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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이 원하는 일군의 자격 /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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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경이 원하는 일군의 자격
말씀 : 행 6:1-7


고향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저는 지난주간에 부산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너무도 반갑게 우리교회 박창록 안난숙 집사님 내외분이 오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우리 식구라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예배 마치고 함께 만나 여기 왠일이냐고 물었더니 지난 번에는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이번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 부모님들은 하나님을 영접했고 그리고 부적을 자기 손으로 다 띠고 그 우상단지들을 다 없애고 가족들끼리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것이 너무 좋아 자랑하러 나한테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한 가정을 주님의 구원의 울타리로 부르는 그 과정을 설명하면서 설명하는 분은 눈물이 글썽글썽하고 저는 그 이야기를 서서 들으면서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금번 명절에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오늘은 우리 안산빛나교회 지난 14년 역사 속에 세 번째 임직을 앞두고 있어지는 제2차 권사후보, 안수집사 후보를 추천하는 날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이 성경이 원하는 일군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는 본문에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사람 7명의 이름을 아름다운 초대교회에 역사에서 봅니다. 성경은 지금 7명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아론과 훌을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 대단한 바울 사도에게도 실라, 디모데, 바나바 등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여 협력하게 했습니다. 우리 안산빛나교회에도 목사 혼자 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끊임없이 성경이 원하는 7명의 필요를 목말라 하곤 한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부러워하기 전에 저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주목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에 영광인 저들을 성경이 평할 때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보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이루었냐 보다 놀랍게 성경은 저들이 어떤 사람이었느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내가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 받으라” 하셨는데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놀랍게 하나님의 기준은 얼마나 어떤 일을 많이 이루었느냐 보다 그 일들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너는 어떤 사람, 어떤 교회가 되었느냐에 성경은 훨씬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원하는 일군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온 무리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주의 일에 앞장서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 칭찬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많은 일들을 하는 중에 결정적 순간에 도리어 주님의 복음을 가리우는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좀 더 인격적이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진정한 인격은 배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 속에서는 내 자존심, 내 주장을 높여 교회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좋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여러분, 우리 주님이 좀 더 좋은 주님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내가 병든 것을 치료해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주님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주님이셨고 나는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겠다고 마음은 먹어 보셨는지요? 신앙생활 하다보면 목사에게 원하는 요구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다른 지역의 목사님들 보다 더 훌륭한 목사님이었으면 좋겠다, 다른 목사님보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사는 목사였으면 좋겠다 하는 목사에 대한 바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어서 나는 목사에게 정말 좋은 성도가 되어 줄려고 노력은 했는가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또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교회가 좀 더 좋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여러분 좋은 교회는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앞에 좋은 성도들이 모두어져서 함께 어우러지며 좋은 교회가 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관계 속에서도 좋은 사람 찾아다닙니다. ‘하나님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라기 보다는 훨씬 더 소중한 것은 내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너 안 볼거야’ 이렇게 하는 것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든지 좋은 사람이 되어 준다는 거 이것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또 하나의 필요입니다.

