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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동굴에서 / 왕상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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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인생의 동굴에서
본문 : 열왕기상 19:9-18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 작품 중에 ‘폴리티아’ 즉, ‘국가론’ 또는 ‘공화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7장에 ‘동굴의 비유’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굴 속에 거하는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어릴 때부터 손발은 물론 목까지 묶여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동굴 벽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죄수들이 항상 바라보는 벽면에는 죄수들이 앉은 뒤쪽에 있는 동굴입구로부터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동굴 입구에는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구나 인형 또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공작물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지나갈 때면 벽면에는 여러 가지 그림자가 만들어 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쇠사슬에 묶여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항상 벽면에 생기는 그림자만 보아온 죄수들은 이 그림자와 그림자가 하는 이야기가 실체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죄수 중 한사람을 풀어주고 동굴 밖 세상을 보여줍니다. 죄수는 동굴 밖의 푸른 하늘, 맑은 공기, 초록으로 물든 푸른 초장 등 놀라운 세상을 보게 되면서 진짜 세계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굴 속으로 다시 돌아간 죄수는 동굴 속 죄수로 남기보다 실제 세상에서 혹 천대 받더라도 지상에서 살기를 원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처한 현실, 살아가는 이 세상, 현재 알고 있는 이대로가 전부요, 실제 생활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동굴 속 죄수가 자기 앞에 전개되는 그림자와 들리는 말소리를 인생의 전부라고 믿다가 죽는다면 우리는 죄수를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의 세상이 동굴 바깥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했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림자와 들리는 소리가 전부라고 믿는다니 말입니다.

본문에도 역시 동굴 속에 죄수처럼 갇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동굴 속에 있습니다. 낙심하고 좌절하여 몹시 탈진해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엘리야를 발견합니다. 몸도 몸이지만 그 마음과 영혼도 갇혀 아름답고 밝은 세상이 존재하는지 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살아가지만 정작 현실을 볼 때 인생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어느새 실패자의 모습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도 인생의 동굴 속에 갇혀있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여 의미 없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그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굴을 경험한 이후 하나님의 역사무대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굴의 고난과 실패를 거쳤기에 그는 이전 보다 더 아름답게 쓰임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와 고난의 연속인 이 동굴을 통해서 엘리야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셨습니까? 엘리야가 동굴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단련된 것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발견한 삶의 의미와 메시지를 우리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동굴은 더 이상 동굴이 아닙니다. 고난과 실패, 어둠을 넘어서 밝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곳으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실패와 어려움을 통해서 인생의 동굴 속에 있는 엘리야를 가르치신 하나님이라면,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기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세우시기 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께서는 동굴을 통해서 엘리야가 엘리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원하셨습니다. 10절 말씀 엘리야가 현재 자기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실패를 설명하고 외로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습니다. 엘리야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했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었지만 그가 가는 곳이면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이 엘리야를 먹였습니다. 그를 섬겼던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죽은 아들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자 팔백오십 명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모두 섬멸시켰던 승리와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아합의 마음을 돌이키고 백성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게다가 그가 기도할 때에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다시 내리는, 임금과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던,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엘리야가 다른 선지자들도 다 죽고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전의 승리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처럼 당당했던 그의 신념과 모습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목숨 구걸하며 도망 다니는 도망자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말 한마디에 무참히 꺾여지고 부서진 한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웅의 고백 말입니다.

엘리야는 아마 이런 자신의 모습에 낯설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저 여자의 한마디에 무서워서 도망가다니.’ 로뎀 나무 아래서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까지 기도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얼마나 좌절 했을까요? 결국 홀로 남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언제 발견했습니까? 베드로는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물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떠날지라도 자기는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내면을 보시고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주님 나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습니까? 나는 주님의 죽는 자리라도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큰소리 쳤을지 모릅니다. 그런 그가 어린 계집아이의 질문 앞에 삼년간 쌓아온 언약과 의리 그리고 신념이 무너지고 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주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닭이 울었을 때,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왜요? 회복될 수 없도록 부서지고 깨진 자신의 연약함을 직면한 통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한 주님을 만날 용기가 없었습니다. 솔잎 먹는 송충이처럼 바닷가 어부로, 옛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나 베드로는 모두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말 한마디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때야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경험과 연륜, 지혜와 지식이 대단한 것 같지만 더 본질적으로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사건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남을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 때 인생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립니다. 이것을 알 때 오늘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야의 동굴은 그를 파괴하고 패배시키고 낙심시킨 것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낙심한 분이 여기 계십니까? 이것 밖에 안 되는 존재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파멸시키는 경험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쓰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할 때 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듯이 신앙도 성숙하게 됩니다. 11,12절 말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여러분 여기 나타나는 강한 바람, 지진, 불과 같은 현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더라’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엘리야는 하나님의 임재 방법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승리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당신의 백성을 괴롭히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을 불살라 버리는 심판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분노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엘리야의 고백을 보십시오.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 이 말 속에는 “승리의 그 하나님은 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왜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 신세가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주님을 따르는 많은 선지자들이 다 죽은 것 아닙니까? 