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각하고 행동하라` (빌 4:8-9)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생각하고 행동하라" (빌4:8-9)

요즘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더 잘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서야 이 사회도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날씨도 우리 믿는 사람들
이 바르게 서야 하나님이 복 주실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도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하나님 잘 믿어야 겠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는데, 믿음 생활 잘 해서 우리 때문에
이 민족과 이 나라가 세계가 복을 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 하면,
‘잘 사는 삶, 축복받는 삶’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세상적으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은혜
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끝으로 형제들아” 이렇게 시작됩니다. “끝으로”란 말에는 ‘마지막’
이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형제들아”합니다. 이 형제란 말에는 피를 나눈 형제입
니다. 우리도 피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입니다. 구원받은 예수
의 피, 한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육체적인 피가 진합니까? 예수의 피가 진합니까?
예수의
피가 더 진해야 살 길이 열립니다.

따라하십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옆사람에게도 이야기 하십
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남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늘 생각할 때마다 “잘 살아야 될텐데”하는
바람 뿐입니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보면 별 볼일 없고, 그런 것이 우리 사이입니
다. 그래도 집에 왔다 가면 “자동차 운전 할 때 조심해라.” 사십이 넘었는데도 형이 잔소
리를 합니다. 그래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라.”, “예”하고 대답합니
다.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형제 아닙니까? 그런데, 형제 사이도 좀 비슷하게 살아야
낫고 너무 편차가 너무 어렵습니다. 잘 되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이 사도바울의 마음 속
에 있습니다.

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
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슨 덕이 있든지 - 도덕적으로 뛰어나고 완전하다 할지라도.
무슨 기림이 있든지 - 기림은 인정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 할지
라도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엇에든지’가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잔소리 하는 것입니다. 제
동생이 잔소리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잔
소리 하면 매맞습니다. 잔소리는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형제가 형제에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라는 말씀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들이 도덕적으로 괜찮습니다. 또 이 사람이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
든지, 그래도 계속 권고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섯 가지 가운데 두 가지만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1.‘무엇에든지 참되며’

이 ‘참되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참되다’ 하는 것입니다. ‘참되다’고 하는 것은 ‘완전
하다, 부족함이 없다, 허물이 없다, 거짓이 없다, 꽉 찼다, 알찼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
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참되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
다. 시121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
호와에게서로다 저가 나로 실족지 않게 하시도다 저가 나를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
도 아니하시고 지키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환난에서 면케 하시며”, “나를 지키시며 나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
키시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받
을 것을 두려워 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
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참되야 합니다. 알차
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온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살길이 열리는 것
입니다. 네가 아무리 덕이 있다 해도 인정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참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서서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
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부름 받은 종입니다. 그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 입술이 부정하다고 합니다. 하나
님의 일을 하는 것조차도 완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이것만
은 완전해야 하는데, 이것조차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먼지가 있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햇빛이 비치면 보이지 않습니까? 하
물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섰을 때에 일하는 내 입술조차도 부정한 것을 발견하는
데, 하나님이 그의 입술을 숯불로 지져 주시니, 그 때에 비로소 일군이 될 수 있었습니
다. ‘무엇에든지 참되며’라고 하지만, 사람은 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비추어 보십시오. 얼마나 허물이 되고, 부족함을 느낄 수 있는지, 누구라도 비판
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참되기 위해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907년은 한국교회 부흥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운동의 시작은 회개 운동입니다.
길선주 장로님이, 목사님이 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무개의 돈을 사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앞에 회개합니다. 내가 내일 당장 이것을 갚겠습니다.”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얼마든지 사람들 앞에서 숨길 수 있었지만 고
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여기서부터 한국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자복합
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
앙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회개하십시오.”

자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참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니 신앙이 성장하겠습니까? 그렇게 안 하니 신앙생활 하면서도 기쁨이 있겠습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참되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고 허물 된 것을 하
나님 앞에 자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가 달라질려면 죄인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의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옳다고 하니 논쟁이 생기지, 내가 죄인이라고 하면 왜 논쟁이 생깁니까?
우리는 너무나 비판에 강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사람은 하
나님 앞에 죄인임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제 친구 이야기입니다. 기도하다 보니 부인한테 너무 잘못한 것 같아 부인한테 “잘못했
어. 내가 잘못했어.”라고 했더니, 다 해결 되었답니다. 요즘도 가끔 전화 한답니다. “그
말 진짜지?” 부부지간에도 잘못했다고 하면 다 해결되지 않습니까? 꼭 문제가 되는 사람
은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다” 고 걸고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너도 술 먹지 마라” 했더니, “어느 목사님도 먹던데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괜
히 걸고 넘어갑니다. 남은 왜 걸고 넘어갑니까?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참되야 합니다. 예배도 참되게 드려야 합니다. 정말 이 날을 위해서 토요일
에 안식일, 예배를 위해 준비합니까?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간호사에게 사정해서 여기 와서 앉아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좀 지나친 점은 있어도 하나님 앞에 참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밤새 일하고도 1부 예배 나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 내내 일하면 아침 6시에 끝납니
다. 그러면 눈을 붙이면 나오지 못할 까봐 눈을 못 붙인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 잔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런 참됨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
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헌금생활은 어떻습니까? 생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 고백하지 않습니
까?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떻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참되게 사
느냐 말입니다. 십일조 생활 정직하게 해야 합니다. 1년 365일 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
한 일이 그렇게 없습니까? 감사 한번도 제대로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인데,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 중 한 분이 집을 팔았다고 합니다. 살 때와 팔 때 가격이 남았다고 합
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했답니다. 참되게 살려고 애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하기는 하는데, 하나님
앞에 참되지 않기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참되지 않은데, 하나
님이 나를 참되게 하시겠습니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정신차리겠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된가를 생각하십시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리라”

