 성숙한 여인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사람이 시각보다는 후각으로 보다 깊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외적인 아름다움을 나름대로 깊이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외적인 아름다움을 뜻하는 여인의 향기라는 것은 점점 그 향이 시들해 지고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199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여인의 향기'는 또 다른 여인의 향기를 소개해 줍니다. 이 영화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 생을 포기하려고 자살 여행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이 여행 도중 뜻밖에 한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의 도움으로 새 삶을 찾게 된다는 것이 중심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여인의 향기는 보다 깊은 차원의 사랑에서 뿜어져 나오는데 인격과 삶의 진실에서 향기가 우러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여인의 향기는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고 그 향기가 그윽해 집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보는 관점에 따라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외적인 아름다움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성숙함에서 우러나오는 향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향기가 아닌 제 3의 향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나지 않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풍기는 독특한 향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판단하는 데에도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밝히는 빛이 있어야 모든 것이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캄캄한 밤에 사막을 걷는 나그네가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물 한 병만 있으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어두워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나그네는 방황하다 지쳐 쓸어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해가 돋았습니다. 나그네가 쓰러져있는 바로 몇 발자국 앞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밝은 빛이 있었더라면 물을 찾았을 것이요 그는 생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밝히는 빛이 있어야 모든 것이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라도 캄캄한 밤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밝은 빛 가운데서 아름다움도 더 빛나는 것이요 화려함도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우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캄캄한 밤에 다닌다고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밝히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22-23절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시어 눈이 어둡거나 빛이 없으면 어두움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봄에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높은 산에 올라가 시원하게 펼쳐진 대 자연을 바라보면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가에 서서 쉬지 않고 넘실거리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밤하늘 촘촘히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별들과, 강물처럼 흐르는 은하수를 바라보면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다 한 마디를 하게 됩니다. "아!" 우리 신앙인들은 한 마디를 더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구나."

하나님은 최고의 걸작품인 우리 인간도 참으로 오묘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묘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드셨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드셨고,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하셨고, 상큼한 것들을 맛볼 수 있게 만드셨고, 따사로움을 느끼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운 장면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하여 카메라를 고안해 냈습니다. 그러나 최첨단 카메라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눈을 본 떠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먼데 있는가, 가까운 데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눈을 두 개 만드셨습니다. 조리개 샷타 거리가 완전 자동입니다. 사진기는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서 찍을 때에 조리개를 맞추어야 하지만 우리 눈은 완전 자동입니다. 눈동자가 자동으로 커졌다 작아집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을 찍을 때에 렌즈의 초점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의 렌즈는 자동으로 거리를 맞춥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면 자동으로 샷타가 작동해서 눈이 깜박거립니다. 렌즈도 자동으로 닦을 수 있도록 세정제인 눈물을 두셨습니다. 렌즈에 물이 들어가면 잘 볼 수 없기에 물을 들어가지 못하도록 눈 섶을 주셨습니다. 위 눈 섶을 주신 것은 물이 옆으로 흐르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눈 섶을 밀어 모나리자의 눈 섶을 만드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눈 섶 밀면 장마철에 빗물이 눈으로 들어갑니다.

