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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 히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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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본문 : 10장 19절


<10장 19절>의 "그러므로"는 히브리서 1장에서 10장까지, 지금까지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는 접속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로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셨고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고 그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완전한 죄사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나머지 부분들은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떠한 마음으로 무엇을 행하며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역설합니다. 한 마디로 10장 마지막 부분, 37,38절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듯이 믿음으로 살라는 권계입니다.

히브리서 나머지 전체가 이 믿음의 삶을 격려하는 설교입니다. 잘 아는 <히11장>은 믿음의 모본들,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믿음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부분이고 12,13장, 모두가 믿음의 삶을 권면하는 멧세지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 <10:19-38>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의 삶의 정체를 밝혀 주는 보석같은 부분입니다.

먼저 <19절>의 "그러므로"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22절> 하반부의 "하나님께 나아가자", <23절>의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와"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그리하자"이 세 어절이 그 해답입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자, 소망을 굳게 잡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의 삶의 정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하게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 우선적으로 맨 처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나의 죄 때문에 감히 나아갈 수 없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그 용서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나의 마음과 삶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모시며 살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렸던 탕자를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이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들이셔서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시는 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더 이상 죄를 추궁하고 심판으로 위협하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친밀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함께 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그의 육체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함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기워지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으므로/ 그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완전한 죄사함의 용서를 누리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께 나아가자 라고 권면했을 때 그것이 맨 처음 믿음,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은 아닌 것같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 이후, 이제는 하나님께서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친밀한 은혜의 아버지이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봄이며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당신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그 가운데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마음의 제일 구체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입니다.
한 마디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참 마음이란, 정직한 마음, 투명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짓된 마음, 생색내기나 체면상 나아오는 마음, 자신의 욕망의 성취를 빌러 나아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향하여 신랄하게 책망하십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사1:13, 공동번역>

또 말라기에서는 그렇게 허된 마음, 거짓된 마음으로 나아오느니 차라리 누가 성전 문을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말1:10>

A.W. 토저 박사의 표현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마음으로 나아오십시오.

또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오라는 것은 온전하게 다 갖추고 나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안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누더기같은 인간의 의로움, 선행을 내세워 나아오려고 하지 말고 은혜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의인도 아니면서 의인인 척 해서 나오려는 모습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도리어 연약한 죄인인 모습 그대로 나아올 때에, 예수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나아올 때에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마음이 뿌림을 받아 양심을 악을 깨달은 사람"이 이렇게 나아올 수 있습니다. 나의 죄악됨을 깨닫고 죄악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나아올 수 있습니다.


2. 믿음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인간의 예를 들어 말하면, 춘향이가 고난을 감당하는 마음은 이도령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소망을 붙드는 것, 이도령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한 정체도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도리의 소망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말하며 공동체적으로 크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고 멋있게 살고 싶은데 번번이 그렇지 못한 내 모습, 여러번 다짐하고 다짐하고 해 보지만 죄의 습관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하는 나의 모습... 이 모순된 모습에서 온전한 구원, 아름다우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침내 닮게 하시는 그 구원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또 공동체적이라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모순된 세상, 죄악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한이 배이게 하는 세상,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신음하는 세상, 이 죄악으로 오염되고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에, 겨자씨 한 알이 떨어져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의 사랑이 번져가서 사람들이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올바름과 화평과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더 확장되어 가며 마침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되는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지상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것은 당신의 마음에 이 소망을 그려보며 이 소망의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비록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고 깨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시는 소망을 바라보고 그 소망의 삶, 지상 명령을 따라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소망을 굳게 잡으십시오. 믿음이란 믿는 도리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굳게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3. 믿음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의 삶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삶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족, 교회 공동체의 가족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죄악의 근원이 자기가 하나님인 줄 착각하는 것, 천상천하 유아독존,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친구도 세상도 필요없다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이는 이기심이었듯이, 양심의 약을 깨닫고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특징은 이기심의 극복, 이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당연히 양심의 약을 깨닫고 맑은 물로 씻은 새로운 심령, 새 마음은 서로 돌아보며 사랑의 삶을 드리워 가는 것입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당위적 의무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임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은 증거 중의 하나가 이기심에서 돌이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느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랑의 삶을 더욱 힘쓰도록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자기를 사랑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인지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말세가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사람의 자연스런 습성이 안 보면 관심이 멀어지기 쉬운지라,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서로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헐뜯지 말고 비방하지 말고 흉보지 말고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믿음의 삶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믿음의 삶의 정체는 이 세 가지,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세 가지 믿음의 정체는 예수님께서 제일 큰 계명이라고 깨우쳐 주시고 지상 명령으로 명령해 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리고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것은 비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비전을 바라보고 지상명령의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결론적 메세시로 "이렇게 살아라"증거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렇게 살아라"고 증거하신 것과 같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저희 교회가 모토로 삼은, 제일 큰 계명의 정신으로 지상명령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삶은 듣기 좋은 모습처럼, 적당히 즐기며 누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좋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쉽게 쉽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청유하는 것은 사람은 그냥 놔두면 하나님께 쉬 안 나아간다는 것이며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심에는 역설적으로 믿는 도리의 소망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며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것에는 사람들이 잘 안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연적 성향만 믿음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믿음의 삶을 적극적으로 거스리는 방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련회 때에 은혜로운, 감격의 침례식을 가졌습니다. 들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고 사랑과 축하의 마음을 듬뿍 안겨 주며 우리 모두는 기뻐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히브리서 수신인들, 초대교회의 침례식은 어떠했는지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그들이 침례를 받는 강가에는 교인들, 교인이 아닌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고 고백하며 침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은 그날 저녁부터 그의 집에는 돌멩이가 날아들었고 가게에서 거절당하기 일수였고 사람들의 따가운 멸시의 눈총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했습니다.