여러분, 인격의 기본 또 하나는 자신이 마음, 자신의 감정, 언어를 다스릴 줄 아는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 언어에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많은 일들을 맡겨 보면 우선을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 순간에 복음을 가리우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일군의 자격 중에 칭찬 듣는 사람이 되는데는 바로 모범을 보이는 성도입니다. 거듭 말하기보다는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지는데는 더 똑똑한 사람이 자기 주장을 높이기보다는 범사에 모범을 삼을 만한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교회와 가정은 더 가르쳐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대로 사람이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집간 딸이 대학을 졸업했어도 가서 사는 것을 보면 대학에서 배운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것을 보면 친정 엄마가 산대로 산다고 합니다. 그 엄마가 무엇을 어떻게 보여 주었느냐, 그래서 친정 엄마의 모습이 내 안에도 보이고 저도 때로는 자녀들이 말 안들을 때 ‘이놈들’ 하고 혼내는 걸 보면 30년 전에 우리 부모에게 혼나던 모습이 그대로 입장만 바뀌었지  재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 이것을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앞선 사람들이 모범을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항존직은 나 하나 잘하는 것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좋은 성도가 되어주지 않은 채 좋은 교회를 목말라 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들은 칭찬을 듣는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주의 일을 인간적 열정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목사로서 이곳 저곳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는 내 힘으로 되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재산, 내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목말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가슴은 텅 비어 있으면서 내 가슴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으면서 일군을 하다보면 지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군들은 자신의 영성관리, 기도와 말씀과 예배 앞에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성경을 일 년 내 안 읽다가 성경통독 대회에 가서 일주일 내에 일독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건은 쌓여 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세워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도와 말씀 앞에 무너져 있다면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제가 2, 3주전에 저녁예배 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기도와 말씀 그 기본이 무너져 있으면서 자신의 영성에 힘이 없다는 사실을 봅니다.

성경이 원하는 일군의 자격 또 하나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어도 사람이 좋아 보여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교회에 리더가 되면 안됩니다. 직분을 모자라고 예를 듭니다. 모자는 알맞게 써야 폼이 나지 너무 무거운 모자를 쓰거나 큰 모자를 쓰면 쓰긴 썼는데 내 눈을 가리워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십시오. 내가 교회를 오래 다녀서, 사람이 좋아서 그래서 임직을 받아야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당사자가 피차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또 하나 저들은 이미 헌신이 증명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항존직은 반드시 그 헌신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기도하는데 은혜를 사모하는데 헌신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안타깝게도 교회에 와서 예배는 제대로 드리지 않은 채 안내만 하다가 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지 않은 채 식당 봉사라고 주방에서 일만 하다 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 중에 가장 모범을 보여야 될 것 중에 하나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역적인 측면입니다. 교사를 성가대를 목장 인도자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는 꾸준히 수년동안 사역을 감당해 왔는가? 이 부분은 또 하나의 숙제입니다. 또 하나는 봉사의 영역입니다. 차량봉사, 식당봉사, 교회 청소봉사 관리하는데 나는 이런 봉사에 드려졌는가? 또 하나는 헌금봉사입니다. 십일조는 기본입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분복에 대한 십일조는 기본입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헌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내가 헌신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착각입니다. 십일조 외에 다른 부분으로 인색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신한 만큼 사랑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부산 가나안 수양관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마지막날 그 태풍이 오는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기도했던 대형버스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버스 나온대’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좋아합니다. 그리고 저한테 와서 ‘강사목사님, 저 오늘 특송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못하는 솜씨로 찬송을 부르고 간증을 했습니다. 왜 통곡을 했냐고 물어봤더니 버스가 오늘 나왔지만 이 사람은 2년이 넘게 예배드릴 때마다 만원씩 버스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2년을 넘게 1,150,000원인가 드려졌을 때 지금 버스가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버스를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기분은 좋았지만 이 헌신했던 사람은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 혼인잔치에 기적을 아십니까?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합니다. 