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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 / 시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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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
< 본 문 > 시146:1~5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직역하면 ‘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밥을 안 먹고도 여러 날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희망이란 말보다 소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희망 이란 말 대신 소망이란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반대로 소망이 없으면 금세 죽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1)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그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2) <인생찬가>로 유명한 시인 롱펠로는 지독한 고통 속에 인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두번째 부인은 끔찍한 화재로 사별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을 예찬하는 시를 많이 썼습니다.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극한 고난 가운데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정원의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늙은 나무지만 언제나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죠.” 그는 고목나무에서 인생의 소망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상실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동일한 악조건 하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 보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살자가 무려 8천명이 넘었고, 지난 1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놀랄 일입니다. 얼마 전엔 재벌 총수가 자살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혹은 가정불화 때문에, 실직해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이 안돼서, 청소년들 중에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 다양한 이유로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럴까 이해는 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살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이란 살라(生)는 하나님의 명령(命)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이유들보다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엄습한 절망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소망이 있으면 ‘자살’이 아니라 ‘살자!’가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비유하면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소망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이지만 얼마든지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붙드는 소망 중에는 헛된 소망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소망은 당장은, 잠시 동안은 살아갈 용기를 주고,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헛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는 모든 게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갖되 참된 소망,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헛된 소망과 참된 소망을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참된 소망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 영원히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헛된 소망 : 우리가 포기할 것

헛된 소망도 소망이기에 어느 정도는 삶에 의욕을 줍니다. 그러나 언젠가 실망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사람은 당장은 행복해 보여도 ‘잠재적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헛된 소망이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소망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인 소망’입니다.

 ① 막연한 소망: 근거도 없고, 불확실한데 그냥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후일 기대에 어긋나면 크게 실망하고 비관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장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입니다. 옛날에는 금광(노다지)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막연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 그러다가 오히려 그 소망이 좌절되고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속지 말아야 합니다.

② 세속적인 소망 : 세상의 재물, 권세, 건강, 향락 등에 관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소망과 기대가 있기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이런 것조차 없다면 사람들이 노력도 안하고, 세상은 정지될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소망은 이루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실망하고, 이룬다 해도 언젠가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종내는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성경은 곳곳에서 이를 경계합니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잠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세상 권세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권세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겁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닙니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죠. 그런데 요즘에 이 말의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권불오년(權不五年)이랍니다. 정권만 바뀌면 권력의 실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인생이 바로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야보고 선생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안개라고 표현합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합시다. 재물이든 권세든 영원한 가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얻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고,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일 뿐 우리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소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3절~4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2] 참된 소망 : 우리가 붙들 것

시편 기자는 이제 헛된 소망을 버리고 참된 소망을 붙들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도 언젠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 동안에도,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러실만한 분입니다. 시146:6 말씀대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이요 전능자이십니다.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진실한 분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그리고 시146:7~9 말씀대로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불쌍히 여기시기에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도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한번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배신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십니다.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토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이 닥쳐와도 피할 길을 열어보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잠14:32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기에 죽음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과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유용한 도구이고 서로 사랑하면 살 존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런데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의 절망 상태를 행27:20~21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 살 소망조차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객들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행27:22~25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얼마나 통쾌합니까? 선주도, 선원들도, 로마 군인들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당당하게 외치는 바울의 모습!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 276명이 살아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어디에 참된 소망이 있는지 ...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짜 소망 말입니다.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한결 같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마저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직 참된 소망이신 하나
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 모든 줄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재물의 줄, 명예의 줄, 권세의 줄, 인맥의 줄, ...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소망의 줄이 있습니다. 이를 붙드십시오. 그 줄은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줄입니다.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의 증인들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참된 소망으로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고, 이웃에게 소망의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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