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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 시 5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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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57:1~11 
제목 :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우리 울산교회를 처음으로 찾아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시편의 말씀으로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시편 57편은 누가 언제 썼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말합니다. 물론 요즈음 처음 교회에 오셨다면 다윗이라는 이름이나 사울이라는 이름도 모두 낯설 것입니다. 다윗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 역사가운데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왕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또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초대 임금입니다. 처음 왕위에 오를 때는 그 자리가 겁나서 사람들의 짐 보따리 사이에 숨기까지 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이 된 후에는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권력을 잡은 다음에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특히 사울은 자기보다 더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다윗의 출현으로 그는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는 분은 그 자세한 사연을 알고 있습니다. 십년을 넘게 교회를 다녀도 성경을 일독 못하신 분은 감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감을 못 잡는 분을 위해서 설명을 잠깐 하는 것이 함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있을 때에 이웃나라 불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 때 유명한 불레셋 장수가 거인 골리앗입니다. 아침저녁 전선에 나타나서 이스라엘 하나님 이름에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이 겁나서 꼼짝하는 이스라엘 병사가 없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선에 있는 형들의 안부를 살피러 갔던 다윗이 듣습니다.

다윗, 그는 나이는 어렸지만 일찍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생명을 걸고 싸우기로 맘을 먹습니다. 그래서 칼과 단창으로 나아오는 골리앗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맞이합니다. 첫 번째 날린 물맷돌이 철갑을 두른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임금이 내건 약속대로 사울왕의 딸 공주 미갈과 결혼을 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노래하는 이스라엘 여자들 때문에 다윗은 결국 장인 사울 왕의 시기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결국은 목숨을 위해서 사울을 피해 다니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임금님 보십시오. 내 노라 하는 칼잡이 3,000명을 데리고 사위이자 장래가 촉망되는 한 청년을 죽이려고 국사를 팽개쳐두고 설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치가 사람들의 환멸을 안겨 주는 일은 결코 요즈음 새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너무 세상나라에 실망하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이 시를 노래했습니다. 마치 바다 깊은 곳에서 드렸던 요나의 기도처럼 다윗은 그 생애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본 노래입니다. 쫓기던 자가 어쩌면 굴속에서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기도를 통해서 회복되었을 때에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므로 영혼의 숨을 내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굴이었던지 그 이름은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사해 근방에는 이런 굴들이 수없이 있습니다. 낭떠러지 끝으로 난 길을 따라서 가다 보면 여기저기 굴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하여간 사울을 피하여 추종자들로 더불어 숨어 있던 굴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거기에 숨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갑자기 한 사람이 굴 입구에서 나타났습니다. 보니까 사울 왕입니다. 그것을 먼저 본 다윗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심장이 멎는 듯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필이면 내가 숨어 있는 이 굴 속으로 들어오다니! 이제 나는 끝났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태를 바로 파악했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더운 열기를 피해서 낮잠을 자러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성급하게 부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한 순간 입장이 뒤바뀐 것입니다.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 때가 사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부하들을 말리면서 다윗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면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찾지만 실상은 사울의 생명을 자신의 손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아야만 입술로 노래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감사하며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내리막길로 치닫던 인생에 반전의 기미를 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미 나는 사울을 이겼고 싸움은 끝났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라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이 시에는 분명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숨어있는 굴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적인 생각을 함으로서 가능합니다. 시편 57편의 특징은 열 한절 속에 스물두 번에 이르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원문에는) 나옵니다. 

이 시편이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을 찾는 신실한 예배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든지, 평범한 사람이든지 꼭 같이 이 진리는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불러서 예배하는 자에게는 내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면 언제든지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태풍이 여러분을 비켜지나갔든지, 스치고 지나갔든지, 아니면 혹독하게 여러분을 강타하고 지나갔습니까?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입을 열어서 부르짖기만 하면 여러분의 인생은 역전됩니다. 로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시는 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급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여러분의 인생은 상향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지금껏 내리막으로 치닫기만 했더라도 곤한 인연에서 부르짖기만 하면 여러분의 삶은 새롭게 바뀝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긴박했던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피를 말리는 추격은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집요한 추적을 당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닙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오직 긍휼만이, 각별하신 긍휼만이 그를 파멸에서부터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보여주시길 간구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이시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원문의 순서대로 읽으면 긴박감이 한층 새롭습니다. 긍휼을 간구하지만 그 간구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여 하나님을 불러 다시금 긍휼을 간구합니다. 궁색한 처지로 인해서 하나님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평안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보다 어려워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복이 있습니다. 평안해서 예배드리러 나와도 깨어 있지 못하는 것 보다는 어려워서 한마디라도 듣고 붙들어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앉아 있으면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곤경 중에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을 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1절)