연회장에서 포도주를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떠 서 갖다 주어라’ 하인들은 이해는 가지 않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서 갖다 줍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이 말씀이 원어에 보면 ‘감격이 있더라’ 그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똑같은 포도주를 앞에 두고 연회장은 그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좋아했지만 이 포도주가 물이 포도주가 되는 데 땀을 흘렸고 헌신이 있었던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어 섬기면서 중요한 것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 중요합니다. 교회가 새로운 성전 부지를 구입했다 좋은 일입니다. 비전센타가 세워지고 있다 좋은 일입니다. 나도 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 교회가 잘 나가고 있다는 거 기분 좋은 일입니다. 모두가 반갑고 좋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되어지는 일들 가운데서 남달리 눈물 흘리는 사람, 남달리 감격하는 사람, 가슴이 뭉클뭉클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냐 자신의 삶을 쏟아 부었던 사람입니다. 이 교회가 여기까지 온데에는 자기 집을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여기까지 오는데는 사업자금 할 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어 논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눈물 흘려 헌신한 사람은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아 좋네’ 이게 아닙니다. 감격입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값없이 주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값없이 받는다고 해서 우리 구원을 값없이 취급하면 안됩니다. 내가 값을 치루지 못하니 주님을 값을 치뤘고 주님을 피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희생한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서 한번도 흔적에 남는 헌신 한번 한적 없이 그럭저럭 있다 하늘나라 가면 별로 감격할 거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눈물로 헌신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서 느끼는 감동도 감격도 남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헌신된 만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헌신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자를 사랑하면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겁니다. 집에서는 설거지 한번 안하고 물에 손 한번 안 댄 아가씨도 누구를 사랑하면 자취방가서 다 치웁니다. 왜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사랑하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 몸을 희생한 거 아닙니까? 내가 일정기간 다니는 교회가 아니라 이 교회를 내 교회로 하나님 앞에 받들어 섬기면 사실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지는 일들을 보고도 눈을 감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사역에 있어 봉사에 있어 헌신에 있어 헌금에 있어 조화를 이룬 이들이 7명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초대교회 일곱집사 저들은 확실히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5천명, 8천명 중에 일곱이 뽑힌 것은 저들이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가졌다고 배웠다고 지위가 있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휼륭한 사람 일곱을 뽑아 맡겨진 일들은 실컷 해야 먹을 것 나눠주고 구제비 나눠주는 험한 일들이었습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의 일이 맡겨질 때 ‘이까짓 일 시키려고 나 뽑았어?’ 라고 원망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일이었기에 소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지는 비결은 밖에서 대단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할 것이 왜 없습니까?

우리나라 최고의 문제는 실업자 문제의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실업자 문제는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형제들이 일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다 배부른 거 아닙니까? 무엇이라도 하면 할 거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 동남아에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와서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저들 중에는 교사들도 있었고 저들 중에는 고급 공무원도 있었지만 마음을 낮추고 무슨 일이라고 하려고 하니 왔던 것입니다. 실업자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로서 성도로서 저는 후배 목사들을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배님, 목회 할 때가 없습니다. 갈 때가 없습니다.’ 왠일인지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입니까? 나는 이만큼 배웠으니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나는 이 정도는 일해야돼, 이 정도는 대우받아야지’ 생각하니까 갈 데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주님을 나를 위해서 낮아졌던 것처럼 몸을 낮추면 갈 데가 얼마나 많느냐는 말입니다. 소록도에서도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기다리는 곳은 많은데 우리 마음을 높이니 대단해지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 교회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밖에서는 대단해도 교회 와서는 작아지는 것입니다. 머슴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서울 시장인 이명박씨가 소망교회에서 내가 현대건설 사장이었고 집사로서 내가 헌금도 이만큼 했으니 내가 장로되야 되지 않겠는가 장로 투표에 나가서 내리 3번을 떨어졌습니다. ‘아 이걸로 되는 게 아니구나’ 마음을 낮추고 뭘 해야 될까 생각해 보니까 교회 주차요원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주차안내를 일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 사람 장로 되려고 노력하네’ 또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 분이 마음을 낮춘 것은 ‘장로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봉사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구나’ 어느덧 그가 봉사하면서 마음을 낮춘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었구나’ 마음을 낮췄을 때 그는 장로가 되었고 서울시장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더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우리교회 장로님들에게 제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머슴이 되어야 우리교회가 아름다워진다고 제가 이야기합니다. 장로님들 여기에 순종하고 주일날 앞치마 두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거 보면 저는 감격합니다. 여러분, 장로가 어른이라고 권위를 잡으려고 한다면 교회는 날 새는 겁니다. 낮아지는 겁니다.