하나님! 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항의하는 엘리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승리하는 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실패한 자의 하나님, 약한 자의  하나님, 무너지는 자의 하나님, 낙심한 자의 하나님, 절망하는 자의 하나님, 이것을 엘리야가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그 방법 외에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편협하다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실패한 순간에도 함께하신 하나님을 엘리야는 체험했습니다. 19:5,7에 보면 ‘어루만진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어로‘나가’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위로와 계시를 주실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어루만짐은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새 힘을 주고, 상황을 바꾸는 능력의 어루만짐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나는 죽습니다.’라고 할 때,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심으로 그에게 새 힘과 새 능력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모세가 만났던 호렙산으로 걸음을 걷도록 격려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어루만짐 속에는 ‘너는 내 것이야, 너를 사랑한다.’는 신뢰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너는 여전히 내 것이란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것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나님은 자신이 겪은 그 아픔으로 우리를 어루만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절망 가운데 소망을 만드시는 그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이 동굴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로 이 실패와 절망의 순간에도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패라 좌절이라 말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십니다. 엘리야가 절망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과 희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희망과 계획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엘리야에게 놀라운 변화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엘리야가 싸우고 승리하고 다투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면, 이제는 두 나라의 왕을 세우는 일을 맡기십니다. 그의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맡기십니다. 남겨진 칠천 명을 일으켜 세워 많은 민족에게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가르치는 언약의 백성으로 세워가는 일을 엘리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양을 베드로에게 언제 맡기셨습니까? 베드로가 신앙고백 할 때였습니까?  물위를 걸을 때였습니까? 주님을 지키겠다며 칼을 빼서 들고 있을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후 자기 고향 바닷가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물으시는 가운데 베드로를 회복시키십니다. 그 다음에서야 성숙해진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십니다.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사람을 양육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엘리야에게 이전과는 다른 사역을 맡기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섬기던 교회에 고려대 수학 강사를 하셨던 부목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신학을 하신 분인데, “수학 잘하는 사람은 수학 선생하면 안 돼요.”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수학 잘하는 사람이 수학 선생을 하면 수학을 잘 못하는 학생을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니?”하며 도리어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목표도 알아야 하지만 학생들과 더불어 어떻게 그 목표에 도달하는 가도 알아야하는데, 학생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선생은 학생을 어떻게 데리고 가야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아본 사람만이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고독해본 사람만이 고독이 무엇인지 압니다. 지치고 힘든 일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그것이 인생의 어떤 의미인지를 압니다. 버림을 받아본 사람만이 버려진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압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람을 키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동굴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자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한 자도 더 사랑하는 하나님, 상실의 괴로움을 갖고 있는 그에게 남편이, 아버지가 되어 주리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소망이 끝났다고 이야기 할 때 소망을 노래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한 후에는 또 다른 절망한 사람을 세우고 절망한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를 길러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인생의 동굴은 그동안 믿어왔던 편협한 신앙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여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고 그 성숙함 속에 담겨질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동굴의 경험을 통해 영적침체의 원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질문에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주님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대답을 분석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일”로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슨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짧은 문장 속에 “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엘리야는 자기 일과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충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큰일을 하건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건 혹은 실패를 하건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를 인정하고, 너의 문제를 맡기고 있는지 하는 것이야.’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열매는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을 때만이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주님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의 지식, 경험, 성격, 가치관, 교회관, 물질관, 교육관, 사역관 등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내”가 일하게 되면 “내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심히 교회에서 일하고, 가정을 섬기지만 주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는 “주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열매는 그 속에 평강과 성숙이 있으며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 내 열매는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은 죽고 맙니다.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늘 내 삶이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의지 하는지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셨겠지만, 한달정도 굉장히 깊은 영적 침체에 빠졌었습니다. 위장이 다 상할 정도로 고심했습니다. 정말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절망감도 찾아왔습니다. 제가 교회로 왔을 때는 단순히 김동호 목사님 떠나신 후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처음, 부탁하시던 장로님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저는 고 송치헌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께서 해놓으신 바탕 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무엇일까’하는 그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살 의욕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잡고 살 용기를 다시 얻는 교회,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왔을 때 사랑하는 형제자매의 손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교회, 삶의 현장에서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가고자 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모인 교회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가 가져야 할 본질이 아닙니까?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동안 교회는 살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제게는 회복과 치유의 소망이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다할지라도 구역을 통해,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통해 새로워지며, 어디든지 하나님 역사를 일으키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게는 성장의 소망이 있습니다. 