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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영생, 구원, 심판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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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 영생, 구원, 심판
본문  요한복음 3:16~21

추석을 전후해서 태풍이 오기 전까지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매스컴에서 고향이라는 말을 자주 대하면서 지난 주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주간에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도 여럿 계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요절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꼽으라고 하면 로마서 1장 17절의 후반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꼽습니다.
요한복음 3장16절과 로마서 1장 17절은 근본적으로는 같은 맥락이요 같은 내용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강조하는 것은 천주교가 행위를 강조하니까 거기에 대해서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 복음의 고향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같이 방문하여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복음서 속에 있는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 어느 양반이 자기의 어린 아들이 공부를 시작할 나이가 되자 제일 뛰어난 학자에게 맡기면서 잘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1년 뒤에 이 양반은 아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내 아들이 지금 어디까지 공부를 했을까? 머리도 똑똑한 편이고 유명한 학자가 가르치고 있으니 지금쯤 사서삼경에 들어가서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있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가보았더니 그때까지「천자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늘 천, 따 지…, 대단히 실망하고 돌아왔습니다.
1년 뒤에 다시 찾아갔더니 아직도 「천자문」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 양반은 안 되겠다 싶어서 아들을 데리고 돌아와서 자기가 직접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천자문」을 대니까 다 압니다.
「천자문」 위가 「동몽선습」(童蒙先習)인데 그것을 대도 다 알고 나중에 사서삼경을 대도 막힘이 없습니다.
어찌된 영문인가 알아보았더니 이 학자는 하늘 천(天)자를 가르친 다음에 하늘의 원리, 하늘과 관련된 일들을 다 가르치고, 따지(地) 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이런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학자의 교육 원리는 ‘「천자문」하나를 다 이해하면 한문은 다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아들을 데리고 다시 이 학자를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계속해서 가르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아드님의 학문은 이미 버렸습니다’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를 잘 이해하면 복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알면 신구약성경 66권을 다 아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란 어떤 종교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근거를 두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이며,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기독교는 유일한 은혜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과 영생의 종교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질문을 한 사람이 ‘잘 알았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들을 하나 하나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16절에는 기독교의 중요한 말이 거의 다 모여 있습니다. 사랑, 독생자, 믿는 자, 멸망, 영생, 이어지는 17절에는 심판, 구원,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안았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으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다면 나머지 것들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 ‘기독교란 어떤 종교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의 첫째가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입니다’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고백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사도신경, 그 밖의 여러 신조들, 또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 모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첫 번째에 놓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상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이방인을 포함하여 사람이 살고 있는 전 세계를 말합니다. 
전 인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는 이와 같이 우주적입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세상의 죄 모두를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했습니다.
아주 약한 존재인 어린 양이 세상 죄, 그 무거운 것을 지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역설적인 진리요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로마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비틀거리고 넘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성지순례에서 골고다 언덕길을 찾아가면 그 장소들이 표시되어 있지요.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그만큼 무거웠습니다. 실제로도 그만큼 무거웠고 상징적으로도 무거웠습니다.
이 세상은 또한 영원히 멸망 당할 대상을 말합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서 구원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요즘 잘 알려진 CM에 히딩크 감독이 서투른 한국말로 ‘하늘만큼 땅만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보다도, 땅보다도 큽니다.
찬송가 404장 3절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크게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에는 이런 뜻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랑은 영적 사랑입니다.
신적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랑’은 ‘에카페산’ 이라는 말인데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를 말할 때 쓰는 품위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고아원을 찾아가 거기 있는 아기 가운데 한 명을 입양하는데 못 생기고 지능도 낮은 아이를 택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입양을 의논하기 위해 이 고아원을 찾아왔었으나 이 아기를 보고 입양하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아기를 입양시키고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아기는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는 가운데 귀엽고 똑똑한 어린이가 되었고 성인이 되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된 줄로 알고 있었는데 고아원 원장이었던 분에게 자기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양부모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새롭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 받는 사람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줍니다. 부모님이 수험생 자녀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수험생은 용기를 얻어 남은 50여 일, 최선을 다 해 준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힘, 용기와 함께 그 이상의 것인 생명을 줍니다.
에베소서 2장 5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좋은 부수적인 혜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신용카드를 만들 때 ‘어느 신용카드가 부수적인 혜택이 제일 많나?’ 하는 것을 보고 결정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6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시고 부수적인 혜택으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덧붙여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다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하셨는데 이 말씀 그대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려줍니다.

