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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예수님만 따릅니다 (마 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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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만 따릅니다(마7:15-19) 

마7:15-19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잠시 머리도 식힐 겸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채플린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유명했습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습니다.
모두들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을 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사결과는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했습니다. 진짜 채플린은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입니다.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화입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어떤 참기름가게에 가면 이러한 간판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
참기름이라는 말뜻이 기름에다가 "참"자가 이미 붙어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도 부족해서 그 앞에 수식어가 3개나 더 붙어있습니다. "정말로, 진짜, 순" 오죽이나 가짜가 많았으면 그러한 간판이 붙어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가짜가 많은 것이 항상 문제입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장난감가게 하나가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 되기로 소문난 가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가게의 바로 왼쪽에 새로운 장난감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가게는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Best Quality Guaranteed."
최고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일 뒤였습니다. 이번에는 본래 있던 장난감가게의 오른편에 또 다른 장난감가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가게도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Lowest Price Guaranteed."
최저의 가격을 보장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래 가게의 주인은 그 틈바구니에 끼여서 얼마나 마음 속으로 고민을 많이 했겠습니까? 한쪽은 최고의 품질을 보장한다고 하지, 한쪽은 최저의 가격을 보장하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몇 일 밤을 새워서 자기 가게에도 큰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 Main Entrance."
주 출입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장난감가게의 주 출입구는 자기 쪽이니까 이쪽저쪽으로 눈 돌리지 말고 다 자기에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바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여기에 다른 문이 있다, 여기에 또 다른 길도 있다." 이렇게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눈길을 돌리지 맙시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출입구를 통해서만 우리는 천국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른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15절입니다.

둘째로,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른바 두 나무의 비유입니다. 16-18절입니다.

셋째로,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들에게는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19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만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를 미혹하는 자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5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은 나쁘다, 거짓 선지자들은 옳지 않다"정도로 약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시면서 강한 경계를 하셨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거짓 선지자들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겉에는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양을 돌보는 목자들이 양의 옷을 입었습니다. 양가죽을 해서 양털로 만든 옷입니다. 그 옷을 입음으로서 양무리와 친근감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목자로서 양을 보살피는 듯한 모습으로 가장하면서 양들에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차라리 마7:6에 나오는 말씀처럼 개나 돼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덜 가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양을 보살피고 지키는 목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이 얼마나 가식적입니까?

