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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서 상을 기대하라 (잠 25:21-22, 눅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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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상을 기대하라 ( 잠 25:21-22, 눅 6:20-23 )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칭찬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칭찬 듣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싫지 않습니다. 꼭 상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상을 받으면 기쁩니다. 연예인들이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받는 이런저런 상들을 받으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우리도 삶을 마무리 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상을 주신다면 굉장히 기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은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상은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은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누가복음의 본문 말씀은 평지복음이란 별명이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보훈과 흡사하여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산에서 하신 말씀인 것에 비해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른 곳에서 같은 내용의 설교를 반복하신 것 같습니다. 산상보훈의 팔복과 같은 내용의 설교이지만 누가복음에는 네 가지 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세보다 내세의 복을 누릴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요, 너희가 배부를 것이요, 너희가 웃을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보다 가장 큰 복은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상을 받으려면 하늘 나라는 이미 간 것이겠지요.

성경은 상급을 설명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6:23의 상은 삯을 뜻하는 ‘미스소스’(mistho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노동의 대가를 의미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타난 하루의 품삯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사람에 대하여 정한 대가를 주십니다. 다른 한 단어는 ‘아포디도마이’(apodidomai)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포’(apo)라는 “뒤로” 또는 “거꾸로”라는 뜻의 말과, ‘디도마이’(didomai)라는 “주다”라는 말의 복합어입니다. ‘아포디도마’이란 “되돌려 주다” 또는 “간단히 갚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6의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란 말은 두 단어가 결합된 단어를 사용합니다. ‘미스소스-아포디도마이’입니다. 즉 일한 대가로 그 삯을 지불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에 대하여 반드시 보상을 하십니다. 반드시 그 대가로 상을 주십니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버릴 때 복이 있고 상이 있습니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버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죽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상받을 일이란 말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생명을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보상을 잃을 수는 없다. 그는 자기의 머리를 잃을 수는 있을지언정 면류관을 잃을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생명을 잃고 머리를 잃는 것은 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핍박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참 성도를 구별해내는 방법입니다.

어떤이가 말한대로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예수님이 핍박의 이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 나의 불의, 나의 게으름 등으로 잘못된 것에 대한 핍박은 핍박이 아닙니다. 참 고난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20에는 말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자신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칭찬도 없고,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어떤 설교가가 말했습니다. “핍박이란 좋은 일에 대하여 나쁜 사람에게 받는 것이요, 형벌이란 나쁜 일에 대하여 좋은 사람에게 받는 것이다”. 좋은 일에 대하여 나쁜 사람에게 핍박을 받으면 좋으신 하나님께 좋은 상급을 받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미워할 때에 상을 기대하십시오.

세상으로부터의 미움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상급의 조건입니다. 요한복음 15:18에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23에는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과 하늘 나라는 서로 상반되어 있습니다. 두 쪽에서 다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으려면 안됩니다. 세상과 하늘 나라는 소속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소속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악인들이 성도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들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거룩함 때문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거룩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과 구별된 것을 싫어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을 했습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스데반의 옷을 지키던 자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다메섹으로 가기 전에는 그는 세상 편이었습니다. 율법편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감겼던 두 눈이 아나니아를 통해 떠지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던 사람이었지만 복음 때문에 금방 핍박을 당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쫓겨서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잡아올 때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서 왔습니다. 아마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잡아와서 공로상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상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을 때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미움과 죽임과 고통이 있을 이때 진정한 상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기대 때문에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갑니다(빌 3:14). 미움이란 미워하는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길을 가로막은 벽돌을 발로 찼다고 벽돌이 아프지 않습니다. 내 발만 아픕니다. 미움은 미움받는 사람을 바꿔놓지 못합니다. 미워하는 당사자에게 결국 아픔이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상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상이 주어졌습니다. 상은 이미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0:35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용기를 줍니다.


둘째, 사람들이 멀리할 때에 상을 기대하십시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할 때 마음이 가장 아픕니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유리당할 때 가장 큰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이란 ‘왕따’는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파문이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벌입니다. 공민권을 박탈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형법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한센병자나 혈루병자 등은 가족과 격리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환자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환자들끼리 모여 살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섭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육체적 병이 아니라 격리되는 심리적 병이었습니다. 모세는 궁중에서 살면서 자기 백성을 구박하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는줄 알았는데 다음 날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자 한 사람이 “어제는 애굽인을 죽이고 오늘을 또 우리를 죽일 샘이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자신의 40년의 거처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멀리 떠날 때의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6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보화보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헌신 뒤에도 상주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상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의 동기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상대가 안된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좁다고 합니다. 뇌물을 주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잘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우리를 멀리 할 때 이 때에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왕따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주어 늘 혼자였습니다.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는 제자들도 다 도망하고 혼자였습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주린 자들에게 먹이고, 사랑을 쏟은 동족이지만 빌라도 앞에서 죽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늘 혼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혼자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늘이 상은 쌓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므로 우리가 잘 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우리가 우리 선행에 대한 상급으로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주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서 그 기대를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우리에게 상 주실 분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기대할 때에 하늘의 상급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버릴 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하늘의 상급이 있습니다.