전에는 고통 받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그들이 성장해서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감당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덮고 용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유산을 남겨서 남북이 대치되는 심각한 문제 앞에 우리가 초석이 되고, 장애인과 고통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소망을 비전으로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심지어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모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자기 기분이 나쁘면 교인 모두가 기분 나쁜 것처럼 말했습니다. 전부 자기 문제로 바빴습니다. 사역이라 말했지만 자기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좌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양의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에 생명의 약동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죽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 목적 아닙니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오해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혼자 고민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형준아, 나의 관심은 네가 와서 교회가 얼마나 안정되었고 무슨 일을 했고, 누가 어떻게 되었고 하는 것에 있지 않단다. 나의 관심은 네가 나를 통해서 공급받고 있는지, 나와 교제하며 내 열매를 맺어 가는지에 있어.’이번 설교 말씀을 통해 제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빌려 교회일도하고 가정일도 할 수 있지만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공급을 받지 않으면 결국 육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돌멩이를 물속에 던지면 다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큰 나무 토막에 돌멩이를 묶으면 물위에 뜹니다. 원래 우리 속성은 물위에 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을 만들어 낼 속성이 아닙니다. 화려해보여도 결국 나의 승리는 다른 사람의 패배요 나의 유익은 다른 사람의 비참함이요 나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좌절로 열매 맺습니다. 그런 우리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접붙임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이 주님과 더불어 기적의 삶, 생명의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날 때 무기력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미를 찾지 못하면 육에 심취하게 됩니다. 고집이 나오게 되고 자기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주님과 교제하며 자기 삶을 늘 흘려보냅니다. 주님의 보혈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늘 살피면서 오늘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네가 낙심하는 것 보니 내 이름만 빌리고 네 일을 했구나.”, “네가 정말 나를 의지했다면, 결과는 내게 맡기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순종하며 기뻐할 텐데.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자의 특징인데, 낙심했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뜻이구나. 네 힘으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가 낙심한 것 아니겠니?” 다시 한번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동굴을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서 데오도르 에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생의 동굴을 통해서 엘리야가 교만의 희생이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교만은 성공과 성취 뒤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습니다. 노아는 홍수 뒤에 자기 의지를 나타내었고 술 취하여 자녀를 저주했습니다. 롯은 자기 의지를 가졌을 때 세속적으로 변화되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잊어버렸을 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힘으로 되는 줄 알았을 때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고백한 줄 알았을 때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동굴의 고통을 통해서 엘리야가 실수하지 않도록 하고자 의도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업과 성취를 위한 자리가 아닌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를 더 사모하고 찾아 야겠다는 각성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에 변화가 없습니까? 말씀을 들어도 가슴속에 약동함이 없나요? 기도하기가 싫어집니까? 말씀 보는 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적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때가 끼어있어 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내 속에 영혼을 향한 열정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영적 침체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회복하십시오.  회복하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무기력하고 의미 없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인지 아니면 나를 나타내는 자리인지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소망의 메시지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동굴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입니다. ‘내 한계는 나를 의지한데서 오는 것이었구나. 전능하신 주님을 붙드는 데서 나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그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낙심한 베드로를 찾아 갔을 때 하신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수고 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연상시켜  주셨나요?  처음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도 베드로는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경험상, 내 지식상 불가능한데 말씀에 의지하여 내리리다. 말씀에 의지했을 때 가득 잡혔습니다. 마지막으로 낙심한 베드로를 찾아간 주님은 첫 부름을 회상케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의 능력이 네게 있었느냐? 네가 내 말에 순종하고 그물을 깊은 데로 오른편에 던졌을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느냐 ? 너의 실패는 너의 실수가 아니라 나를 잃어버리고 내 말을 순종하지 않은데서 온 것이다.’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셨습니다.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와 떡을 먹이시면서 무엇을 깨닫게 하셨을까요? 광야의 오병이어를 기억나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다고 생각이나 했느냐?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 때 너희가 가진 것을 내게 가지고 와서 축사할 때 오병이어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지 않았느냐? 너의 능력이었느냐? 아니면 나와 함께 했던 너희들의 삶 속에 그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냐?’ 분명히 분별하라고 베드로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우리 자신의 힘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힘이었습니까? 우리 자녀들 내 힘으로 길렀습니까? 오늘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내 힘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까? 새로운 회복을 원하십니까? 내 자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인지 우리는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로 메시지를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바깥세상을 본 사람이 지하 동굴에 다시 내려가겠는가? 내려가지 않을 걸세. 그가 만일 내려가서 친구들에게 실제 하는 세상이 저기 있다고 말해보겠지만 죄수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밖에 나갔다오더니 눈을 버려왔군. 밖에는 절대 나가면 안 될 걸세.’하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좌절하지 않을 걸세. 그것은 밖에 실제 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일세. 그리고 말이야. 영계를 다녀왔거나 봤던 사람들은 밖의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산다네. (여기서 영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말합니다.) 새로운 실제를 본 사람은 이 땅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네. 실제 동굴 밖의 아름다운 세계를 사모하기에 그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간다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이 우리 삶의 종착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은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주님께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시며 품에 안으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소망입니다. 우리의 실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서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보았기에 아직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삶, 증인된 삶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엘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에게 동굴의 경험은 고난과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진정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이었습니다. 그 동굴은 엘리야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하나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엘리야가 성숙하고, 성숙한 그 모습에 맡기시기를 원하는 진짜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삶이 영적으로 침체되어가는 이유를 엘리야의 동굴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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