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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들이 되자! /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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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되자! / 누가복음 15:20-24 / 2003. 9. 21.
설교 : 장빈 목사

성경을 읽다 보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어리석음이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여러 경우, 아버지의 넉넉함과 아들의 옹졸함이 부딪칩니다. 이곳저곳에서 아버지의 관용과 아들의 이기심이 서로 대립합니다. 그런데요, 이런 충돌과 대립을 보도하면서 성경은 끊임없이 아들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아들의 대책 없는 욕심을 고발합니다. 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그렇습니다. 항상 아버지는 올바른 관계를 요구하는데 아들은 관계 보다 돈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장자의 자리를 지켜달라고 요구하는데 아들은 팥죽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의 유일한 바람은 아들이 되어 달라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들의 자리를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본분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도 좋다는 겁니다. 까짓 것 돈이 들어오는 마당에 아버지와의 관계 따위가 무에 그리 중요하냐는 겁니다. 아들의 자리 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어리석은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내용은 언제 들어도 감동이 되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이 바로 어리석은 아들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먼저 조심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 보고 가실까요? / 15:11-12 / (읽기) / 여기 보니 둘째 아들 녀석도 내 유산을 미리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런데요 그 다음 대목을 보니 아버지가 순순히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달라고 떼를 쓰면 주긴 주십니다. 그것 안 주시면 죽어 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렇게 졸다대는데 어떻게 안 주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조건 받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받긴 받되 잘 받아야 합니다. 받긴 받되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야 합니다. 돈이 좋다고 무턱대고 받아 놓으면 오히려 그것이 화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무언가 잘못 받으면 오히려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많이 달라고 기도할 일이 아닙니다. 감당할 만큼 주시옵소서! 필요한 만큼 주시옵소서! 그것이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둘째 아들이 그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아낸 이 녀석, 돈만 주시면 더 좋은 아들 되겠다고 약속했던 이 녀석, 배은망덕한 녀석, 이 나쁜 녀석에 대하여 누가 선생님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 15:13-14 / (읽기) /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13절에 보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먼 나라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제 필요 없다는 겁니다. 돈이 있는데 아버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잘난 아들 녀석이 먼 나라에 가서 어떻게 됩니까?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였다고 합니다. 아니, 기왕에 피 같은 돈 가지고 갔으면 제대로 살기나 할 것이지, 겨우 도망가서 하는 일이 허랑하고 방탕 하고 재산을 탕진하는 일이라니, 그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억장이 무너집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식에게 너무 일찍, 너무 많은 것을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아들에게 너무 많은 돈은 그 아들의 인생에 화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다 줄 때가 오는 법, 그 때 아버지의 것 아들에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단, 유산을 물려주실 때 아들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물려주시고, 나머지는 하늘 아버지께 바치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늘 아버지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이 땅의 아들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자, 다시 성경 말씀으로 돌아옵시다. 14절을 보니, 결국 이 아들이 궁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궁핍이 무엇입니까? 궁핍(窮乏)이란 다할 궁(窮)자에 가난할 핍(乏)자를 씁니다. 나에게 있던 모든 것이 다 바닥이 나서 가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아들은 자기 분깃을 미리 챙겨 독립하면 잘 살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따위는 내 인생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돈이면 세상을 다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돈이 아들의 자리 보다 더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배신한 이 아들, 그 많던 돈까지 다 날려버리고, 이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인생에서 사라진 것은 돈 만이 아니었습니다. 돈 때문에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고향도 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자매도 배신했습니다. 돈 빼고 다른 모든 것은 다 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돈을 따라간 인생, 돈 뿐만 아니라, 돈 보다 더 귀한 것들까지 다 몰수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배신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에도 이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은 아들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돈 때문에 부모와 형제자매를 배신합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사랑을 배신합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다 내버릴 수 있다는 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돈 때문에 그랬습니다. 제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요, 돈이 거짓말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말도 아닙니다. 자기가 먼저 돈에 혹해서 돈을 따라갔지 언제 아버지가 너 돈 가지고 나가 살라고 했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살다가 돈과 아버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거든, 주저하지 마시고 아버지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돈을 먼저 사랑한 사람이 성공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돈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은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이 말씀 믿으시고, 먼저 아버지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아들과 딸의 자리를 끝까지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15절에 보니, 궁핍에 처한 아들, 하는 수 없이 돼지 치는 머슴이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아들에서 돼지와 함께 사는 머슴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추락하기 시작한 그의 인생은 거기서 멈추질 않습니다. 저 못난 아들의 신세가 참으로 딱한데요, 16절을 한번 읽어볼까요? / 15:16 / (읽기) / 정말 한심합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땐 돼지 똥은커녕 그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던 귀한 도련님이었는데, 이젠 돼지가 먹는 여물조차 주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우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살 때가 행복한 때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아버지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얻어먹는 아들딸 여러분, 끼니마다 밥 한 술 떠서 입에 넣으면서 감사의 마음을 아로새기시기 바랍니다. 반찬 한 입 넣고 꼭꼭 씹어 맛있게 먹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아로새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 보십시오. 누구 한 사람, 맨 입에 밥 먹여 주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끼니마다 주시는 밥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얻어먹을 자격이 있어 주시는 것 아닙니다. 오직 부모님의 사랑으로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반찬 투정을 합니까? 그저 주시는 대로 넙죽 넙죽 잘 받아먹고, 다 먹고 나면 꼭 큰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참, 설거지도 좀 하시고 말입니다. 여러분! 아버지 집에서 밥 얻어먹으며 살 때가 행복한 때인 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말씀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이 불쌍한 아들 좀 보십시오. 오죽했으면 사람이 돼지 여물이라도 먹겠다고 하겠습니까? “돼지가 먹는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거라도 좀 먹게 해 주십시오!”그런데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저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돼지입니다!”아들이 스스로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 인생이 좋습니까? 머슴 인생이 좋습니까? 사람 먹는 음식을 먹고 사는 인생이 좋습니까? 돼지 사료를 먹고 사는 인생이 좋습니까? 오늘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행복하게 살래? 이 땅의 머슴으로 돼지 치며 살래?”