두 번째 교회는 일군을 세우는 목적입니다. 일군이 일군 될 때 자기 체면이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절대 계급이 아닙니다. 철저한 섬김입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저들은 철저하게 사도들의 사역을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맘껏 사역할 수 있도록 협력했다는 이야깁니다. 어설픈 논리로 장로는 권사는 평신도 대표들이어야 한다며 사도들을 견제하거나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될 사도들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마음속에 ‘나는 평신도 대표야, 목사를 견제해야 돼’ 이런 논리가 있다면 그런 사람이 앞장서면 교회도 자신도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목사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장로가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엎드려 겸손하고 낮아지면 그 일들을 행하는 여호와, 그 일들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께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군은 절대 자기 만족이어서는 안됩니다. 목사와 성도는 꼭 부부하고 똑같습니다. 부부관계는 좋을 때는 하루라도 못 보면 못살아요. 그러다가도 도장 딱 찍으면 원수가 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10년 넘게 신앙생활 함께 하다가 등돌리고 가는 것 보면 세상에 인사도 안하고 갑니다. 여러분은 남편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생겨서 삽니까? 남편이니까 삽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남편이 돈이 더 잘 벌어다줘서 삽니까? 살아야 되니까 삽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이 인격적으로 훌륭해서 삽니까? 어쩔 수 없어서 삽니까? 신기합니다. 더 좋아서 사는 게 아니라 부부이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제가 안산1대학에 가서 이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했더니 ‘목사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삽니까?’ 사랑은 연속극에서나 하는 것이지.... ‘사랑은 감정의식에서 싹터서 책임의식에서 열매 맺는다.’ 처음 만날 때는 좋은 감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 낳고 살면서 감정은 없지만 책임의식에서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남편을 처음에 사랑해서 선택을 했으면 선택을 했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우리교회가 더 훌륭한 교회이기 때문에 더 훌륭한 목사님이 있기에 내가 교회에 나온다면 더 훌륭한 목사를 만나면 교회를 옮기게 됩니다. 더 잘난 교회를 만나면 여러분은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교회와 목사는 하나님이 맺어 준겁니다. 제가 안산기독교연합회 임원으로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안산에 저런 보배와 같은 목사님이 있다니 교회는 크지 않지만 그 분 앞에만 가만 고개도 들지 못할 정도로 귀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 놓아두고 나한테 맺어준 것은 하나님이 맺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쏟으면 헌신을 쏟으면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음을 주지 않고 헌신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요즘에는 젊은 부부들이 이혼을 많이 합니다. 이혼하는 부부중 대부분 결단을 내리는 사람을 보면 남편 몰래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은 이혼을 합니다. 서로에게 마음을 주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수없이 고비는 만나는 것입니다. 남편이기 때문에 때로는 아내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 묻어 가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맺어 준겁니다. 여기서 은혜 받고 여기서 하나님을 노래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얼마나 가치인줄 아십니까? 초대교회 일군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교회부흥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우리모두를 함께 만나게 하시고 함께 어우러지게 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끼리끼리 모여 즐거워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녀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맘에 맞는 사람끼리 ‘우리 개척한번 할까?’ 그런 교회 치고 2년 이상 가는 교회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곳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니 내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울타리만의 확장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의 협조에 매주 부흥회를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어떤 때 부흥회를 가면 보따리 싸서 집으로 도망 오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평안하고 부흥 되서 부르는 곳은 10교회 중에 2교회 밖에 안됩니다. 교회가 몇 년 동안 침체되고 싸우는 중에 저를 오라고 부릅니다. 딱 첫 시간 예배드리면 도망 오고 싶어요. 그런데 첫 날은 말씀을 듣지도 않았던 사람이 서서히 감동하며 울기 시작하고 마지막날 몇 년 동안 골이 깊었던 사람들이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합니다. 그것 보면서 매주 내가 속아서 또 갑니다.