셋째, 사람들이 욕할 때에 상을 기대하십시오.

욕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쥐를 통하여 실험을 하였습니다. 먹이를 주면서 쓰다듬어주고 예뻐한 쥐는 아주 튼튼하게 자라지만, 먹이를 주면서 욕하고 때려준 쥐는 털이 까칠까칠하고 빨리 죽었다고 합니다. 나무도 욕을 하면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영국의 어느 공원에 열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려고 의견을 모았는데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은 잘 자라지만 가룟유다 나무만은 빨리 시들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나무 앞에 오면 발길질을 하고 못생겼다고 합니다. 나무도 속이 상해서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일본의 어느 과학자는 물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두 컵의 물을 떴습니다. 한 컵은 천사의 물이라고 하였고, 다른 한 컵은 악마의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악마의 물은 시커멓게 썩고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욕은 이렇게 모든 것들을 망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욕을 들을 때에는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죄가 있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욕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지만 그는 욕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욕을 들은 후에 욥에게 큰 상급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회복된 다음에 고통을 당하기 전보다 두 배의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들었습니다. 침을 뱉고 희롱하고 머리를 치는 치욕적인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욕은 하늘의 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가는 시간에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칩니다. 이 일로 그들에게 핍박이 시작됩니다. 병자를 고쳤으면 고맙다고 해야 할텐데 유대인들은 오히려 이 일로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 관원들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고 합니다. 그들은 상을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욕을 얻는 것은 하늘에서 상을 받을 일입니다.


넷째, 사람들이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할 때에 상을 기대하십시오.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악하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예수님의 이름 ‘Jesus Christ’가 욕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까지도 악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왔다”(행 17:6)고 하였습니다. 안디옥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이름이 아니라 나쁜 이름이었습니다. 조롱하는 이름이었고 욕하는 이름이었고 악한 이름이었습니다. 요즘은 잘 듣지 않지만 오래 전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는 소리이며 욕하는 소리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말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으니 우리도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미쳤다는 말 한번은 들어야지요.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교회에 미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짜 미친 듯이 일합니다. 돈버는 사람들은 돈에 미쳐야 됩니다. 학자들은 학문에 미쳐야 됩니다. 도둑들은 밤에 잠도 안자고 설쳐요. 그런데 밤에 잠 다 자고 놀거 다 놀고 미치지도 않고 예수 믿겠습니까? 한번 미쳐보세요. 미친 사람의 특징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누가 뭐래도 입이 벌어지고 히죽히죽 웃습니다. 이것이 미칠 때의 기쁨입니다. 로마 황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로마군인에게 해룰 주었다고 박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을 파괴했다고 박해했습니다. 성찬이 사람의 살을 먹는다고 식인종이라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불의 심판이라고 한다고 박해했습니다. 상전과 종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던 로마 사회에 평등을 전한다고 박해했습니다. 특히 네로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시가를 불지른 방화범이라고 책임을 전가하여 죽일 빌미를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이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런 박해와 죽음이 상입니다. 순교는 큰 상입니다. 잠언 25:21-22에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고 합니다. 박해하고 고통을 주는 원수에게 오히려 선을 배풀면 상이 있습니다.

결론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골프를 치러 갔습니다. 그날 자신은 공이 숲으로 날아가고 물에 빠졌지만 자신이 속한 조의 다른 3인이 잘해서 상을 탔습니다. 공을 숲으로 날렸던 물속에 빠뜨렸던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경기에 나가 제대로 된 4인조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4인조는 막강합니다. 바로 나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을 거창한 신학용어로 위치적 성화라고 합니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나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때문에 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상을 받습니다. 계시록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열거됩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하십니다. 둘재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여 주십니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흰 옷을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실 것입니다. 승리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잘 보세요. 하늘의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만이 주실 수 있는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그 자체가 상급입니다. 하늘에서 더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22:12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줄 상을 우리의 일한대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속히 오십니다. 이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이 땅을 사는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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