여러분! 절대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배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배신한 자녀, 당장 불쌍한 인생이 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특히 돈 때문에 아버지를 내버린 인생, 돼지만도 못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 간곡하게 하시는 말씀, “넌 내 아들이야! 아들의 자리를 지켜 줘!”입니다.

<<아들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17절 말씀을 보니, 궁핍의 자리에 처했을 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나옵니다. 궁핍해진 내 인생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비법입니다. 짐승의 자리에서 다시 아들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복된 비법입니다. 우선 17절의 첫 번째 대목에 표시하시지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아하, 답은 간단합니다. 스스로 돌이키면 됩니다. 스스로 돌이키기기만 하면 다시 받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돼지우리에서 저 못난 아들이 했던 일, 그것은 스스로 돌이키는 일이었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이 아들은 죽을 고비에서 스스로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궁핍의 자리에서 늦긴 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떻게 하다가 내 인생이 이토록 처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는가? 돌이켜 본 것입니다.

여러분! 생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사람,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잃었던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궁핍에 처하여 죽도록 고생은 하면서도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는 인생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궁핍에 처하여 고생하는 것보다 더 안 되고 불쌍한 일은 돌이킬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 결국 궁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돼지우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에이 기왕에 버린 몸, 이렇게 살다 가지 뭐!”그러면서 막 삽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돌이키는 대신 스스로 포기한 인생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궁핍에 처하게 될 때에,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통과 고난은 스스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교육과정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비천한 짐승 같은 삶에서 존귀한 아들의 삶으로 스스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교육과정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시지요.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그 다음 어떤 글자가 나옵니까? “내 아버지!” 지금 이 아들이 무어라 고백합니까? 내 아버지! 세상에 이제야 내 아버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돼지우리에 곤두박질친 인생이 되어서야 스스로 돌이켜 얻게 된 첫 번째 깨달음, 그것은 나에게는 아직도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다. 내 아버지!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겐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나에겐 언제든지 돌아갈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내가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고, 스스로 돌이켜 빌고 또 빌기만 하면,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 못난 것이 세상에서 방황하다 죽게 되어서야 겨우 돌아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용서해 주시고 품어 주시는 나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토록 좋으신 아버지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귀하고 귀한 나의 아버지 곁을 절대로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인생, 복 받은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맙시다.>>

그런데 17절을 보니,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에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데요, 둘은 이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입니다.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없는 것이 없도록 그렇게 풍족한데, 아버지가 풍족하시니 그 종들까지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데, 정작 아들은 여기서 굶어 죽다니, 정말 한심하고 한심해서, 못난 자신이 너무나 미워지는 순간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아버지한테 제대로 인사라도 하고 나올 것을, 아니,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미쳤지! 미쳤어!”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이 아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너머로 먼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런데 밤하늘의 둥근 달님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비칩니다. 흠칫 놀라는 아들을 향해 달 속의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향해 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 돼지우리 바닥을 뒹굴며 더욱 구슬프게 흐느껴 웁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뭘 하나! 내 아버지가 부자시면 뭘 하나!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참으로 한심 하도다. 부자 아버지를 가진 아들이 여기서 이렇게 굶어 죽다니, 아니, 너는 죽어 싸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불쌍한지고...”

