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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신과 축복 (마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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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과 축복 (마태복음 19:23-30)

  1.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말씀

  부모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하는 것은 부모 자신을 위한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이 자녀들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따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인 우리들에게 이런 명령, 저런 명령을 하시는데, 하나님 자신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들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너의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명령과 계명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우리의 행복을 위한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도 아브라함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주신 명령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천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 불고기를 좋아해서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복주며 아브라함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시려고 아브라함의 행복을 위해서 그처럼 혹독한 명령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집이 없어서, 집에서 사시기 위해서 <내 집 지어내어라>고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주신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하신 때도 있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다시 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먹기 위해서 우리에게 바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창고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물질을 황충이 먹어치우지 않게 하시려고, 하늘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하시는 명령들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축복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요, 관원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이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고 하면 베드로보다도 더 위대하게 사용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행복을 위하여, 청년을 축복하시기 위하여서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띄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든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서 주시는 명령인 줄 믿고 순종하여서, 순종했던 자들이 받았던 그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의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가족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가 될 것인가? 그래서 “주님,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이 28절과 29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아멘.

  얼마나 대단한 약속입니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가 언제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 세상으로는 마지막 날입니다. 모든 인류는 심판받는 날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상급을 받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치는 날이 있듯이,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경기하는 날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은 그때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때에 우리들도 예수님 주변의 보좌에 앉아서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최고의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영생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누리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영생을 얻게 되는 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고,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물질과의 올바른 관계, 모든 관계가 다 회복되는 날입니다.

  그때에 모든 필요가 다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하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도 더 넘치도록 하나님께서는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날이 바로 영생얻는 날입니다.

  옛날에 임금의 자리를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금에게 집이 없겠습니까? 물질이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아내가 없겠습니까? 임금에게 모든 행복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영생을 상속받으면 그 안에 모든 축복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 부자는 이 세상의 물질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고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최고의 축복인 영생을 얻었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눈을 감아도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포기할지라도 영생만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만은 소유하고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드린 자에게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

  예수님을 믿고 헌신한 자에게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축복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이 땅에서도 받는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29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드린 자마다> 얼마나 받아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러 배만 해도 대단한데,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에도 나오는데 그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면 <백 배나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자에게 백 배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약속을 그대로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투자해서 백 배나 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나 받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백 배(百倍)라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모두를 다 뜻할 때 백이라는 말들을 씁니다.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말을 쓰는데, 문자 그대로 백가지의 행동이지마는 모든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많은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많이 받는다, 넘치도록 받는다, 남김없이 받는다, 모두를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음 백 배를 받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 배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 잘 믿어서 받는 복이 백 배만 되겠습니까?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고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셨던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가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새롭게 신축할 때에 그의 전 재산이었던 논 세마지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직업이 없으니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교회 관리를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유학을 갔습니다.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공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어졌고, 연세대학교 총장까지 지냈고, 현대 한국의 지성인 중의 가장 선구자가 되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고백했습니다. 논 팔아 밭 팔아 공부시켜 놓으면 일본관리 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시대에 하나님 앞에 내게 있는 것 드렸더니 천 배로 만 배로 축복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집이나 전토와 같은 물질은 백 배나 받습니다. 그런데 뭐까지 백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백 배나 받는다고 했는데, 이런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백 배나 받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한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시대인데, 부모가 백 명쯤 되어보세요. 어떻게 그 부모를 다 모시겠습니까?