오늘의 말씀은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15절에서 끝났고 16절부터는 일반적인 말씀이라고 하는 분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21절까지가 모두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보고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3:2a)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갈릴리 출신의 젊은이에게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랍비’ 또 ‘선생’이라고 부른 것은 니고데모로서는 예수님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할 때는 ‘많은 선생들 가운데 하나로서 뛰어난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독생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장 귀중한 존재임을 밝혔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다른 곳에서는 “보내셨으니”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주셨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주는 것은 보내는 것보다 더 강렬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른 것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신앙의 유일한 대상을 알려줍니다.
다른 것을 믿어서는 안 되고 그를, 독생자이신 예수님만을 믿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종교를 갖는 것은 안 갖는 것보다 좋은 일이지요’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 뒤에는 ‘아무 종교나 하나 가지세요’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안 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낳습니다.
여기 부산을 가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고속버스들이 많이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그 가운데 아무 버스나 타도 된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마다” 라는 말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을 알려 줍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되고 믿어야만 된다고 말합니다.
찬송가 343장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 스크린에 그 가사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믿어야만 할 수 있다고 찬송을 부릅니다.

믿는 것은 사랑과 복종으로 그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 믿기만 하면 됩니다.
사원 모집 광고 같은 것들을 보세요. 조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는 몇 살 이하이어야 한다, 신장은 얼마 이상, 시력은 얼마 이상이어야 한다, 무슨 법에 저촉되지 말아야 한다, 병역의무를 이행했어야 한다, 무슨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요즘은 토플이 몇 점 이상이어야 한다, 좋은 직장일수록 조건이 많습니다.
구원은 가장 좋은 것인데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격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믿으면 된다!’ 하나입니다.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조건입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멸망하지 않고’라는 말의 원어는 ‘잃어버리다’ 또는 ‘파괴되다’라는 뜻을 가진 자동사입니다.
이것은 멸망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의에 의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교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응답하지 않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이 말씀은 위대한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지 않아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면 믿지 않은 사람의 책임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갖게 하겠다고 허락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보호를 약속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기 멸망과 영생이 같은 문장에 함께 나옵니다. 
성경에는 영생과 멸망이 이와 같이 짝을 이루어 대조되면서 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50년 전, 6․25를 끝내기 위해 휴전 회담을 진행할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이 포로송환 문제였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에 있는 인민군 포로들을 무조건 전원 북으로 강제송환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몇 달 동안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매듭이 지어지고 포로들을 송환할 때 남에 남기를 원하지 않고 북으로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 포로들은 제3국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멸망과 영생에는 제3국이 없습니다. 제3의 길이 없습니다.
멸망 아니면 영생,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는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압축된 표현으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밤중에 애써 예수님을 찾아 온 찾아온 니고데모의 심정으로 이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입니다.
남 보기에는 부러워할 것이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왜 낮에 찾아오지 않고 밤에 찾아 왔을까? 낮에는 예수님이 너무 분주하셔서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체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갈증을 가진 사람에게는 물이 더 시원한 법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합니다.

또한 니고데모처럼 변화되어야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니고데모는 그것을 반박합니다. 이 일은 요한복음 7장 5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찾아옵니다(요19:39).
이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니고데모를 예수님의 비밀 제자, 드러나지 않은 제자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자리에서 당장 공회원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분도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공감한다고, 은혜 받았다고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는 것만이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을 살리며 생업에 종사하는 것도 귀중한 일입니다.