이 세상에서는 쫓기는 자에게는 안전한 피난처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올바로 간구하게 만듭니다.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은 없지만 주님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는 신실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립니다. 유일한 피난처인 아버지의 품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 어찌 우리를 하나님이 외면하시겠습니까?

다윗은 지금 동굴 속에서 안전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위 틈새에서 안전을 확보한 것이 아니라 만세반석되신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고 있습니다.

봄날 암탉이 어린 병아리들을 어떻게 돌보는지 살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개나 고양이가 가까이 다가오면 바로 어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는 깃털을 세우고 공격자세를 취합니다. 감히 어떤 짐승도 덤벼들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권능의 날개아래 안전하게 몸을 숨기려고 합니다. 어쩌면 속죄소를 덮은 그룹들의 날개를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아래 감추소서.”라고 시편 17편에서도 부르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곤경과 재앙이 있습니까? 그 자체는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기쁨으로 느껴지면 문제가 있습니다. 곤경과 재앙은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날개아래 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우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풍 매미는 정말 매서웠습니다. 심하게 할퀴고  지나갔으나 그것은 지나갔습니다. 어떤 곤경도 재앙도 지나갑니다.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우리의 피난처는 주님의 날개아래 라는 것 기억하십시오. 어떤 어려움도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날개는 우리에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닥치는 재난은 시간문제이지만 우리의 안전은 영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항상 좋은 날씨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궂은 날씨도 만나고 태풍도 만납니다. 하지만 날씨가 항상 궂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할 때, 지나가는 환난이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매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기도 하지만 어미닭의 날개 아래에 숨은 병아리들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환경과 힘든 인간관계로 인해서 괴로워합니까? 이생에서 일시적으로 당하는 고통과 곤경은 내세에서의 영원한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에 사라지는 구름과 같습니다. 그분께 의지하고 맡기면 하나님의 때에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환난 때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사모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비바람에 젖지도 않고 떨지도 않습니다. 무서운 태풍 속에도 안전한 곳입니다.

다급할 때 기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주님의 날개 그늘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부르짖을 수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다. 거기서 기도하면 평안을 얻습니다. 불안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어떻게 해결되리라는 조그마한 믿음을 붙잡게 됩니다.

그 날개 그늘아래 들어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불안과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민한 마음이 평안을 얻고 여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거기가 바로 하나님의 날개 그늘인 것을 믿으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십시오. 일단 어려움의 고비가 넘어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기 시작한 증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숨어있는 굴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면 생명을 찾는 사람들에게 피하여 숨은 굴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생명을 낚아채려고 달려들지만 거기도 안전한 피난처,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우리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곳에 좌정하신 분이십니다. 거기서 만물을 보시고 만사를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 57:2).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생각하십시오. 물론 기도할 거리가 있어서 기도하러 나왔지만 기도할 제목만 붙들고 있지 말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할 때에 여러분은 은혜를 누립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자주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사람이 누리는 최고의 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가장 기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특권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애에서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도움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결코 중간에 포기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돕기로 시작하셨다고 하면 여러분의 생애에 끝날 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도우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시작하신 모든 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을 맡으시면 반드시 물러서지 아니하십니다. 그 분은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백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우리 속에 선한일 시작하시기만 하셨으면 그분은 반드시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손을 대신 일은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것이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손을 댄 일도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손을 대신 일은 반드시 실현시킵니다. 지나간 삶에 이미 베푼 은혜는 미래를 위한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시 90:16- 17).

우리가 믿음 안에서 손을 댄 일들이 마치 하나님 자신의 손끝이 닿은 것처럼 되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는 일에 지치지 마십시오. 우리 손의 행사가 견고케 될 때 주의 행사가 나타나고 그것을 우리의 후손들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다릅니다. 대단한 약속을 쉽게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여러분의 남편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하십니다.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주의해서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불성실해서 어물쩡하게 넘어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분의 약속은 실현된 것처럼 확실합니다.