  요즘 자식 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외국에 가서 공부시켜야 되겠다’고 해서 자녀를 외국에 보내고, 그 자식이 또 걱정되어서 어머니가 따라가서 자식을 또 뒷바라지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곳에서 돈 벌어가지고 보냅니다. 그래서 부부가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라고 하는 말이 생겨졌습니다.
  양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자식을 여럿 낳지 못하고 하나만 낳아서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녀를 백 명이나 한번 낳아보세요. 백 명이나 한번 얻어 보세요. 그러면 그게 복이 되겠습니까? 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아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도 백 명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아내를 백 명이나 얻고 남편을 한 백 명이나 얻어서 백 명의 아내, 백 명 남편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까?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백 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이나 자식을 백배로 주신다는 것은 백 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 형제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형제보다도 더 귀한 형제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백 명의 부모보다도 더 귀한 부모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백 명 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백 명의 자식보다도 더 귀한 자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백 명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백 명의 아내보다도 더 귀한 아내, 백 명의 남편보다도 더 귀한 남편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룻기서 4장 15절에 보면 룻이 결혼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에게 와서 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얼마나 귀한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귀한 자녀를 바라보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니, 열 아들보다 귀한 자식이니” 하는 말들을 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물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에 물질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성도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릴 수 있는 재능을 드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약속합니까? 물질적으로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백 배나 너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 배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준다는 것입니다. 백 명보다도 더 나은 형제를 주실 것이고, 백 명보다도 더 나은 부모를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자식보다 더 나은 자식을 주실 것이고, 백 명의 아내와 남편보다도 더 나은 부부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것 주님 앞에 드려서 아름다운 가족을 백배나 얻을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백 배가 이런 뜻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서 백 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도 되어집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아들이 없었습니까? 디모데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었습니다. 누가가 의사인 자기의 직업을 다 팽개치고 옥중에 와서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그의 건강을 돌보았고,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삶을 다 책임져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의 정말 좋은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었습니다. 눈까지 빼어주겠다고 효도하는 자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같이 옥에 갇히면서 효도할 자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을 때, 그에게는 성도들이 다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좋은 아들이었고, 좋은 부모였고, 좋은 형제자매가 되어서 이 땅에 살 때 그는 외롭지를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살아본들 70년이요, 80년입니다. 백 배를 받아보고 성공을 한들 잠깐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어려워도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백 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최고의 은혜와 축복인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백 배의 축복과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 어떻게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집이나 전토,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식, 부부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위하여서 교회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내 자식, 내 직장, 내 집, 내 평안을 위해서 교회 나왔고, 이것을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포기하며 어떻게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하게 될 때, 느끼게 될 때, 깨닫게 될 때에, 경험하게 될 때, 어떤 명령이든지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였습니다. 경건치 않은 우리였습니다. 연약한 우리였습니다. 이런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서, 은혜주시기 위해서, 복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내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생명버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셨고, 영생의 축복을 주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경험하게 되면 내게 있는 생명까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무엇을 내어 놓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도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이 큰 은혜를 늘 체험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물질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시간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내 재능을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것 가지고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 제게 주신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제게 주신 이 재능과 힘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자는, 청지기 의식을 가진 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고 백배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주님께 드린 자에게 주시는 복

  전주 삼래읍에 박집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 섬기고 있는데, 교회가 낡아서 교회를 지어야 할 때가 되어졌습니다.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서 이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이야기이고 또 촌이었기 때문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집을 짓다가 그만 중도에 공사가 중단되어졌습니다. 우기는 오는데 벽은 세워졌으나 지붕이 이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는 박집사님이 부인하고 의논합니다. 우리 대대로 물려오는 땅,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우리가 노력해서 다시 살 수가 있지만, 교회를 이렇게 두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니까, 우리 논을 팔아서 교회 공사를 완공하자고 두 분이 의논하여서 논을 팔아서 그 돈으로 교회를 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붕을 덮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50대 연령인 사람은 잘 알고있는, 사라(Sarah)호라는 큰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지붕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는 수군수군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가봐. 우리 집도 안 날아갔는데, 왜 교회지붕이 날아가지?”. 그러니까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믿음이 약한 교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박집사님은 새벽마다 하늘이 뻥 뚫린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나님의 교회 지붕이 어떻게 이렇게 날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줍니다. “박집사야” “예” “네게 눈이 있지 않느냐?” “예. 제게 눈이 있습니다. 눈가지고 어떻게 하라고요?” <눈이 있지 않느냐?>는 음성이 똑똑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집을 짓고 도배를 하면 얼마나 좋은 도배지를 가지고 도배를 합니까?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신문지를 가지고 도배를 할 때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신문지로 도배를 하는데, 시신경이 망가지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사가지고 이식하면 눈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눈을 사고도 다시 팔수도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에 그의 머리를 팍 지나가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하나님이 “박집사야, 네 눈이 있지 않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생각나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그 말씀은 바로 내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하고 예수전주병원에 달려갔습니다. “이 병원에 눈을 삽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 눈을 산다고.” “지금 살 수 있습니까?” “지금은 살 수 없는데, 서류를 작성해서 주고 가면 눈 살 사람이 있을 때 연락할테니까 그때 가서 눈을 팔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소를 주고 서류를 갖추어서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느 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큰 음성을 들려 주셨는데, 눈 팔아서 하나님의 교회 지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내가 알고 눈 팔아서 내가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고 하니까 부인이 펄쩍 뜁니다. 어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냐고, 당신없는 교회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느냐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이니까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도 그렇습니다. 다시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음성은 더 똑똑하게 들려옵니다. 부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니까 내가 그 음성에 순종해야 되겠노라고 하도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당신 눈 하나 뽑고, 내 눈 하나 뽑아서 팔자고 합니다. 그것도 또 괜찮은 제안입니다.