일군이 세워진 목적 또 하나는 섬김입니다. 교회의 어른들은 절대 어른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군이 되어 많은 은혜를 입은 경우도 있지만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은사가 있어 누군가를 붙들고 기도하면 성령을 받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그는 잘 믿는 사람, 주변의 사람도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주변의 사람에게 인정을 받다보니 당을 지었고 끼리끼리 모이면서 교회를 상하는 자로 발전해 버리고 맙니다. 무엇입니까? 니골라는 이단으로 넘어갔으니 겉으로는 잘 하는 것 같으면서 그 마음속에 다른 교훈을 품고 있는 사람은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정의합니다.

계시록 2장 6절에 보면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너희도 니골라당을 미워하는구나 잘하였다’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안에 신앙생활도 잘하고 예수 믿는 것도 뭐든지 잘하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 다른 교훈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열 번 백 번 몸부림쳐 노력하지 않으면 옛날로 또 돌아갑니다. 저는 여호와의 증인에서 몸부림치는 사람, 저는 JMS 정명석한테 빠져있는 사람 울면서 건져내어 보았습니다. 저들이 한 두 번 안간다고 해서 저들의 영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10년을 몸부림치는데도 순간 옛날 생각이 나서 또 바뀝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교훈 외에 또 다른 교훈을 가슴속에 품고 어디 가서 배우고 또 가르친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중에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목사가 저러면 안되는데 옛날에서 빨리 탈피해야 되는데 이런 염려가 있습니다. 니골라와 같은 사람은 열심히 있는 것 같아도 교회 안에서의 지도보다는 유대교 다른 종교를 기웃거립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우리의 영성이 혼미한 영이 틈타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한 번 그런 영이 내 안에 들어와 자리잡히면 이걸 정말 이기기 힘듭니다. 귀신론, 주변에 이단성향이 있는 교회들, 그리고 거기에 한번 젖었던 사람은 무섭습니다. 통일교 문선명 박태선 진짜 별거 아닌 사람 아닙니까? 어떤 분이 박태선에 젖어 있다가 우리교회에 나왔는데 어느 날 내가 깜짝 놀란 건 그 분이 아직도 장롱 속에 박태선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시간만 있으면 그 사진을 보며 ‘주님’하면서 꺼내 본다고 합니다. 이 악한 영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신앙생활하면서 한 번 엉뚱한데 젖으면 이 혼미한 영이 물 한 컵이 더러워지면 이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많은 물이 필요한 것처럼 내가 한 번 엉뚱한데서 설교 듣고 엉뚱한데서 한 번 기도 받았다 이것이 한 번 씻어지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십니까? 조금은 우리 아내가 무덤덤하고 무드가 없어도 그래도 아내와 있어야 정상이지 누가 유혹을 한다고 기웃거렸다가는 빠져 버리고 맙니다. 똑같은 겁니다. 우리 교회가 남달라서가 아닙니다. 한 번 엉뚱한데 젖었던 사람은 몸부림치면서 이기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약을 맞은 거 하고 똑같습니다. 가룟유다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고 선택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왜 가룟유다, 니골라가 무너집니까? 스스로 무너진 겁니다.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그래서 다 좋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가장 방해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앞선 사람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단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흐물흐물한 사람은 절대 안 넘어 갑니다. 유달리 열심히 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갑자기 흐물흐물 있는게 감사해집니까? 여러분, 초대교회 일곱집사 저들을 구제하라고 뽑았지만 저들은 구제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신다” 이 말처럼 니골라와 달리 빌립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가 됩니다.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최초의 선교사는 사도가 아니라 빌립 집사였습니다. 스데반을 보면 그가 전도사역을 감당하다가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최초의 순교자는 제자가 아니라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의 이름이 면류관을 뜻하는 것처럼 그는 순교자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초대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일군이 일군 될 때입니다. 아름다운 평신도 하나님의 교회 수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맺어줬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우리 주님나라 가는 그 날까지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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