다윗은 지금 잘못을 해서 쫓기는 신세가 아닙니다. 죄가 있다면 일찍부터 남달리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아직도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임금과 한 통속이 되지 못해서 비록 지금 쫓기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는 모르나 반드시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천명 되는 추적자의 손에 희생되지 아니하고 살아남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것을 그는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언제, 어떻게”를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합니다. 시편 138편 8절의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찌라”나하고 관련 갖고 있는 것은 전부다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야 되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얼굴이 싱글벙글 해져야 됩니다.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것은 모두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해 주시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미리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미리 찬송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친히 약속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금 기본 질문을 해봅시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숨어있는 굴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늘의 도움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57편에서 다윗은 네 번(3, 5, 10, 11절) 하늘을 도움의 원천으로 고백합니다. 그 첫 번째 고백이 3절에 나옵니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 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 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여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 57:3-4).

하늘의 도움을 바라는 다윗의 현재 처한 형편과 그 어려움을 살펴봅시다. 극한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이라고 말합니다. 잔인한 농담과 모욕적인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선한 자를 씹는 것만큼 악인에게는 더 큰 기쁨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4절은 할퀴고 물어뜯는 사자 중에 처하여 있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처럼 사자 같은 대적들이 그를 향해 울부짖고 추격하고 상하게 했지만 그를 아직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사울과 그 일당이 다윗을 놓친 아쉬움으로 인해서, 그 구석에까지 들어갔는데 놓친 아쉬움으로 인해서 사자처럼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직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무리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습니다.

불사르는 자 가운데 누웠도다라고 말합니다. 사자 굴의 위험에서 이제 격렬한 풀무 불을 연상시킵니다. 성질이 불같은 사람은 자기의 인생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태우려고 듭니다. 자신이 망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까지 망가뜨리려 듭니다. 함께 죽자는 심사입니다.

정말 성령께서 떠나신 후에 사울은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히스테리를 일으킵니다. 혀와 이를 칼과 창으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상하게 합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상대방을 못살게 합니다. 처음에는 말로 상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실제로 창칼을 들고 지금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경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은 관계의 어려움입니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세월과 함께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람에게 당하는 고통”입니다.

가난이나 질병은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만 참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따라다니면서 욕을 하고 악한 말을 내어 뱉기에 참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시키는 가장 어려운 코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입니다.

바로 옆에서 악한 말을 내뱉으면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최선입니다만 어디 그것이 쉽습니까? 남이 나를 무고히 욕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으면 상당히 성숙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귀로 듣고 나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뚜껑이 열린다”이런 표현들을 쓰지요. 

그럴 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4).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내어 주십니다. 누구를 보내주십니까? “나를 지키는 자”를 보내어 주십니다. 보내어 다윗을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원하십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보여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구원하기에 능하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를 파견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한 면만을 보고 살지 마십시오. 어두운면, 힘든면, 고통스러운 거기에만 여러분의 시선을 집중시키지 마십시오. 큰 곤경의 시기는 놀라운 은혜를 기대할 때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달리 방법이 없어지면 하늘을 열고 매일 아침 만나를 공급해 주십니다.

대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은 천상의 부대들을 보내십니다. 그리하여 대적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십니다. 전투가 치열한 곳에는 하늘 본부로부터 특별한 지원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총사령관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마음을 지키십시오. 제발 뚜껑이 열린다고 말들 하지 말고 그 때도 마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악한 말로 비방하면 누구나 마음이 상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흥분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에만 마음을 쓰십시오.

다윗은 반복해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함께 진리까지 보내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간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구해야만 주시는 줄로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도 주시지만 생각하지 않은 것, 기대하지 않은 것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가 구하는 것만 딱딱 정수로 주었다면 우리는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입니다. 초라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훨씬 더 넘치도록 하셨기 때문에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인자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가서 ‘모르겠다’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왜 기대했느냐?’는 식으로 발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먼저 답하기 전에 본래적인 질문을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숨어있는 굴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5절과 11절은 후렴처럼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두 번 반복되는 이 구절은 시편 57편의 후렴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기도를 채 끝내기도 전에 찬양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마치 사자 굴에서 터져 나오는 노래 같습니다. 용광로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찬양 같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은 하늘보다 높으신 분이기에 우리의 찬송도 높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소원합니다. 마치 공기가 만물을 둘러싸고 있듯이 찬양이 온 세상을 둘러싸기를 바랍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긍휼을 부르짖던 성도의 기도가 갑자기 우렁찬 찬송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 긴박한 상황의 반전을 밝혀주는 구절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웅덩이를 팠는데 결국 그 웅덩이에 자신이 빠졌습니다. 다윗 일행이 숨어있는 굴속에 사울이 들어와서 낮잠을 잔 것입니다.

