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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양의 비유 /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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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잃은 양의 비유
성경말씀 : 누가복음 15:1-7

이 비유에 대한 소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어느 목자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초장에서 양떼를 먹이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양 떼를 평지에 있는 우리로 인도해서 우리 입구에 막대기를 걸쳐놓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수를 세면서 우리 속으로 들여놓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한 마리가 부족했습니다. 다시 세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밖에 없습니다. 한 마리씩 이름을 불러서 확인해 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목자들이 자기들의 양들에게 각기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것은 그 양이 갖고 있는 외형적인 특징에 근거한 것이므로 별명과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털에 얼룩 반점이 있으면 ‘얼룩이’라고 하고, 눈이 짝짝이면 ‘짝눈이’라고 부르는 식입니다. 양도 제 이름을 알기 때문에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음메̃〜”하고 대답합니다.

잃어버린 양이 어떤 녀석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낸 목자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다른 목자에게 맡기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하루 종일 양떼를 먹이느라 피곤하지만 잠시라도 머뭇거릴 수가 없습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찾아야 하니까요. 늦으면 혹시라도 맹수에게 잡혀 먹힐지도, 아니면 어느 벼랑에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목자는 산과 들판을 두루 다니면서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벼랑에도 가서 살펴봅니다.

드디어 목자는 위험한 절벽에 서서 겁을 먹고 떨고 있는 양을 발견합니다. 목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납니다. 살며시 다가가서 양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목자는 너무나 기뻐서 벗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사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은 누가복음 15장 서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아오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로서 도덕적으로 불량하거나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세리들도 마찬가지로 죄인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이같은 죄인들과는 사귀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같은 장소에 함께 서 있는 것도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그들이 초대하는 식탁에 함께 앉으셔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그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 종교가들이 볼 때에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요 장로들의 유전을 고의로 어기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하시는 태도는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그리고 길 잃은 양은 죄악 길에서 방황하는 죄인들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구원의 첫 번째 단계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을 고침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병든 것을 알아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죄인들과 세리들은 솔직하게 자기들의 병든 영적 실상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의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다는 자기 자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추악한 죄인들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겸손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상, 이 땅에 태어난 사람치고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죄인인데 이는 아담에게서 죄로 오염된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은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거나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근원적인 원인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

다윗 왕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그런데 그와 같이 신실한 다윗도 범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년이 되어 왕궁에서 편하게 지낼 무렵에 그만 밧세바의 일로 범죄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다윗에게는 왕비를 비롯해서 여러 명의 후비가 있었고 또 원한다면 얼마든지 후궁을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일선에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대하면서 보통 사람도 아니고 다윗과 같은 성군이 어떻게 그 같은 비열하고 무서운 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범죄를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어쩌다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했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수양을 해도 죄인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잃어버린바 된 존재입니다.


타락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또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계를 다스릴 청지기로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사탄의 하수인인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을 때, 하와는 그 말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그 나무실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보이는지라, 그만 그 실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 돌릴 목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한 생각을 품은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 그토록 즐거웠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무서운 결과를 대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담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쫓아내지 않으셔도 죄인은 제 발로 하나님 곁을 떠나갑니다. 그뿐 아니라, 죄인은 제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죄짓고 떨고 있는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은 언제까지나 잃어버린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무능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

죄인은 스스로의 자각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신 대로, 죄인은 영적 소경이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과 광대한 대양과 산악들, 지구상의 온갖 동식물들은 조물주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주 삼라만상을 보면서 마땅히 하나님의 신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범죄한 인간들은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은 제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고, 로마서 8장 3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느 인생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지니셨으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길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을 위한 선한 목자이십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출현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정치적인 영웅도 있고, 철학가들도 있고, 종교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들을 위한 참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음에게 삼킨바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들이 죽고 살지 못한 것은 그들 역시 죄인에 불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망을 정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7-8)고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는 인류의 조상 아담을 범죄케 만든 마귀를 멸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적이 양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다가오듯이, 마귀는 인간들의 영혼을 노략질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 하신대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을 대속하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인생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 길 잃고 헤매는 죄인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죄의 무거운 짐, 인생의 무거운 짐진 자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올 때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계신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시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 들이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망설이지 말고 고집 부리지 말고 즉시로 회개하고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품에 우리를 안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둘째 아들의 타락과 회심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 보면, 어느 부잣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졸라서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가지고 먼 나라도 떠났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감시에서 벗어나자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먼 이방 도시에서 이 아들은 자유를 만끽하고 허랑방탕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가진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구 하나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이 아들은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갔는데 주인은 이 아들을 들판에 보내 돼지를 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돼지들이 먹는 쥐염열매를 나누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현기증이 났습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풍요로운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종들 뿐 아니라 하루 품 팔아서 먹고 사는 품꾼들도 양식이 넉넉한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아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를 뵐 체면이 없지만, 아버지를 만나 무조건 용서를 빌 작정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말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드디어 이 아들은 고향 집이 멀리 바라다 뵈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이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맨발로 뛰어나와서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였으나, 아버지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종들을 불러 명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큰 잔치를 베풀고 이웃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며, 둘째 아들은 타락하여 하나님 품을 떠난 인간들을 말합니다. 이 비유는 그 속에 담긴 뜻이 잃은 양의 비유와 같습니다. 앞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였고,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점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둘 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천국에서는 그 한 사람이 돌아온 것으로 인해 즐거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이 그리 귀한 존재라고 하나님께서 이같이 대우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한 일은 죄짓고 불의한 삶을 살아온 것밖에 없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를 한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목자는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는 그에게 심한 고생을 시킨 그 양을 가리켜 “나의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비록 죄짓고 불의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들이지만 당신의 양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죄인들을 향하여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같은 주님의 호소를 듣고 죄인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타락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옷 입혀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곤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불화하고서 어찌 평안하길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죄인들을 찾아오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사람은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아직 죄 가운데 방황하는 분들이 있거든, 지금 주님께서 내민 손을 거절하지 말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계속 문밖에 세워 두지 마십시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짓는 죄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한 죄도, 도적질한 죄도, 간음한 죄도, 심지어 살인한 죄도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배척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구원의 길을 봉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는 지금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마귀는 한 영혼이라도 더 미혹하여 지옥 백성으로 삼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삼키우기 전에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마지막 권면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를 이룩한 우리에게도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먼저 믿은 우리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선한 목자의 마음을 본받아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닿는 대로 불신 가족과 불신 이웃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한 두 번 전해서 듣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그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데려 오기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심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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