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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샘 근원이 마르지 않는 축복 / 창 26: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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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근원이 마르지 않는 축복
창세기 26장 23-33절

<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

가끔 보면 기독교 상점 중에 '엠마오'라는 상호가 붙은 상점이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서 붙였겠지만 성경 문맥상으로는 썩 바람직한 명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엠마오는 '세상'을 상징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밝아져 즉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엠마오로 내려가는 삶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삶을 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 기독교 상점 중에 '르호봇'이란 상호가 붙은 상점이 있습니다. 르호봇이란 '풍요로운 넓은 공간'이란 뜻인데 그 명칭도 문맥상으로는 썩 바람직한 명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지역의 르호봇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만한 곳이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곳은 블레셋 지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내 집이 좋다"는 것입니다. 요새 우리 나라가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국이 좋고, 한국 사람이 좋습니다. 살기는 선진국이 낫지만 사는 멋은 후진국이 더 낫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는 멋이 있습니다.

제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첫째 이유는 뚜렷한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살기는 미국이 좋아도 사는 멋은 한국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잘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사는 멋을 누리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잘 사는 곳보다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 르호봇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가는 이삭 >

오늘 본문은 그 진리를 잘 말해줍니다. 어느 해에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삭은 불레셋 땅 그랄로 피난을 갔습니다(창 26:1). 그리고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었고(12절), 하나님의 축복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습니다(13절).

그러자 불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고대의 가장 큰 재산이자 삶의 원천인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습니다(15절). 블레셋 왕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16절). 너무 기가 막힌 일이지만 이삭은 그랄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들어가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물을 파자 우물물이 터졌습니다(18-19절).

그 소식을 듣고 그랄 목자들이 와서 그 우물을 강탈해갔습니다. 할 수 없이 이삭은 그 에섹이라는 우물을 내어주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또 우물물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또 그랄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방 지역에서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이삭은 그 싯나라는 우물도 내어주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또 우물물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 이름을 '넓은 공간'이란 뜻을 가진 르호봇이라 부르고 "이제는 살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22절). 우물도 있고, 농사도 잘 되고, 양과 소와 하인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이제 누리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이 있습니다. 잘 살기는 하지만 사는 멋이 없습니다. 행복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은 그가 있어야 할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있어야 할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것을 이삭도 잘 알고 있지만 그 땅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삶이 불편하게 될 수도 있고, 다시 흉년으로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불안한 삶보다는 불편한 삶을 택하고, 편안한 삶보다는 평안한 삶을 택합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리고 르호봇에서 가나안 땅 최남단에 있는 브엘세바로 이사를 합니다(23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르호봇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약속의 땅 브엘세바로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잘 살 수는 있어도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브엘세바로 떠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

그처럼 살기 좋은 로호봇을 떠나면 망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브엘세바의 삶을 결단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

이삭이 각오를 하고 브엘세바로 올라갔지만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브엘세바로 올라가던 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24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대통령을 한번 만나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입니다.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까?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브엘세바의 삶을 결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축복은 선한 결단의 열매입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하고 하나님의 도움만 바라는 것은 은혜를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가 됩니다.

미국에 있을 때 저는 교회와 신학교 사이를 운전하면서 거의 매주 졸았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신학교에 강의 다닐 때도 수시로 졸았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사고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은 결정적 순간에 졸음이 깹니다. 마치 누가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미터 앞, 50센티미터 앞에서 차가 급정거한 적도 많았습니다. 저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천사의 손길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졸리면 바로 운전을 멈추고 쉬는 편입니다. 가족과 교인들을 놔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면 덕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부르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졸다가 자동차 사고로 일찍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졸면서 운전하다가 천사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보다 졸릴 때는 잠깐이라도 자고 나서 운전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약 5년 전에 그런 결심을 한 후로는 천사의 손길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지만 저는 지금의 모습이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책임하고 부주의한 것까지 천사를 대신해서 지켜 달라고 하는 신앙을 별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려 깊게 행동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고, 깨어 근신하고 행동하는 바탕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천사를 보내 도와주시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뜻일 것입니다.