귀도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소리를 잘 들으라고 귓밥을 만드셨습니다. 오는 소리를 잘 잡아서 귓구멍으로 쏙 들여보내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코도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라 비가 와도 빗물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밑에 다 파주셨고, 한 구멍이 막히면 다른 한 구멍으로 숨쉬도록 두 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도록 5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5감을 가지고 세상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각 기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 마음의 눈, 영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은 육신의 감각 기관을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육의 눈으로, 육의 감각 기관으로 결단코 알 수 없고 영안이 열려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제 하나님을 알았으니,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롭게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마음눈을 밝히사 더 알아가야 될 것이 있습니다. 출세하는 법,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 돈 버는 방법,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신령한 눈을 떠서 더 근본적이고 신비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지만, 하나님 없는 가운데 가지는 소망은 별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면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나를 왜 자녀 삼아 주셨나? 그리고 지금 내게 바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는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예비해두신 그 소망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하면 큰 죄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소망의 내용을 알면, 여기에 나의 존재 가치가 있게 되고 사명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 때에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혼을 해야 합니까? 그냥 같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를 향한 당신의 지금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꾹 참고 살아! 이것이 너를 향한 나의 소망이야!" 그러실 때, 그것만 확실하면 견디는데 문제는 이것을 몰라서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소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님, 그것을 알게 해 주세요." 이렇게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망대로 살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많은 성도들, 많은 교회들을 보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이 많았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고, 내가 너희들에게 영광을 주고 능력을 주겠다." 약속을 많이 하셨는데, 문제는 너무도 초라하고 빈궁하게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요를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사는 성도들을 보면서 그는 안타깝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업의 의미는 내가 하는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은 사업을 할 수도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또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모든 일이 기업입니다. 또 기업은 가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러한 기업이 풍성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 기업을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을 풍성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위치에 있던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을 풍성히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업이란 받을 바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을 은혜와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알면, 그리고 이 작은 일의 결과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답게 쓰여질 것인지를 알면, 새로운 의미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국의 윌버 체프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인 중에 거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이 부자의 아들이 13살 때 가출을 했습니다. 이 아들을 찾으려고 아버지가 18년을 헤매고 다니다가 마침내 만났습니다. 그 아버지가 필라델피아 역에 내렸는데, 어떤 거지가 다가오더니 "아저씨, 25센트만 주세요." 그래서 쳐다보았더니 눈동자에 초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약물 중독자입니다. 자세히 보니 자기 아들의 얼굴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야! 너 톰 아니냐?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몰라봅니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아저씨, 25센트만 주세요." 그 때 아버지가 그 아들을 끌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놈아! 25센트가 문제냐? 내가 너의 아버지다. 내 집, 내 농장, 내 차, 다 네 것이다. 원한다면 내 생명도 줄 수 있다. 얘야! 그러니 이제 집으로 가자. 나하고 집으로 가자." 그래서 데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히 채워주고 싶고, 더 주고 싶고, 다 주고자 하는데도 우리의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초점이 맞지 않습니다. 그 아름다운 나라, 자녀 됨의 영광, 천국 백성이라고 하는 소속감, 내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그 풍성한 세계,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해 달라고 이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그 영광을 향해 나갈 때 어떻게 나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가 쓰러지지 않고 갈 수 있고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네게 능력주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에겐 분명히 능력이 있습니다. 아들 됨의 능력! 이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게다가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고, 근심과 염려를 이기는 능력도 있고, 사탄을 제어하는 능력도 주어집니다. 문제는 몰라서 못 써 먹습니다. "나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했는데 우리는 "어림도 없지, 나는 못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활용하게 하시고, 그 활용에 능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것은 서로를 자기 안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삶과 짐을 나누고,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의 성취에 자부심을 느끼고, 서로의 기쁨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축복 속에서 우리는 마치 어머니가 몸속에 아이를 가지듯 서로를 가집니다. -스태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

바울 기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달라는 말이 하나도 없고 철저하게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또 하나 내 야심, 내 고집, 내 욕망이 너무 강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알기가 참 어렵습니다. 회개하고 나를 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들려지고, 이해되고,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위대한 기도들을 생각하고 이렇게 기도하시고 기도한 대로 살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

신앙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시작된 믿음은 머리에서가 아니라 내 가슴에서 머물 때 나의 삶에 생명을 줄 수가 있습니다. 머리에 머무는 지식은 나의 삶에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행함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과 가슴의 느낌을 나의 삶을 통하여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행하는 진실한 신앙이어야 한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행하는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실 때에 성경 말씀이 믿어지고 성경 말씀에 감동을 받습니다.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됩니다. 새롭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영안이 열릴 때에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우리를 택하셨으며 부르셨을까,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셔서 하늘의 소망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소망 가운데 참고 견디고 승리하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이 열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앞길에 거친 홍해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길에 목마름으로 기갈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어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생로병사의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쁨도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나가기도 하지만 슬픔도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나가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한 세상을 살다가 세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에 절망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신령한 것을 위하여 신령한 것을 심는 영적인 생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담대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안을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열린 눈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조금 열린 문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육신의 눈과 육신의 감각 기관도 쓸수록 발달합니다. 한쪽 눈을 아꼈다가 나이가 들면 쓰겠다고 감고 다녀 보십시오. 오히려 더욱 못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것만을 자꾸만 바라보면 퇴화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영의 눈으로 신령한 것을 보고, 소망을 붙잡고, 능력을 의지하며 살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주십니다. 영안을 더욱 밝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감사와 찬양의 생활을 쉬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을 쓰십시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에 힘을 쓰십시오. 신령한 것을 심는 일에 애를 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과 영안을 더욱 활짝 열어 주셔서 더 놀라운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더욱 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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