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절, 34절. "..너희가 기쁘게 당한 것은..."
그들은 그 고난을 기꺼이 당했다고 말해 줍니다.
왜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고난의 큰 싸움을 감당하면서까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오늘날 서구의 교인들처럼 예수님 믿으면 이 땅에서 잘 살고 행복하고 그런 소망은 아예 갖을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그날을 바라보며,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 외적인 고난만이 그들의 신앙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고난보다 더 치명적인 위험은 신자들의 마음 안에 찾아드는 위험한 생각들, 치명적 유혹들이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면, 뭐 그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 어차피 사람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죄사함받은 것이라면, 마찬가지 아닌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 마귀적 발상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합니다. <26-31절> <26절>의 짐짓은 "고의적으로" 라는 뜻입니다. keep on deliberately sinning,

이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 고의적 습관적 범죄,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명확히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밟는 행위이며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엄중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소위 구원의 확신의 가르침, 하나님의 견인 교리가 이처럼 오만한 마음에 대하여도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외적인 환난과 역경과 고난, 내적인 갈등 모두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외적인 고난과 내적인 회의와 갈등을 이겨내기 위하여는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35,36절>
믿음은 인내와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오늘의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극복하는, 이기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예) 다시 춘향이 통해서 믿음을 배워 볼까요? 그가 변학도의 회유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욥 ..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내의 달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중에도 기죽지 않고 불평과 원망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것, 왜 그렇습니까? 우리 마음 바닥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느라.
당신은 이 약속을 믿으십니까? 이 믿음이 강건해 지기를 기도하십시오.

히브리서 수신자인 초대교회 사람들, 이처럼 외적인 환난과 핍박의 찬바람, 내적으로 찾아오는 유혹과 갈등의 시달림.. 그 장애물 가운데 믿음의 삶을 추구해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항상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아예 돌아서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내적, 외적 장애물들을 몸으로 부딪히며 믿음의 삶을 추구해 갈 것인가?
히브리서는 이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루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38, 39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정직한 믿음의 삶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끝없는 갈등이 그 마음 안에 있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해도 되는 유혹, 아예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버릴까 하는 충동.. 그리고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믿음을 추구하도록 권고하시는 성령님의 음성, 그 영적 전투를 경험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그 영적 전투를 경험할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38, 39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프라카의 아버지 데이빗 리빙스턴이 처음 18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 영국 런던에서 선교 간증 및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오지에서 생활하며 복음을 전했는지 간증을 나누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견딜 수 있었습니까?"
리빙스턴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두 가지 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14:18>"는 약속과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의 약속, 이 두 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속죄의 은혜,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케 하신 은혜를 바라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형제 자매들을 돌아보아 사랑을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드십시오.
제일 큰 계명과 지상명령을 기억하고 붙들고 믿음의 한결같은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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