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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당키 어려운 고난 [고후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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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감당키 어려운 고난 <고후 1:8-10> 


□ 감당키 어려운 고난 

(형제들아 우리가 아사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
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
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
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
라)  (고린도후서 1장 8절-10절)

고향을 다녀온 여러분!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번 추석은 태풍 <매미>로 인하여 우울한 추석이 되었습니다.
매미소리는 우리에게 낭만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번 매미는 전쟁을 방불케 하
는 파괴와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이번 단 몇 시간의 폭풍 앞에 인간의 무력감을 절감해 보았습니다.
폭풍은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것 망하겠네'라는 찬송처럼, 하나
님이 하시고자 하면 인간의 문명과 과학의 힘은 맥없이 날아가 버리는 간판처
럼, 뿌리채 뽑히는 가로수처럼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느꼈습니다.
명절 끝에 지금 눈물지으며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고난을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인간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기쁜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기쁨 속에 슬픔도 함께 하는 것이 삶이란 것
입니다.
또 고향에 부모님들이 계시지만, 찾아갈 면목이 없어, 그리고 이웃들과 친족들
을 대할 수 없어 추석에도 타향에서 외롭게 지낸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모두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
니다.

1. 우리 인생의 삶에는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에서 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
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하였습니
다.
여기 보면 '심한 고생을 하여 살 소망까지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 이번에도 어느 가족 네 식구가 10일동안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다 서울로 올
라오면서 저수지에 차를 몰아 자살을 하였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증권에 투자했다가 빚을 졌는데 그 후에 카-드로 생활하다가
갚을 길이 없어 동반 자살을 했다는 후문이었습니다.
다행히 12살짜리와 10살짜리는 낚시꾼들에 의해 살아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
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의 삶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당하면 이렇게 좌절하고 포기합니다.
이 사람처럼 삶을 포기하려는 충동을 누구나 다 받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러한 현상은 더 더욱 많아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自殺)을 하나의 탈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하루에도 36명 이상이 자살을 택한다고 합니다.

☞ 얼마 전 우리 나라의 최고 재산과 높은 사회적 지위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가졌던 현대의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
을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가 그런 자살을 택했을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감당키 어려운 고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당키 어려운 고난은 여러 가지로 주어집니다.
① 생활고로 감당키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② 남편의 구박으로 견디다 못해 어린 두 아들을 죽이고 목을 맨 주부,
③ 성적 부진으로 아들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
④ 부모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한 아이들,
⑤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여인,
⑥ 진학에 실패하여 죽은 재수생,
⑦ 직장을 잃고 방황하다 자살한 남편,
⑧ 부도로 인해 채권자들에게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
⑨ 집단 따돌림으로 왕따를 당해 고민하다 죽은 여학생 등등...
하루에도 <감당키 어려운 고난>으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인생 자체는 고난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불화로, 실직으로, 생활고로, 실연으로, 성적비관으로, 진학으로, 취직
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은 우리 앞에 항상 있는 문제들입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반 사람들처럼 자살로 자신의 고난을 떨쳐 버리
려 한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은 극복되어야 할 또 다른 기회이지 삶을 포기할 것
이 아니란 말입니다.


2. 그러면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늘>을 쳐다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땅위에서의 줄이 다 끊어지면 하늘을 쳐다보게 되어 있습니다.
☞ 형무소에서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기도를 행하던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면,
사형수들은 마지막 하늘을 한번씩 쳐다본다고 합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껏 살던 삶에서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지난주일 <신앙은 언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은 내 자신의 의지력으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신앙생활
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한계에 다 달았을 때 진정한 신앙의 문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
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
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무슨 말이 있습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하였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합니다 마는, 언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느냐?
심한 고생으로 살 소망까지 없어졌을 때, 그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떤 하나님을 지금 믿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하나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경 공부에서 배운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잘 나가는 동안 나를 돕고 있는 하나님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는 하나님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4-28절에서 자신이 얼마나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당했는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강도의 위험과/동족의 위험과/이방인의 위험과/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바다의 위험과/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또 수고하며 애
쓰고/여러번 자지 못하고/주리며/목마르고/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처럼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당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이 40에 하나를 감하는 매라고 하지, 그런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하였
습니다.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다고 하였고, 세 번은 파선하여 일주야를 바다에서 죽
음 직전에까지 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케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중에서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였다고 하였습니
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녀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
습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가 참으로 놀라운 위로입니다.
이 하나님의 위로는 살 소망이 끊어질 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내가 실직을 하거나, 중병이 들었거나, 사업에 실패하였을 때, 사람들은 나를
위로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나를 피하고 무시하고 내 곁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내게 더 큰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설(逆說)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성공가도를 달릴 때는 도리어 멀리 계시지만, 내가 감당키 어려
운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제일 가까이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영혼이 닫혀 있을 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3. 고난을 통하여 위로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놀라운 은혜입니다.
자신이 고난 중에 위로를 받았기에, 현재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게 합니다.
살 소망까지 없어진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 자들이 되게 만듭니다.
저들을 위하여 사랑의 관심과 손길을 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고난이 닥칩니까? 왜 나에게 고난이 닥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성경은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은 우리를 모든 면에서 깨닫게 합니다.
고난은 언제 닥치느냐? 하면 일곱 가지 경우에 고난이 닥칩니다.
① 고난은 교만할 때 닥칩니다.

  (대하 32:24~26)
② 죄를 범했을 때, (시 32:3~5)
③ 불순종했을 때, (욘 2:2)
④ 하나님의 것(십일조)을 도적질했을 때,
  (말 3:7~8)
⑤ 기도하지 않을 때, (마 26:41)
⑥ 허랑 방탕할 때, (눅 15:16~18)
⑦ 욕심에 빠졌을 때, (약 1:6~7)
고난은 반드시 우리에게 닥치는 것입니다.

☞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목사님은 "우리들에게 슬픔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배은망덕함을 깨우치시
기 위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것, 불 신앙과, 불 순종과, 불 충성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서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왜 우리에게 고통이 있습니까? 왜 질병이 있습니까? 왜
전쟁과 사고와 여러가지 어려움 들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런 질문에 해답은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죄악을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풍으로 바다에 해일을 일으키고, 소용돌이 칠 때,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고
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바다의 적조현상을 말끔히 씻어 버리고 새로운 생명 활
동이 시작되게 하듯이, 고난은 인간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고, 불의 용광로에
들어간 금과 은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서 순
수성을 되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없으면 겸손해 질 수 없습니다.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지 않습니다.
감당키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고, 그 위로를 통하
여 재기할 수 있도록 지혜를 얻게 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들도 모두 고난을 통하여 얻어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위로의 메신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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