저는 요셉이 생각 났습니다. 요셉이 어떤 사람입니까? 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으로 팔려
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감옥에 갔을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참
되게 사시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되신 하나님이 감옥에 있을지라도 국무총리가 되는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경건은 사람 앞에 경건입니다. 국어사전의 ‘경건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며 조심성이
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말입니다.
약1:26-27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
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일단 혀에 재갈을 먹이는 사람입니다. 재갈은 소나 말의 입에 일시킬 때
거는 것입니다. 수레를 끌거나 쟁기를 갈 때에 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합니다. 주인
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어디에 씁니까? 우리의 말을 어디에 씁니
까? 일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데에 써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속이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쓴다면 이것은 문제 있는 것입니
다. 경건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적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경건이
아닙니다. 입에 재갈 물려야 합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남의 말이나 하고 비판이나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기 허물이나 부족을 알면 남의 허물을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경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
들지 아니하는 이것”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약자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보면 강자에는 약하고 비굴하다가도 나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강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구 대하고 반말 지껄이고 우습게 여기고 대접할 줄 모르고 세상에서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약한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경건
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 하면서도 남들 하는 것 다 하려 하고, 맛있는 것은 돈이 아무리 들어도
다 먹으려 하고, 너무 보약 먹는 것 좋아 하지 마십시오.
자기 형편에 맞지 않게 비싼 것, 그럴 수 있지만 너무 세속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혼하는 것도 예수믿는 사람들끼리 마음 맞춰서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경건하다고 하면서 너무 “돈, 돈” 하거나 “명품, 명품” 하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 집도 너무 화려합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 세속에 물들어 있지 않습니까?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살아있는 물고기는 흘러 내려오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바다에
있어도 그 고기가 짜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흐르는 물살에 같이 떠내려 갑니다.
바닷물에 그 몸도 같이 짜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
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삼가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
습니다. 조심성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성경은 약자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딤전2:8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
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결로써 자기를 단
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와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하심으로 하기를 원하
노라 ”
교회가 잘 되려면 남자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심야기도 시간에 남자들이 와서 기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여자들은 선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는 마땅한 것이니라”