그들의 본색은 무엇입니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마음 속에는 탐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은 양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고, 양을 해치고 죽이는 일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양들을 파멸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거짓 선지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대문에 "개조심"이라고 써 있으면 집안에 사나운 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개도 없으면서 "개조심"이라고 쓸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종종 "외식"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누구의 대명사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척 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구제하고, 기도하며 금식을 행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했습니다. 그들은 기도시간이 되면 회당 앞을 지나가면서도 또 큰 거리를 지나가면서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아예 금식하는 것처럼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하며 금식했습니다. 그러니 겉으로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경건 생활에 힘썼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서 자기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단호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 말씀을 여섯 번씩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컨대 마23:15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선량한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넓은 길로 또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 끝날에 있을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좌로도 우로도 우리의 눈길을 돌리지 마십시다.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이 "내가 지금 거짓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거짓말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거짓말대회가 열렸습니다. 거짓말에 관한 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열변을 토하면서 열심히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차례가 되어서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머뭇머뭇 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대회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이 대회에 한 번 출전해보라고 저를 부추겨서 그저 등 떠밀려 이 자리에 섰을 뿐입니다. 저는 거짓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그만 내려가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내려갔습니다. 나중에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거짓말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자기 이마에 거짓이라고 써 붙이고 다닌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거짓이라는 명찰을 달고 다닌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판별할 수 있습니까? 16절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You will know them by their fruits." 우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시적으로는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의 일종으로서 갈매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 열매도 작고 까만 것이 포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갈매나무의 갈매가 열린 것을 멀리서 보면 마치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줄기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 열매도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엉겅퀴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이 무성합니다. 멀리서 보면 무화과나무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엉겅퀴의 꽃도 무화과처럼 그 모양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갈매나무가 포도나무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갈매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엉겅퀴가 무화과나무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똑같은 내용을 17절에서는 긍정적으로 표현하셨고, 18절에서는 부정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선목선실"이고, "악목악실"이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선해야 열매도 선하고, 나무가 악하면 열매도 악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모두가 하나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수도 했습니다. 잘못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정말 철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예수님에게 자기들을 위한 인사청탁을 했습니다. 의심이 많은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붙잡혔을 때 모두 예수님을 버려 두고 달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도 하나같이 다 부족하고 실수도 있고 허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는 좋은 나무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다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제자 가룟 유다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본질적으로 못된 나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성실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궤를 맡았습니다. 그만큼 그가 신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양의 옷을 입고 나온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못된 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선량한 백성들을 넓은 문, 넓은 길로 미혹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2요 10절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집안에 들이지도 말고, 아예 인사조차도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근본적으로 못된 나무요,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좋은 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참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좋은 나무라고 일컫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5:1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또 요15: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젖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늘 충만한 우리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종말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9절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못된 나무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찍히고 베어져서 연료용 땔감으로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마13:41-4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지옥을 풀무불에 비유하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뜨겁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마25:4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지옥불은 꺼지는 법이 없습니다. 영영한 불입니다. 계21:8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 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지옥은 뜨거운 불로 인해서 고통스럽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황이 탈 때마다 심하게 풍겨져 나오는 유독가스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지옥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서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세세 무궁토록 밤낮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어떤 남자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내를 따라서 그저 이따금씩 교회를 출석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주색잡기에 놀아나는 일에 바빴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서 슬금슬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십중팔구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죽어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다가와서는 천국과 지옥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먼저 천사는 그를 이끌고서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천국에 가보니까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천사들과 함께 새 노래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앉아 있으니까 좀이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이고, 천국 생활이 왜 이리 따분하냐? 무슨 재미가 있어야지."
잠시 뒤에 그는 또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곳에는 술집도 있습니다. 또 카바레도 있습니다. 카지노도 있습니다. 또 여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그는 신나게 구경을 하다가 넌지시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옥체질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그는 자신의 원대로 지옥에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지옥에 와보니까, 사정은 전연 달랐습니다. 지옥의 가운데 불과 유황으로 타는 큰 못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그를 보더니 붙잡아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깜짝 놀라서 외쳤습니다.
"이곳은 조금 전에 보았던 광경과는 너무나도 다른데요?"
그러자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네가 관광비자로 지옥에 왔으니까 전시용으로 만든 지옥을 마음껏 구경하고 돌아갔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영주권을 가지고 이곳에 왔으니까 너는 이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하느니라."
그가 깜짝 놀라서 깨어 보니까 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주색잡기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장기나 바둑을 잘못 두면 다시 새롭게 두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방통행입니다.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나면 두 번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애당초부터 정신을 잘 차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셨던 박대선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제시대때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교사를 하면 초봉으로 90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꽤 많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신 박상동 목사님은 아들이 자기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려면 신학을 공부해야 하고, 4년 뒤에 신학교를 마치고 나서라도 목사가 되기 전에 전도사로 교회에서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돈으로 15원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갈등을 느끼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아버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되었다 싶어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인사만 하고 얼른 뒤돌아 서서 집을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친이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얘, 대선아! 너 잠시 그 자리에 서거라. 너 목사가 되는 것이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거든 신학교에 아예 갈 생각을 하지 말거라."
그 한 마디에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4년간 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되니까 정말로 그 당시 돈으로 15원의 봉급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뒤로 그에게 무한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를 목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박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연세대학교 총장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월드비전의 회장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명예를 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때로는 힘들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참된 승리가 있습니다. 마28:20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고 동행해 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이 생명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는 승동의 교우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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