아까  ‘기독교란 어떤 종교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이 ‘기독교는 하나님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유일한 은혜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과 영생의 종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했는데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라고 하는 말에는 이런 의미도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변호하고,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려 사형 당한 죄수를 위해 시체에 바를 것을 가지고 오는 것은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니고데모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30년 전인 1973년 5월에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그 때 윤순재라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호기심을 갖고 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소년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다만 학교가 여의도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일인가?’ 궁금해서 따라 갔을 뿐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요한복음 15장 9절을 본문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씀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설교 끝에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하는 구원의 초대 시간에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습니다.
이 소년은 그 뒤에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지금 몽골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몽골에 한국 교회에서 세운 대학이 둘 있는데 하나는 장로교에서 세운 울란바토르 대학이고 또 하나는 저희 교회 이상규 장로님이 부총장으로 수고하고 있는 후레 정보통신대학입니다.
윤순재 목사님은 지금 울란바토르 대학 총장으로 수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 사람은 참 복음적이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요?
‘그 성도가 얼마나 복음적이냐?’ 하는 것은 그가 이 말씀에 얼마나 공감하고 감격하느냐 하는 것과 비례합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복음적인 교회냐?’ 하는 것은 그 교회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이 말씀을 얼마나 강조하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느끼시기 바랍니다.
요즘 ‘육화’(肉化)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성육신을 줄인 말인데 요즘 이 말은 ‘몸에 밴다’ ‘하나가 된다’ 이런 뜻으로 씨입니다.
이 말씀이 육화되시기 바랍니다. 몸에 배기 바랍니다.

원래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완전한 일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100을 말하고 싶어하는데 입밖으로 나올 때는 표현이 서둘러서 60이나 70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알아듣는 사람이 그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또 깎입니다.
어떻게 실험했는지 모르겠지만 전달하려는 것의 17%만 제대로 전달된다는 심리학의 이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을 들어 이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체험하는 것이고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연세 많은 권사님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권사님은 젊은 시절에 손이 귀한 집에 시집왔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첩이 들어와야 할 판입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늦게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쫓겨나는 것을 면했습니다. 여기 성경의 표현을 빌면 멸망하는 것을 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만 나오면 목이 매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의 외아들과 독생자인 예수님은 다른 차원이지만 여하튼 그 권사님은 이 말씀을 체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 들어가 한참 있으면  나도 한 그루 나무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수풀 가운데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어야합니다.
내 몸에 은혜의 진액이 흘러야 합니다.

이번에 태풍 매미가 올 때 처음에는 ‘예전의 태풍 사라호 이상이다’라고 했습니다. 1959년에 태풍 사라호를 겪은 분들에게는 그 한 마디면 그만이었습니다. 풍속이 어떻고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때 태풍 사라호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는 사랑의 태풍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떤 화가가 파도가 이는 그리고 싶어했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화가는 큰 결심을 하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항구에 가서 막 출항하는 배의 선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말하고 자기를 돛대에 묶어달라고 했습니다. 배는 이 화가를 돛대에 묶은 채로 출항했습니다. 무서운 파도가 몰아닥쳤습니다.
이 화가는 처음에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파도에 몸을 적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파도를 체험했습니다.
나중에는 파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파도와 육화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붓을 들어 파도를 그렸을 때 비로소 마음에 드는 명작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과 하나가 되세요. 그럴 때 명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다녀오신 분들, 부모님의 사랑을 재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고향의 푸근함을 다시 한 번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피곤을 씻어주고 힘이 되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 세상에서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의욕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설과 추석이 있어서 일년에 두 번씩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누리고 있는 복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말씀은 복음의 고향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이 말씀을 살피는 것을 통해 힘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그 사랑, 영생의 소망과 확신, 이것을 얻고 그것을 붙들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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