자기의 영적 명예심을 위해 무책임하게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적인 행동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변화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만 받으려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브엘세바의 삶을 살려고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2. 자손이 형통하게 되는 축복

우리가 힘들어도 브엘세바로 떠나면 자손이 잘되는 축복을 받습니다(24절). 그러므로 우리는 자손을 위해서라도 르호봇에서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가야 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을 이사해서 교육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교육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학원이 많은 서울 강남으로 이사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 강남에는 고급 술집도 많습니다. 그러면 이민을 가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적인 환경이 필요합니까? 부모가 먼저 르호봇의 삶이 아닌 브엘세바의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브엘세바의 삶이 무엇입니까? 저는 어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불평 체질이면 우리 자녀도 불평 체질이 되고, 결국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그런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나 이민을 가는 것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내 십자가가 이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감사하느냐?"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면 대개 "내 십자가가 제일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내가 당한 고통을 책으로 쓰면 몇 권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환경과 여건을 볼 때 그 십자가가 그가 제일 잘 질만한 십자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우신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천국에는 거대한 '슬픔의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서는 자기가 당한 슬픔의 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남이 벗어놓은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옷을 걸어놓고 천천히 나무 주위를 돌며 다른 옷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옷은 하나같이 자기 옷이라고 합니다. 잘 따져보니까 그나마 자기가 당한 슬픔이 자기에게 제일 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슬픔의 나무를 통과하면 하나같이 온전히 감사하는 인생이 되고, 천국 찬양대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내 십자가가 가장 큰 것 같지만 사실 내 십자가가 내게는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 시간이 슬픔의 나무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 역사가 있다면 강남으로 이사가지 않고, 이민을 가지 않아도 우리 자녀들은 번듯한 자녀로 잘 자라고, 우리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3. 인생의 샘이 마르지 않는 축복

고대에는 우물이 있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 사람들은 먼저 우물을 파고 우물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먼저 브엘세바로 이주하고 난 뒤에 우물을 팠습니다. 그때 우물이 나오지 않으면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물을 팔 때 갑자기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찾아왔습니다(26절). 이삭은 그들을 보고 "나를 쫓아내고서는 왜 왔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안다. 우리가 서로 해치지 않기로 약속하자."고 말했습니다(27-28절).

그 제의를 받고 이삭은 그 동안 가졌던 한과 상처와 섭섭함을 털고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잔치를 베풀어주고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을 평안하게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에 대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의 소원을 속히 이뤄주실 것입니다. 용서가 없으면 소원성취도 없을 것이고, 용서가 있으면 소원 성취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비멜렉 일행을 용서하고 평안하게 보낸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갑자기 종이 와서 "주인님! 우물이 터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32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은혜 체험을 오래 간직하고자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세바'라고 붙였고, 그 이름이 나중에 브엘세바로 변하게 되었습니다(33절). 브엘세바란 '맹세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미운 사람과 화해를 다짐할 때 반드시 축복의 우물을 터뜨려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가면 겉으로는 황무지처럼 보여도 그곳에서 축복의 샘이 터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화려한 곳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내게 있게 하신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이 초라한 곳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가서 그 초라한 곳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샘 근원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화려한 곳을 찾지만 진짜 복된 사람은 황무한 땅에 가서 그곳을 축복의 땅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 르호봇에서 브엘세바로 가십시오 >

