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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 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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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젊은이 설교 홈 myhome.naver.com/chapelainkhj 천안외대 김홍진 목사
창세기 4 : 1-12

  2차 대전 때 끔찍한 최악의 사건 중에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인 사건입니다. 얼마나 죽였죠? "많이?"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사람 육백만명을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였죠? "아프게?" 유대사람을 하나씩 둘씩 끌어다가 개스실에 넣어서 죽였습니다. 서울 인구 절반이 되는 숫자입니다. 왜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그렇게 죽였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정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행상인이었답니다. 물건을 해다가 돌아다니면서 팝니다. 다 팔 때까지 집에 못 돌아옵니다.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리고 그리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래 집을 늘 비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고독해서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이웃 남자들하고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중에도 돈 많고 세력이 있는 유대사람, 전형적인 돈 많은 유대사람 남자와 어머니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그는 보고  자랍니다.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하소연하고 말렸지만 어머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두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는 유대사람이고 하나는 여자를 미워합니다. 그의 미움은 증오로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육백만 유대인을 죽이는  사람이 됐습니다. 평생 결혼을 못합니다. 주변에 수없이 여자가 많지만 여자들을 미워하고, 끝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히틀러의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는 비극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영국의 여류작가 G. 엘리오드는  인간은 증오의 감옥에서 갇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 속에서 살인을 합니다. 이 증오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은 터주대감입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 증오하는 것, 이것은 살인을 초래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미워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이 자라 살인으로 간 사건이 나옵니다. 미워함으로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형제가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이야기입니다. 2장은 인간 창조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간 타락 이후에 나온 이야기가 오늘 제4장 증오와 살인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의 표상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하고 살인 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미워하는 사람, 심지어 증오하는 사람, 아니 이미 마음 속에서는 살인한 자가 있습니까? 오늘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증오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증오의 감옥에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누가 누구를 미워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들을 낳았습니다. 큰아들은 가인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벨입니다. 큰아들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작은 아들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이들이 성장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큰아들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작은 아들 아벨의 제물만 열납했습니다. 이 때 5절에 보면, 가인이 분하여 어찌할 줄 모릅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시기와 미움과 증오가 일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그들의 들에 있을 때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누가 누구를 미워했습니까?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합니다. 증오합니다. 살인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다. 같은 어머니 배속에서 10개월 동안 준비하고 나온 자들입니다.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함께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미워하고 증오하고 살인을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관계입니다. 먼 친척도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있는 형제관계입니다.

  청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증오의 관계는 먼 곳에 있는 사람끼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관계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에게 일어납니다. 나와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한 사람끼리 증오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기에 증오의 감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 사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증오의 관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옆 사람을 보세요. 어때요? 나를 미워하는 사람입니까? 얼굴을 보세요. 험악해요. 살인자요? 조심하십시오. 증오의 대상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 더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장소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끼리 증오의 관계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늘 함께 살아왔습니다. 함께 지냈습니다. 같은 방을 썼을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며 살았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삶을 같이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속에서도 증오는 싹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내 삶을 진단해보십시오. 증오의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는 바로 당신 주위에 있을 것입니다. 아주 가까이에서 당신을 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위에 관계를 가지는 사람을 주신 것은 미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친밀한 교제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내 주위에 사람을 주신 것은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증오의 대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삶 가까이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제 나의 사랑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나의 섬김의 대상임을 기억하십시오. 함께 격려하며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할 존재가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 되겠습니까? 이제 그에게 따뜻한 마음을 내어 주십시오. 사랑의 마음으로 섬김을 시작해보십시오.

  둘째, 무엇 때문에 증오하게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미움이 시작되었을까요? 형 가인도 땅의 소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동생 아벨도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은 형의 것은 받고 동생 것은 받지 않았습니다. 왜 동생 것만 받았는지는 정확한 대답이 없습니다. 단지 히브리서에 보면 동생은 믿음으로 들였다는 내용뿐입니다. 이 때 형이 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 때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질투입니다. 시기입니다. 자기의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고 동생의 것만 받았습니다. 가인의 마음에 질투가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좌절 될 때 반작용이 일어납니다. 이 때 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남이 잘 될 때 배가 아픈 것입니다. 질투는 대상이 있습니다. 질투의 대상에 대해서 미움이 일어납니다. 질투는 바로 욕심에서 일어납니다.