딛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경로석에 앉은 중학생을 욕하다가 지하철에서 계단에서 밀려 뇌진탕으로 세상떴습니다.
“내 손주 겠거니” 하고 이해하면 어떻습니까? “버르장머리 없으니 앉았겠지” 하고 이해
하면 어떻습니까? 인내하지 못하고 다투고 왜 그럽니까? 나이가 드셨다는 것이 무엇입니
까? 그런 너그러움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오래 살지 않았습니까?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
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
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남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도 도와주도록 가르쳐
야지, 야단 치면 안 됩니다. 시집 와서 남의 집에 와서 사는 것도 힘든데, 아이 낳아주고
사는 것도 고마운데, 잘 보살펴 살면 어떻습니까? 사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참아주고
기다려 줄줄 알고, 사위자식도 자식인데, 있는 것 나누어 주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경건 아닙니까?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경건은 이론이 아닙니다. 말 잘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건은 소유가 아닙니다. 힘이 아닙니다. 명예가 아닙니다. 경건은
신앙의 텃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은
행동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섬기고 희생하고 십자
가지고 대신 죽어 주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행동,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누가복음10장에 보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
니다. “예수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성경에 무엇이라 하였느냐?”, “하나
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몸처럼 사랑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맞다
그렇게 행해라고 하시는데, 이 사람이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학자가 그렇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이
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묻고 있습니다. 시험하는 겁니까? 솔직한 심정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앞집 여자입니까? “연속극
제목 이야기 한겁니다.” 앞집에 사는 분이 과연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이웃이면 이웃사
촌이 되야 하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에겐 이웃이 없습니다. 그 당시 이
웃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민족, 같은 혈통,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만 이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계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해당하는 이방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
이나 다른 사람을 향해 개라고 불렀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랑이 항상 그 사람입니다. 목사님, 장로님, 교인들 외에 누구를 만납니까?
제가 지난 주에 전도한다고 찌른 사람이 몇 사람 있습니다.
해밀턴 호텔의 비서실에 있는 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그냥 웃습니다.
새로 부임하신 동장님, 지금 나오는 김동장님처럼 이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세례는 못받
았다고 합니다. 어제 교회 꼭 가시라고 전화했습니다. 가끔 우리 교회도 놀러오시라고.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가르쳤습니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자, 자기를 베푼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자니까,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잘 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된다고 합니다. 여자는 어려서 부모 잘 만나고, 커서
남편 잘 만나고, 늙어서 자식 잘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하
지만, 그 전에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집가는 처녀나 총각에게 이야기합니
다. 우리 집안에 며느리 잘 들어와서 집안 잘 되었다는 소리 듣고, 우리 사위 때문에 우
리 집안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비를 베푸는 사
람이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자비
를 베푸는 자가 되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이웃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들처럼 같은 민족, 같은 종교, 같은 혈통으로 한정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차별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신문에 쓴 글을 봤습니다. 불란서에 유학을 갔는데, 다섯 살 먹은 딸이 유치원
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아빠, 프랑스 애들은 나를 안 때려.”
이 나라에선 처음에 오는 애들을 보면 때려야 한답니다. 얼굴이 우리가 조금 진하고 한
국말 못하면 때립니다. 미국에서 우리 나라 애들 때리면 그렇게 분개하면서, 우리나라는
외국 아이들이 이 땅에 오면 왜 때리냐 말입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까?

조선족 교회의 서경석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선족 교회를 가면 조선족 여인
들을 만나는데, 식당에서 일할 때에 가장 큰 적이 사장이 아니고 동료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일을 더 많이 해도 한국사람들을 10만원이라도 더 줘야지, 똑같이 주
면 그 때부터 시비가 걸리고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자기가 연변에 가면 조선족, 연변
족들은 한국 사람을 보면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북한 사람들이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우
리보다 형편이 나은데도 한국에 가서 저런 대접을 받으니, 만약 우리가 통일되서 남한에
가면 남한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차별할 것인가 하며 통일이 되면 안된다고 합니다.
김정일이 죽는 것도 문제지만 통일이 되서 우리가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여유와 경
제적 통일비용이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은 과부와 환난 당한 자들
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경건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 더 힘센 사람
과 나라를 보면 벌벌 떨면서, 나보다 약한 자들을 보면 차별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이 아
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이웃이 없습니다.
강남사람끼리 모이고, 강북사람끼리 모입니다. 장애인과 비 장애우가 나누어 지고, 자동
차도 국산차와 외제차로 나누어 집니다. 아파트도 평수대로 나뉘고, 명품아파트, 임대아
파트로 나뉩니다.
어떤 분은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나와서 일자리가 없었어도 그것 때문에 살았다고
합니다. 학벌 때문에 나뉘고, 교회는 어떻습니까? 큰 교회 는 큰 교회대로 모이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모이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나누는지
없는 사람들은 정말 비굴해 지고 있는 사람들은 목에 힘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이런 속에 진정한 이웃이 있습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자비를 베풀수 있는 사
람입니까?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또 노골적인 이야
기 하나 할 까요? 전도하라면 할 수 있습니까? 예수 오래 믿으면 신앙 좋아져 전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웃이 어디 있어 전도합니까?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을 개라
고 하는데, 어떻게 전도합니까? 간절한 마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죄인들을
사랑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비정한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 하나님이야말로 강도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이웃
이 될려고 하면 다른 것 없습니다. 우리가 희생하고 우리를 내 주어서 우리가 이웃을 찾
아다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찾아가십니까?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찾아가고, 하나님 앞에 경건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 경건해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 되야 합니다. 구역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
보는 이웃이 되면 구역이 잘 될 수 있습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 단합대회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서 우리 남선교회 좋은 이웃이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을 찾을 때만이 남선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아닌 거룩한 손을 들어 하나님 찾는 데에 앞장서야 남선교회가 잘 될 수
있습니다. 금요일에 많이 나와 여러분들이 두손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여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대장되고 임원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회비를
내냐, 안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 여전도회가 이 시대의 진정한 이웃
이 되는가? 과연 그 일을 위해 노력하고 그 일에 대해 헌신하고 기도한다면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받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
시면 우리가 감옥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젠가 우리를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잘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잘 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 참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행동
하게 되면, 분명 길이 있고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참되지 못한 것, 하나님께 회개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것, 헌금하는
것, 헌신하는 모든 일에 경건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이 한주간도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