여러분! 항상 브엘세바의 삶을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브엘세바의 삶은 자기를 버리는 헌신이 있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삶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시고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내가 헌신한 삶과 내가 헌신한 시간들이 다 잊혀지고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물질과 시간은 사라져도 내가 헌신한 삶의 내용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축복의 재료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훈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산골에 삼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신기한 보화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첫째에게는 멀리 보는 '망원경'이 있었고, 둘째에게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있었고, 셋째에게는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사과 한 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 왕의 외동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누구든지 내 딸의 병을 고치는 자를 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그 방을 첫째가 가진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고, 둘째가 가진 양탄자를 타고 와서, 셋째가 가진 사과를 먹여 공주를 살려냈습니다. 세 사람이 다 공을 세워서 왕은 누구를 사위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망원경과 양탄자는 그대로 있지만 사과는 더 이상 없으니까 셋째가 가장 큰 희생을 했다"고 여기고 셋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된 자리는 헌신의 자리이고, 가장 불행한 자리는 헌신이 없는 자리입니다. 헌신의 결과물이 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귀한 열매를 우리 품에 안겨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목찬수 군의 백혈병이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왔고, 개척교회를 하시는 목진훈 목사님이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절망하지 않도록 여러 차례 물질적으로 힘써 도왔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도 우리 선교팀 4명이 가서 기도해 드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암세포가 머리까지 퍼져 매우 위독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골수이식수술을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한 자에게 드려야 할 '사과 한 개'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찬수 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시고, 수술비용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세요.<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누군가의 절실한 필요를 위해서 내 호주머니를 비울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때 사랑을 배우게 되고, 영혼의 풍성함과 삶의 활력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헌신을 모르면 인생이 얼마나 무력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요즘 왜 한국 교회가 무력하게 느껴집니까? 몸을 던져 헌신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몸을 던져 위험에 뛰어드는 사람이 곰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몸을 던져 헌신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은 따듯하고 살만한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 헌신하는 사람이 깊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

어제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제자가 되는 길(Learning to Be A Disciple)"이라는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는 관찰(observe)은 하고 지켜보기(watch)는 하지만 참여(involve)는 하지 않는 모습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분은 그런 사람들은 '발코니 사람들(balcony people)'이라고 부르는데, 발코니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지 말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여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더 나아가 헌신(commit)해야 그 사람을 통해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특히 인간관계의 헌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인간관계가 없거나 인간관계를 못하는 외로운 영적 전사는 참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 얼마 전에 방영된 미국 신병 모집 광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 광고에서 카메라가 사막 한 가운데를 홀로 걷는 한 젊은 군인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 군인이 말합니다. "비록 저와 같은 1,045,690명의 군인들이 있어도, 저는 저만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군대의 힘은 숫자에 달려 있지 않고, 나 자신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하나의 군대입니다." 이 젊은 군인처럼 자기를 람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요즘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군대는 전쟁에서 하루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팀으로서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공동체 정신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자기를 하나의 군대로 생각하는 영적인 람보들이 너무 많은 것이 탈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소홀히 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해야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도 잘해야 합니다. 그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면 몸은 편해도 은혜의 참 맛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참여하고 몸을 던져 헌신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 일에 깊이 뛰어들면 상처받을 확률은 확실히 높아집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교회와 화장실과 처갓집은 멀리 할수록 좋다"고 주장합니다. 잘못된 편견입니다. 배수 처리만 잘 되면 화장실은 가까운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처갓집이 가까우면 아내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가까이 하면 상처도 받을 수 있고, 몸은 더 피곤할 수 있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에서 한 개 이상의 소그룹에 들어가고, 하나 이상의 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일에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멀찍이 있으면서 교회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 일의 참여자가 되면 상처받을 수도 있고, 힘이 들 수 있지만, 바로 그때 상처를 덮고도 남는 큰 은혜가 주어지고,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배가될 것입니다.

지난주에 도일 세이저 목사님의 창세기 28장 강해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믿음은 체험(experience)이었고, 우리 아버지에게 믿음은 전통(tradition)이었지만, 우리에게 믿음은 편의(convenience)가 되었다." 지금 자기 편의를 위해서 종교라는 열차를 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깊은 맛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브엘세바의 삶을 살기 위해 과감히 내 편의의 옷을 벗어 던질 때 하나님은 반드시 깊은 은혜의 체험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항상 많이 취하고 즐기려는 르호봇의 삶보다 많이 베풀고 헌신하는 브엘세바의 삶을 추구함으로 인생의 샘 근원이 마르지 않는 축복을 누리시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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