  질투는 믿음 생활을 잘 해도 일어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언제 증오가 싹트기 시작했습니까? 제사를 드린 후에 그랬습니다. 거룩한 일을 하고서도 질투가 일어나고 증오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욕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욕심이 거룩한 욕심이든 인간적인 욕심이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싶은 거룩한 욕심도 질투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질투는 인간의 욕심에서 일어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경쟁의 관계는 증오의 관계로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경쟁의 사회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회입니다. 그러기에 경쟁은 전쟁이 되고 전쟁은 승패를 겨뤄야합니다. 이 때 질투와 미움과 증오는 시작됩니다. 나보다 잘나면 그 사람을 끌어 내려서 내가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경쟁입니다. 경쟁은 욕심에서 시작합니다. 욕심은 인간을 질투의 굴로 몰아넣습니다. 질투와 시기는 증오의 감옥으로 사람을 몰아 넣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에는 다섯 가지의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섯 가지의 적이 있어서 마음의 평안을 앗아간다는 말입니다. 첫째의 적은 탐욕입니다. 즉 소유욕입니다. 탐욕이 마음의 평안을 앗아갑니다. 둘째는 야욕이다. 이는 성취욕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 되고 말겠다' '그것을 꼭 가지고야 말겠다' 지나친 욕심이 마음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셋째는 질투입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남이 잘살아서 불만이 많습니다. 넷째는 분노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몰라서 후회가 많습니다. 분노에 사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다섯째는 교만입니다. 언제나 허황된 교만에 삽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합쳐 보십시오. 적은 탐욕이 일어납니다. 야욕이 일어납니다. 질투가 생깁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교만하게 됩니다. 마치 가인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증오의 감옥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욕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욕심에 의해서 미움의 싹은 시작됩니다. 그 욕심에 의해서 질투가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고 증오의 감옥에 빠져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대로는 살수 없지 않습니까? 미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유명한 로만 피얼 목사님이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 제안했습니다. 첫째로 그에게 장점이 보이거든 그것을 노트에다 기록해두어라. 장점을 자꾸 기록하라. 단점은 기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라.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내 욕심을 제어하는 길입니다. 셋째로 기회가 있는 대로 열심히 도와주어라.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나를 포기하는 길입니다. 넷째로 그가 없는 곳에서 그에 대한 칭찬을 하라. 중요합니다. 다섯째로 직접 만날 일이 있거든 웃는 얼굴로 최대한 친절을 베풀라.

  이렇게 하면 미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사랑 받게 될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은 남을 미워하면서 지옥 같은 마음으로 한 평생 사는 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쉽습니다. 미움과 증오의 감옥이 오늘 해방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미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미워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합니까? 본문을 보세요. 가인이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분노했다고 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가 삭막한 관계로 빠집니다. "형님 · 아우" 했던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랑했던 관계는 갈등의 관계가 됩니다. 협력했던 관계는 안목의 관계가 됩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서로 안목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분하다는 것은 관계가 얽혔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서먹서먹합니다. 질투와 시기로 복수의 관계가 됩니다. 미움은 살인으로 빠집니다.

  7절에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죄의 소원이 너에게 있도다.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결국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미워함이 살인으로 번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함이 살인으로 끝났습니다. 비극입니다. 증오의 결과는 살인입니다. 11절에 가인은 땅에서 저주받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거슬리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경쟁의 대상이 있습니다. 나도 경쟁의 대상이 되어 질투의 화신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타락한 인간 사회는 질투와 시기와 미움과 갈등과 증오의 삶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년 여러분, 여러분도 타락한 이 사회에서 그대로 노출되어 자신을 방관하시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함께 미워하고 질투하고 증오하고 살인하며 인생을 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현실을 극복하며 살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이야기를 제안하며 말씀을 정리합니다.

  맺는 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거절당하고 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에서 이 집에 낫 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 그랬습니다. 아들은 이 때에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 준다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라고 말하며 아들에게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이 세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범사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증오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나에게 이웃을 준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에게 친구를 준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를 섬기기 위한 기회입니다. 사랑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나의 이웃은 나의 형제는 나의 가족은 나의 동료는 사랑하고 사랑 받고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움을 극복하는 길이 쉽던가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이 짊어진 십자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9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미움과 질투와 시기와 증오를 극복하기 쉬우면 이런 말씀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또 권고하십니다.

  어느 소년이 어머니와 다투고 화가 나서 산에 올라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당신이 미워! 나는 당신이 미워!" 그러나 저쪽에서 똑같이 "나는 당신이 미워!" 하고 소리가 되돌아옵니다. 그 소년은 너무 놀라 집에 와 어머니에게 이야기합니다. "응 그것은 메아리라는 것인데 네가 말한 대로 다시 되돌아온단다 이번에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해봐라" 그렇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메아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주위 사람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증오의 감옥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가 아니면 내가 해결의 고리를 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는 없을까요? 내가 먼저 사랑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축복의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혹 나를 미워해도 "나만은 그렇지 않으리" 다짐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를 축복하는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관계에 회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과 결단

"내가 먼저 혼내 밀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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