그렇게 한참을 울부짖던 이 아들, 어느 순간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내용이 18절과 19절에 나옵니다. / 15:18-19 / (읽기) / 어떤 깨달음입니까? 여기서 이렇게 궁상을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는 깨달음입니다.

여러분! 죄의 자리에서는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허랑 방탕의 자리에서는 하루 빨리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배신의 자리, 교만의 자리, 타락의 자리, 생명을 죽이는 자리에선 어서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돼지우리에선 어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아버지가 받아 주실지 염려가 된다고요? 아니요, 그래도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 계속 있어도 굶어 죽을 목숨입니다. 어차피 죽을 바엔 아버지의 집에서 죽는 쪽이 천번 만번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어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꼭 돼지우리까지 가야만 죄를 짓는 것 아닙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두고 엉뚱한 자리에 가 있는 사람, 어서 돌아와야 합니다. 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동광 가족 여러분! 특별히 새벽제단을 지키시는 120문도 여러분! 세상으로 나가셨다가 기도하는 시간엔 기도하는 자리로 꼭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이 아무리 바빠도 예배하는 시간엔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 돈을 버는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 만나는 시간엔 주님 만나러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야 할 때에, 꼬박 꼬박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인생, 이미 복 받은 인생입니다. 이렇게 주의 전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잘 한 성도, 마침내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무사히 돌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런데요, 18절을 보니, 이 아들이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나는 죄인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처음 집을 나올 때 이 녀석은 너무도 당당했었습니다. 그러나 다 죽게 되자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가져온 피 같은 돈을 다 탕진하고, 아들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다 포기하고 돼지우리에 누운 후에야 깨달은 놀라운 사실, 그것은 “나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놀라운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19절을 보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름 자체를 감당치 못하겠다는 겁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서면 가장 솔직해 지는 모양입니다. 지금 이 아들의 모습을 좀 보시지요. 아버지한테 가서 내 몫의 유산을 달라고 소리 지르던 그 오만방자함은 찾아 볼 길이 없습니다. 그 대신 하는 말, 하늘과 아버지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

그랬습니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아들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았었습니다. 젊음과 패기와 거기에 돈 까지 있으니 한 마디로 보이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도 안중에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도 안중에 없습니다. 하늘 아래 무서운 상대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만방자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 결국 오만방자한 그 인생은 송두리째 돼지우리에 쳐 박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어라 고백합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아들의 눈에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들의 눈에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만 쳐다 볼 때는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합니다. 내가 세상의 전부요, 내가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소용없고, 형제자매도 눈에 안 보이고, 친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늘도 소용없습니다. 그저 나만 찾습니다. 나만 위합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그러다 돼지우리에 쳐 박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눈을 들어 저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없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땅만 쳐다보기에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늘 거기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들어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없어 아들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버리고 세속으로 도망갔기에 아들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거기 계시며, 또한 늘 나와 동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 이 아들, 깨달음을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20절을 보실까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그랬습니다. 이 아들은 깨달음을 얻은 즉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집엔 아들의 방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엔 아들의 먹을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엔 아들이 입을 옷이 있습니다. 일단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살 길이 열립니다. 일단 돌아오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에 너무 많이 계산하거나 분석하지 말라는 점입니다. 지금 이 아들이 무슨 계산을 합니까? “이제 난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인이다, 아들이 아니다, 그러니 가서 아버지한테 품꾼으로 써 달라고 애원하자! 그러면 혹 받아 주시겠지!”그랬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분석하고 계산한 결과, 이제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품꾼의 자리로라도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특하고 당연한 분석입니다. 참으로 양심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대상으로 아들이 너무 많이 계산하고 분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냥 돌아오면 됩니다. 너무 많이 계산하는 것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분석하고 계산하느라 아버지께 돌아갈 기회를 자꾸 놓치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돌아온 후를 계산하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어서 돌아오는 일입니다.

이 아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아버지 앞에 돌아온 즉시, 그의 계산과 그의 분석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어떻게 틀렸습니까? 20절 말씀을 보니,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아직도 도착하려면 먼 거리인데 아버지가 달려 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시던 아버지, 거지꼴을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버선발로 뛰어나가 온 몸으로 맞이해 주신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돌아와 보니 아들의 분석과 계산이 전혀 들어맞질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의 계산과 그 차원이 다른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며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이 사랑 간직하시고 행복하고 풍성한 가을되시기를 기원하며, 이 말씀 선물로 드립니다. / 15:22-24 / (읽기) / 여러분! 일단 돌아오기만 하면 환영해 주시고, 다시 품어 주시고, 가장 귀한 것으로 대접해 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아들이 되는 일입니다. 이 가을, 우리 다시 아들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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