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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의미를 찾아서 (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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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아서
(전 1:2∼11)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등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지금 살고 있는 순간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모두 덧없음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붙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고,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속이 텅 비었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은 바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소설가인 알버트 까뮈는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죽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로부터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야말로 가장 긴급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심리학자 C. G Jung은 노이로제나 신경증 증세로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의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어떤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자신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는 순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도, 현재의 행복한 삶도, 미래에 대한 가슴 부푼 기대도 모두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또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도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물론 내가 가진 모든 소유 역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한 순간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후,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경 전도서의 서론에서 전도자는 전도서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듯이 이렇게 처절하게 고백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같은 구절을 NIV 영어 성경에서 보니까 "Meaningless! Meaningless!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다시 말하면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 곧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단 말인가? 세대가 바뀌어도 세상은 그대로다. 해도, 바람도, 강물도, 바다도, 아니 세상 모든 만물들이 반복되는 삶에 지쳐있다. 세상에는 새 것이라고는 없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전도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까 지금까지 자신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온갖 세상의 쾌락을 모두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속 반복되고 되풀이될 뿐이며, 도무지 새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살아가는 일은 슬픔과 근심뿐이며,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했습니다.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해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으며, 모든 수고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부귀와 영화도 끝내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꿈조차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도자는 어느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의 위기를 만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우리가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위기를 그의 삶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주중에 삶의 의미라는 주제와 관련된 아주 유익한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Irving D. Yalom 쓴「Existential Psychotherapy」책 중에 실려있는 'Meaninglessness'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주는 일들을 몇 가지 적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일들 중에서 첫 번째는 이타주의(Altruism)입니다.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최고의 덕으로 꼽히는 남들을 돕는 자선에 참여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삶의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이유를 위한 헌신(Dedication to a cause)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족, 국가, 정치, 종교, 사상, 과학적 모험 등등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창조성(Creativity)입니다. 창조적인 노력에 뛰어드는 것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이 32세에 귀머거리가 되는 절망을 겪으면서 "오직 예술만이 내 삶의 끝에서 나를 되돌아오게 만든다. 아! 내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모든 일들을 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일은 불가능한 것 같구나. 그래서 난 이 불행한 삶을 끌고 간다."라고 쓴 것은 창조에 대한 욕구가 그를 자살에서 구하고 한 가닥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네 번째는 쾌락주의 해결책(Hedonistic Solution)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부정적인 의미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에 맞추며, 그 안에서 삶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들을 찾는 것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호가 인상적입니다. "삶은 선물이니 그것을 취하라, 그 포장을 풀어라, 감사하라, 사용하라, 즐겨라."

다섯 번째는 자아 실현(Self-Actualization)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수고하는 일이 삶의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흥미를 초월하는 일에 기본적인 열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자기 초월과 삶의 주기(Self-Transcendence and Life Cycle)입니다. 사람의 인생에는 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자기를 초월한 삶 즉 타자 지향적인 삶으로 점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전도서의 저자인 전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했을까요? 전도자는 우리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도자는 전도서의 마지막 장인 12:13∼14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다른 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전도자는 비록 자신이 지금까지 화려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 삶에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조금 애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삶에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에 우리 역시 충분히 동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추상적입니다. 무엇인가 조금 더 구체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저는 앞에서 Yalom 의 글을 소개했습니다. Yalom 은 삶의 의미에 관한 연구를 마치면서 이렇게 그의 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긍정적인 삶의 의미는 깊은 종교적 믿음, 자기 초월적인 가치관, 어떤 그룹에의 소속, 어떤 일에의 헌신, 뚜렷한 삶의 목적들과 관련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어떻습니까?

첫 번째로 Yalom 은 깊은 종교적 믿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들에게 존재해야할 의미를 가지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보이는 세상 만물을 지으신 것만이 아니라 그의 지으신 모든 만물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의미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그 누구도 또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도자가 깨달았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더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은 의미와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Yalom 은 자기 초월적 가치관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초월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흥미와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초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봉사와 섬김의 삶은 그러한 타자 지향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초월할 수 있을 때에만이 삶은 의미들로 반짝이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Yalom 은 어떤 그룹에의 소속을 이야기했습니다. 소속감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 중의 하나이며, 소속을 통해서 인간은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듯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 한 지체로 소속되었다는 것, 아니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대단히 의미 있게 만듭니다. 우리를 그와 같은 공동체에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가고, 그 공동체에 속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그 목적을 발견하고, 실현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어떤 일에의 헌신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헌신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날마다 우리가 더 깊은 헌신으로 나아오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대단히 의미 있고 또 역동적으로 만듭니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신다."라고 무디는 말했습니다. 신앙 생활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헌신할 자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싶습니까? 내가 헌신할 수 있는 일과 자리를 찾으십시오.

끝으로 Yalom 은 뚜렷한 삶의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삶의 목적이 뚜렷했던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13∼14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렇게 삶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허무와 무의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삶의 목적은 우리 삶에 진지한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혹자는 전도서를 '유신론적 허무주의'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의미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의미의 중요성을 알 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허무와 무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허무와 무의미를 통해서 결국 삶의 종말을 만나지만, 우리는 허무와 무의미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만이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의 삶은 의미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초월한 이타적인 삶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어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자라 가는 삶이,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더 깊은 헌신으로 나아가는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뚜렷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 진정으로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 모두 우리의 삶이 의미로 가득한 삶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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