최악의 순간이 최선의 순간이 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울의 몰락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끝났고 이제 힘이, 권세가 자기의 손으로 넘어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의 폭정은 끝나고 진리의 새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내다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 하리이다.”(57:7) 확정 되었다는 것은 어둠의 세상이 물러가고 새로운 아침이 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통치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둡고 고통당하는 시대였습니다. 불의가 창궐하던 시대였습니다. 이제 사울이 자신의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한 시대가 끝나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울은 백성들을 속일 수 없고 이스라엘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목청껏 노래하며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며 주께 영광 돌리는 새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중창단, 우리 연주 팀들 11월에 일본 가서 박 선교사 창립예배 드리는데 한번 같이 가서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57:8). 이 복음의 위대한 아침이 오고 있다는 사실 앞에 아침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깨워서 새로운 날을 준비시키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고함소리나 비상벨 대신에 아름다운 음악으로 백성들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지도자의 특색은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입니다.

소중한 백성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에 기분 좋게 일어나도록 비파와 수금으로 깨우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백성들은 더 이상 정치가로 인해서 짜증을 내지 않고 압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존경을 받는 삶을 사는 새 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욕과 수치와 압제가 사라집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57:9-10). 다윗은 지금 이 새로운 아침이 다만 이스라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열방 중에도 임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만민이 새날의 영광으로 나아오길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이 퍼지는 곳마다 새날은 밝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비전이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하고 그가 다스리는 곳마다 하나님의 진리가 하늘까지 미치길 소원합니다. 아무도 하늘을 가득채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부터 벗어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궁창에 도달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금 뜨거워진 다윗의 마음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제 복음의 태양은 하늘 높이 떠올랐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은 다 물러갔습니다. 온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한 나라에 밤이 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지도자 한 사람은 온 나라에 빛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의 결단하는 성도가 있으면 한 민족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헌신하고 나아가면 거기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빛이 비취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주를 섬기기로 결심하면 세상이 밝아져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어떻게 그 굴속에 그것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피해 다니는 그 굴속에서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피해 다니는 자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물두번이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도움의 원천으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동굴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동굴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 가득히 주님 영광이 온 세계에 가득해 지기를 소원하면 동굴도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진리의 복음이 전파된 시대입니다. 각자 양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신앙 양심에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이웃을 섬기는 새로운 날이 밝아왔습니다.

오늘은 특별 헌금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하기로 봉투를 나누어 드렸습니다. 얼마나 해야 될까요? 그럴 때는 쉽게 생각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여러분이 어려움이 어려움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유리창이 하나 나갔습니까? 그럼 유리창 고치겠지요. 그 돈 들겠지요. 그렇게 생각을 하면 간단해요. 여러분 유리창 깨지고 돈 들여 고치는 게 쉽습니까? 유리창 깨진 만큼 돈만 들이는 게 쉽습니까? 어느 쪽 택하렵니까? 저 같으면 유리창 안 깨지고 유리창 값 그냥 내고 말겠습니다. 그게 훨씬 더 나은 선택 같아요. 차가 망가지고 수리한다고 고생하면서 끌고 다니기를 원합니까?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헌금 한번 하는 게 낫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세상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 양심에 따라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 그 말 듣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 예수님 말씀인줄 여러분 알고 있지요? 참 좋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한번 그렇게 해 보십시오. 연락이 다 안 되어서 얼마나 돈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거기 봉투에 작정금액 쓰면 여러분의 작정금액 만큼 교회가 미리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간에라도 지원하기 위해서 급히 하게 되었습니다.

제 때에 어려울 때 돕는 도움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다음 주간까지 우리는 미루어 두지 않기 위해서 오늘 헌금하고 오늘 작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주간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애가 사람들의 칭송 받는 복된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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