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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연의 질서 회복(창조절을 맞아) / 창 1:1, 롬 8: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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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질서 회복(창조절을 맞아)     
창세기 1:1, 로마서 8:22~23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email protected])

오늘 주일부터 교회력에 의하여 창조절입니다. 창조절은 9월에 시작되어 대림절 전까지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과거에는 앞의 성령 강림절이나 삼위일체의 주일로 계속 지켰지만 그 절기는 너무 길뿐만 아니라 의미 없는 주일들이 너무 많아 지루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이유로는 그 동안 사용하던 교회력에는 성자 그리스도의 계절과 성령 하나님의 계절은 있었지만 성부 하나님의 계절은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창조주 되시는 성부 하나님의 계절을 분할하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창조절 기간에 이 세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려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반생명의 공해현실, 인류 전체를 파괴의 위기로 몰아넣는 창조 질서의 파괴현실, 이러한 것은 인간 죄악의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이런 현실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인류 역사상 오늘날과 같이 자연 질서 전체가 위기의 상황으로 치달은 적은 없었습니다. 창조 세계의 전 역사적 과정에 비한다면 찰나에 불과한 산업혁명 이래 200여년간의 이 잘못된 기술 과학이 낳은 결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주어진 환경을 인간 생활이 유리하게끔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개조한 결과 자연 질서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환경 문제는 산업 또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직간접으로 관련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양의 자연관을 살펴봅니다. 동양인들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통합된 일체로써 인식해 왔습니다. 하늘, 땅, 인간, 이것을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우주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사라져 갑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하늘과 땅을 따로 보지 않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습니다. 하늘과 땅이 곧 자연이었습니다. 이 자연은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달이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는 산과 바다와 강이 있습니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숲이 있고 바위가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삼라만상입니다. 삼라만상은  한번도 쉼이 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것을 모두 자연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을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와 멀리 있는 것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자연과 친근하여 자연을 사랑하였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자연을 경외하며 살았습니다. 인간은 이미 천지간에 생존하는 생명 가운데 하나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그 모범을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인간의 법칙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기에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요 투쟁의 대상도 아니요 단지 경외의 대상이면서 인간과 좋은 친화력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의 순리에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고로 순천자생(順天者生)이요 역천자사(逆天者死)라 했습니다.

서양의 근대 과학은 16-17세기 기독교권의 유럽에서 과학 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문화적 산물입니다. 과학적인 사고의 본질적인 혁명을 의미했던 당시 과학혁명의 정신적 배경은 고대 이래로 전승돼 오던 그리스적인 합리주의 자연관과 성서적 자연관 사이의 겨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과학 기술은 서구의 것이며 이는 중세의 기독 교사상의 터전에서 발전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사상을 지배한 기독교의 자연 환경관은 하나님의 창조설에 대한 해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였고 그 목적은 인간이 이를 다스리며 잘 이용하여 행복을 누리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충만 하라,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관리하는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인간의 자연관은 정복과 통치권의 행사에 있음이 아니고 창조 세계를 보전하기 위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통해 에덴 동산을 돌보는 동산지기로 위임받은 선한 청지기로 책임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매우 좋았다고 하신 창조 세계를 유지 보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은 자연을 착취하는 것도 자연과의 투쟁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노동은 자연과의 화해이며 평화로운 교제인 것입니다. 성서가 고백한 창조 신앙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연 그리고 인간 앞에선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책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거룩한 모습을 닮아 그의 온전하심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경쟁과 대결의 관계가 아닌 협동과 사랑의 관계이어야 하며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지배권을 받아 선한 지배자로 자연을 다스리고 보고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성서가 인간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는 이 복음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선언입니다. 세상의 시작은 시초도 종말도 없는 우주의 순환적 과정이거나 자연의 법칙에 따른 진화의 우연적 결과 혹은 어느 이름 모를 조물주의 작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창조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성서의 창조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한 이래로 인간의 죄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이 범한 형제살해의 범죄는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르러 인간 죄악은 극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홍수 심판을 맞게 되었습니다. 인간 죄악의 결과는 단지 사람에게만 그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온 피조물이 죽음으로 심판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9장은 새 세계를 위한 계약의 영역이 땅에 사는 모든 생물에 미치는 것임을 5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그밖에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도 나는 계약을 세운다"(창 9;10).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온 피조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온 피조세계를 위한 구원 활동에도 불구하고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은 왕조 국가를 세웠고 왕이 백성을 억압하고 평등해야할 인간 관계를 파괴시켰습니다. 힘있는 자들은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정의는 곧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창조 질서에 대한 그르침이며, 자연 질서에 대한 파괴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파기입니다. 이러므로 자연은 병들고 죽어 가는 현상 배후에는 언제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질서가 어긋남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서로 연결돼 있는 유기체적 한 몸으로 서로의 생명은 다른 생명과 의존적으로 관계 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적 부패 사회적 불의는 자연 황폐를 가져오고 그 자연의 황폐는 다시 인간 생명에 대한 위기를 조성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백합니다. 피조물은 함께 고통하고 함께 신음한다. 여기에 성령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마침내 이 신음에 성령께서 참여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과 자연 그것은 고통을 함께 걸머지고 함께 신음 할 수밖에 없는 연대성의 존재요 인간은 주체요 자연은 개최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 됩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질서가 회복될 때 성령의 신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의존하고 연결되어 있는 연대성과 유기체적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60년대에 이후 비민주적 비자주적 사회 체제 속에서 강요된 경제 제일주의와 G.N.P 우선 정책은 공해 방지에 소홀하여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공해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처에 널려 있는 산업 폐기물들, 농약병, 비닐 조각, 공장 폐수와 세제 거품으로 죽어 가는 강들 수질 오염 땅의 오염 대기 오염은 PPM을 들먹이지 않고서는 안 되는 걱정하는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와 같이 자연이 중풍에 걸려 있고 자연이 병들면 인간이 병들고 자연이 죽게 되면 자연을 오염시킨 인간도 결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이와 같은 반생명 위기에 인류는 지금까지 인류를 번영과 복지 문명과 발전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서구 문화의 현대적 자연관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해야 합니다. 그 동안 인생관은 세속화되었고 자연 세계는 인간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와 원료로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인간은 마치 하나님처럼 되어서 자연을 정복하고 물질 만능의 능력과 과학의 우상화에 가치가 전도되며 연약한 것들은 보다 열등한 것들로 취급되어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인 냥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자연은 인간에 비해 열등하다는 생각과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러한 세계관은 비단 자연과의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 제도에도 적용되어 남자가 여자를 백인이 흑인을 부자가 가난한자를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시가 농촌을 억압하고 정복하는 것이 일반 관례의 질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연 질서 파괴는 죽음을 향해 행진하는 세계 속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생명이라고 증거 한 그의 증언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있음을 깨닫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의 소식은 자연 질서의 파괴 속에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소망의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유기체적 상호 보안 관계를 회복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한 질서 회복만이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세계가 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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