  그래서 또 기도해보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박집사야, 네 눈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셨지, “박집사야, 네 한쪽 눈, 네 아내 한쪽 눈”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고 또 이야기하니까, 아내가 할 수 없어서 나중에는 동의를 하고 서류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동네 사람의 동의서를 또 하나 받아가지고 서류를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전주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박집사는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가운을 입었습니다. 눈을 빼는 수술을 준비를 했습니다. 박집사님이 수술가운을 입은 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 때 묻은 찬송을 펴서 ‘내 눈으로 나의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찬송을 해야 되겠다’ 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기 시작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합니다. 수술하려던 의사가 보니까, 이 사람이  이상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주예수병원은 다 예수 믿는 의사들입니다. 그 의사도 장로님이었습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찬송가에 무슨 의미가 있는 줄 알고, 당신이 왜 눈을 뽑는지 그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고는 내가 눈을 수술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박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디어디에 사는 집사입니다. 교회를 지었습니다.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논 팔아서 지붕을 이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지붕이 날라 갔습니다. 어느 날 “네 눈 있지 않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 눈 빼어서 하나님의 집 지으라고 하는 줄 알고 눈 팔아서 교회 지으려고 내가 이렇게 수술합니다.
  그 의사 장로님이 수술하려고 하던 기구를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박집사라는 이 사람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눈 빼어서 교회 지으려고 하는데, 이 놈은 장로라고 하면서 박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가진 집도 돈도 많은데 그 은혜 보답하지 못한 이 놈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통곡을 합니다. 옆에 있던 보조의사가 웁니다. 간호사가 같이 따라서 웁니다. 그 소리가 원장에게 들어갔습니다. 온 병원 사람이 달려왔습니다. 모두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웁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울지 말고 박집사님을 위해서 헌금하십시다.” 하고 헌금하니까 바로 그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헌금이 나왔던지, 당시에 교회를 잘 지을 수 있는 돈과 논을 스무마지기 살 수 있는 돈이 나왔습니다. 그 돈을 주면서 “당신의 눈을 우리가 뽑을 수 없습니다. 이 돈 가지고 가서 아름다운 교회짓고 또한 논밭을 사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십시오,” 하면서 집사님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까지 바쳤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받지 아니하시고 수양을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주며 복주고 너를 번성케 하며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고, 그 축복을 아브라함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에게 드렸더니 오천 명이 먹고 남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까지라도 빼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눈 받지 아니하고 더 좋은 것으로 백 배나 그에게 갚아 주었습니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아내, 나를 위해서는 우리가 아낌없이 쓰면서, 내 몸과 내 건강과 내 생명, 내 물질, 그것을 꼭 쥐고 있으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 놓으면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게 될 때에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서 드리면, 버리면, 사용하면 이 세상에서 백 배나 갚아 주마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증거는 현실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 영생을 축복으로 주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읽을 때에 부자 청년처럼 돌아서는 우리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주님을 섬겨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우리의 몸을 주님 앞에 드려서 이 땅에서 백 배나 받을 뿐만 아니라,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자식, 백 명보다도 더 귀한 아내와 남편, 백 명보다도 더 귀한 부모, 백 명보다도 더 귀한 형제를 얻어서 복되게 살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영생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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